외전 16화.
“왜?”
“예쁘다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하란 말이야. 그래야지 여자들이 좋아해요. 호들갑을 떨면서 칭찬하라고. 가령, 다시 반할 정도로 예쁘다든가.”
그 말에 아리스가 얄밉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나는 언제나 미레아에게 반한 상태이니 그런 말은 의미가 없단다.”
“이놈 봐라.”
열이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쓸개를 씹은 얼굴을 했다. 미레아가 민망하여 양손에 얼굴을 묻든 말든 아리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싶었다. 율비네도 질린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전에 등신처럼 굴 때도 꼴불견이었는데 지금도 꼴불견이네요. 아리스는 중도라는 것이 없습니까?”
아리스가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가주님께서 저녁 식사 전에 차나 한잔하자고 부르셨습니다. 옷 갈아입은 모습 보여 드리고 오세요.”
“알았어.”
“아리스는 빼고요.”
그 말에 미레아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다, 단둘이 말인가요?”
“그런 분위기였지요.”
미레아가 올 것이 왔다는 얼굴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미레아의 머릿속에서는 막장 소설의 한 구절이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 아들은 당신보다 더 좋은 가문의 아가씨와 약혼을 하였으니 너는 이거 먹고 떨어지렴! 그러면서 돈 봉투에 얼굴을 맞는 것이지.
그런 생각을 한 미레아는 아리스의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가 기분이 확 나빠졌다.
“아…… 나도 돈 많으니까 그런 돈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면 어떨까요?”
“무슨 소리야?”
생뚱맞은 소리에 다른 사람들이 되물었다. 미레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그게…… 아리스의 곁에서 떨어지라고 하시면 어떡하나 싶어서요.”
“뭐? 우리 할아버지는 그런 옹졸한 방법을 쓰지 않아.”
열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검으로 대화를 하시지. 둘 중 하나가 죽어 나가떨어지기 전까지는 놔주지 않을걸?”
“아, 그거라면 해 볼 만할 것 같은데요!”
“뭐? 우리 할아버지는 비록 연세가 있다 하셔도 마이련 내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이시라고. 지금도 아침마다 운동 삼아 검을 휘두르시는걸. 만만한 상대가 절대 아니야.”
열의 만류에 오히려 아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레아라면 할아버지와 해 볼만 할 수도…….”
“맞아요. 이래 보여도 저 역시 한 검술 하거든요!”
자신만만한 태도로 미레아가 화색을 띠자 열이 심란한 얼굴로 말했다.
“돈 봉투로 얼굴 맞는 건 싫은데 그쪽은 괜찮은 거야?”
“그러니까 내가 이기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옆에서 아리스가 한숨을 작게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레아라면 정말로 이기고 올 것 같았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가주님께서는 그렇게까지 꽉 막힌 분이 아닙니…….”
거기까지 말한 율비네는 오늘 아리스가 얻어맞는 장면을 상기했다. 사실 류광준은 평소에는 호방하나 아까처럼 자신의 기준에서 벗어난다 싶을 때는 가차 없는 성향이 있었다.
“음…… 뭐…… 잘해 보세요.”
율비네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어쩐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지라 미레아는 다시 부담스러워졌다. 율비네가 앞장서서 미레아를 포함해 다른 둘을 데리고 광준이 있는 사랑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광준은 대청마루에 나와 장죽을 물고 있었다. 미레아가 오는 인기척에 장죽의 재를 털어 불씨를 끈 광준은 그녀가 자신에게 꾸벅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얼른 손을 까닥까닥하며 불렀다.
“그래, 아가. 이리 와 보거라.”
“네에…….”
미레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자 광준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머지는 가 보거라.”
“할아버지, 미레아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아리스의 말에 광준이 장죽을 들고 위협적으로 반대쪽 손바닥 위를 탁탁 때렸다. 그 눈빛은 상대방을 압도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셋은 찌그러져 물러나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리스는 불안한 눈으로 두 사람을 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광준은 그것을 무시하며 미레아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은 보료에 앉고 반상 너머에 미레아를 앉게 했다. 방 한구석에서는 그가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환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저 중 하나를 뽑아 드는 건가?
미레아가 환도를 지그시 보고 있는데 광준이 기습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미레아 제인스터 양이라고.”
광준이 발음하는 악센트가 전부 틀렸으나 미레아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넵! 미레아라고 편히 불러 주세요!”
군기가 바싹 들어간 그 태도로 대답하자 광준은 편하게 앉으며 헛기침을 하였다. 그리고 반상 아래 두었던 상자를 꼬물거리며 꺼내더니 미레아에게 손을 까닥였다. 미레아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광준이 다시 헛기침하며 말했다.
“손.”
앗, 검이 아니고 돈 봉투인가?! 봉투를 건네주려고 하는 것인가?!
미레아의 생각과는 달리 광준은 미레아의 손을 내밀게 하더니 상자 안에서 꺼낸 것을 그 위에 고이 올려 주었다.
“이거 주마.”
봉투의 감촉이 아니고 동그랗고 맨질맨질한 감촉이 무엇인가 싶어서 손을 펴 보니 그것은 귤이었다. 미레아는 오렌지의 축소판처럼 생긴 이 과일을 처음 봐서 다소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귤은 마이련의 남쪽에서나 나기 때문에 북쪽 산악 지대인 세진에서는 상당히 보기 드문 과일이었다. 광준도 어쩌다 선물로 몇 개가 들어온 것을 아껴 두고 있다가 미레아에게 준 것이었다.
“귀한 거다. 먹거라.”
그렇게 은밀하게 속닥거린 광준은 한 번 더 헛기침하더니 자신의 몫으로 꺼낸 귤의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아, 저! 감사합니다!”
대충 어떻게 먹는 건지 파악한 미레아가 그것을 유심히 보다 그를 따라 껍질을 깠다. 광준이 먼저 먹는 것을 본 미레아가 자신도 과육을 입 안에 넣었다. 오렌지와 비슷해도 단맛이 더 진한 것이 새콤달콤하여 맛이 좋았다.
“우리 천이 그놈이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 듯싶은데…… 그놈이 불편하게 하지는 않는고?”
미레아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그런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있어서 편하고…….”
하지만 광준은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미레아는 이번에야말로 검을 뽑는 건가 싶어서 잠시 긴장했다.
“정말이더냐? 그놈이 편하다고?”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미레아의 대답에 광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놈이 말이 좀…… 아니, 너무 많지 않더냐.”
“아, 그건 그렇죠.”
“그렇지? 자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광준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미레아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짧은 시간 동안 파악한 광준은 딱 필요한 만큼만 움직이고 딱 필요한 만큼만 입을 열었다. 그런 그에게 잘 떠드는 편인 아리스는 다소 귀찮았을 것이었다.
“그놈 성격을 잘 아니 내가 잘 부탁한다고 하기엔 염치가 없어서 말일세. 그것도 자네 집에 염치도 없이 얹혀살면서 말이다. 자고로 사내 되는 놈은 그런 식으로 굴면 안 된단다. 그런데 자네는 그게 괜찮다니, 대체 사내 보는 눈이 왜 그러느냐? 자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내 적당한 놈을 소개해 줄 수도 있단다. 어떠냐? 그런 쭉정이 같은 놈 말고 믿을 만한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다.”
앗, 이건 다른 방식의 회유인가!
어쩐지 아리스를 버리라는 것 같은 말에 미레아는 다시 긴장하였다. 광준의 말은 아리스를 버리라는 의미가 맞기는 했는데 미레아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아깝구나, 아까워. 이렇게 참한 처자가 어쩌다 그리된 것이냐?”
“어…… 감사합니다?”
미레아가 일단 칭찬에 감사하다고 말하자 광준은 말을 이었다.
“혹시 그런 것이냐? 그…… 뭐냐.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이입하여 오히려 그를 옹호하는 행위가 종종 있다는데 그런 비슷한 것이더냐?”
그 말에 미레아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리스가 가해자이고 제가 피해자라는 생각은 오히려 그를 만나기 전에 떨쳤는데요.”
미레아의 대답에도 광준은 여전히 미심쩍어했다.
“그게 가능하다고? 그러니까 그게…… 내 입으로 말하기 조심스럽기는 하나…… 내가 자네 가족들의 사정을 전해 들은 것이 있는데…….”
미레아는 아리스와 있었던 이러쿵저러쿵한 이야기를 광준의 앞에서 다 말해야 하는지 고민되었다. 미레아는 저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빙빙 꼬며 생각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그건 아리스의 잘못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지만요…… 따지고 보면 아리스는 이용당했고…… 정말 나쁜 놈은 따로 있는 데다 아리스 역시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말이에요. 아리스가 아니라 해도 백익 니콜라우스라 불리던 자는 그와 비슷한 짓을 했었을 거예요. 하필이면 아리스가 운이 나쁘게 거기 걸려들었죠.”
광준은 미레아의 말을 고개를 끄덕거리며 경청하였다.
“이런 말씀 드리는 게 맞는진 모르겠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아리스를 증오했던 적도 분명히 있었어요. 그래도 마음 정리가 되고 배후를 알고 나니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더라고요. 아리스에게 보낼 증오를 배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기 바빠졌지요. 그러던 와중에 아리스를 만났고, 그를 직접 보니 용서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어요.”
미레아의 입가에 잠시 쓴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리스는 아마 그 일로 평생 괴로워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에게 내려진 벌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아리스에 대한 건 다 괜찮아졌어요. 애초에 저보다 더한 피해자이신 저의 아버지부터 별생각이 없으시던데요. 그러니 제가 거기서 왈가불가할 이유는 없지요. 거기에 복수심이나 증오라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괴롭기만 할 뿐이니 저만 손해잖아요. 그걸 알기까지 3년이란 시간이 걸렸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