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36화 (236/257)

외전 15화.

“열?”

미레아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아리스가 문을 열었다. 밖에는 아까는 보지 못했던 낯선 청년이 있었다. 아리스처럼 길게 기른 머리를 느슨하게 묶어 내린 그는 상당히 나른해 보이는 인상을 줬다. 그는 아리스와 미레아를 보고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아리스는 방문을 막아선 상태로 상대를 맞이했다.

“안녕, 천.”

“안녕, 열.”

오랜만에 만난 사이치고는 상당히 건조한 인사였다.

“너 어디 갔다 인제와? 또 술 마시고 있었냐?”

“에이, 너는 내가 맨날 술만 마시는 사람인 줄 아냐?”

“그럼 뭐 하다 왔는데.”

“술 마시다 왔어.”

“여전하네.”

아리스가 혀를 쯧 찼다. 하지만 열은 술 마셨다는 사람치고는 상당히 멀끔한 얼굴이었다. 그는 말간 표정으로 아리스의 등 너머에 있는 미레아에게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류열이라고 해요.”

“아, 저는 미…….”

“미레아 제인스터 씨지요? 여기 사람들은 다 제인스터 씨를 알고 있어요. 그렇게 일일이 자기 소개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아하하, 그랬군요.”

“그러니까 제가 듣기로는 천이의 이거…….”

열이 해사하게 웃으면서 아리스의 눈앞에 대고 새끼손가락만 핀 손을 흔들자 아리스가 그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어디서 감히 저급한 손가락질을 놀려?”

“우와, 무서워. 자기 여자라 이거지?”

서슬 퍼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열이 입을 놀리자 아리스는 쥐고 있던 손가락을 인정사정 볼 것도 없이 뒤쪽으로 꺾었다.

“아야, 아야야야!”

열이 호들갑을 떨면서 펄쩍펄쩍 뛰었지만 아리스는 콧방귀도 안 뀌었다. 아리스는 열의 손가락을 풀어주고 그를 대충 소개했다.

“내 사촌 중 한 명이야. 진 누나의 동생이지. 나이는 우리와 동갑. 그래서 어쩐 일이야?”

“야, 내가 오랜만에 사촌 보러 오는 데 굳이 이유가 필요해? 나 추워. 들여보내 주라.”

아리스는 작게 한숨을 쉬며 방문에서 비켜 주었다. 정말 추웠는지 열은 덜덜 떨면서 아랫목을 차지하고 앉았고 아리스가 그의 옆에 나란히 앉으며 말했다.

“다른 사촌들도 소개해 주고 싶은데 작은 외숙댁 형은 결혼해서 분가했고 여동생들은 학업 때문에 수도로 내려가 있어서 세진에는 진 누나랑 열이밖에 없어.”

“그건 다음에 또 놀러 왔을 때 소개받으면 되지. 다음번에는 명절날 맞춰서 오세요. 그러면 식구들이 다 모여 있을 테니까.”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여기가 그렇게 편하게 왔다 갔다 할 만한 거리도 아니고.”

“그래도 자주 얼굴 보면 좋잖아. 나는 너 보고 싶었는데 너는 아닌가 봐?”

그리 대꾸한 열은 품속에서 술병을 꺼내더니 미레아에게 내밀었다.

“좋은 술이 들어왔는데 마시겠어요?”

하지만 아리스가 그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았다.

“식사도 하기 전인데 무슨 술이야.”

“식전주 몰라? 그럼 식사하고 온천 갈래요?”

그러고 보니 아리스도 온천이 있다는 소리를 했었다. 미레아가 반색하자 열이 웃었다. 열만큼 노는 것에 대해 빠삭한 사람은 드물었기 때문에 능구렁이 같다 해도 아리스는 이런 면에서는 열이 반가웠다. 열이 아까부터 능글맞게 대꾸하고 있어도 아리스는 그 나름의 환영 인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아리스의 원래 목표였던 백수 한량의 본보기가 바로 이 류열이었다. 집안 잘 만나서 설렁설렁 살고 술이나 마시며 계곡가에서 시나 읊는 삶은 류열이 가장 정석적으로 살고 있었다.

“온천은 여기서 먼가요?”

“아니요, 저 뒷산에 바로 있어요. 그런데 우리 어차피 동갑인데 말 놓는 게 어때요? 이참에 친해지고.”

진이 그러했듯 열도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을 선호했던지라 그렇게 제안했는데 미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가 있어요. 제가 마이련어를 존댓말만 배워서 하대는 할 줄 몰라요.”

미레아가 쑥스럽게 웃으며 대답하자 열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열은 제게 편하게 말 놓으세요.”

“그래, 고마워.”

열은 아리스에게 얄미운 어투로 깐죽거렸다.

“너 할아버지한테 얻어맞았다며?”

“하…….”

아리스는 얻어맞은 자리를 싸매면서 한숨 쉬었다. 그는 그것이 자기가 얻어맞을 정도로 잘못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오히려 광준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걸 입 밖으로 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냥 자기 혼자 얻어맞고 끝난 걸로 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나 잘 이해가 안 간 부분이 있는데…… 식충이가 뭔가요?”

미레아의 질문에 아리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식충이라니? 누가 미레아 앞에서 그런 말을 했어?”

“할아버지가 나한테…….”

아리스의 말에 열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 식충이었어? 아니,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그런 소리를 들었담?”

“아니야! 누가 식충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식충이가 뭐냐고요. 좋은 뜻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아, 그게 뭐냐면…….”

“하지 마.”

“일 안 하고 집에 빌붙어 놀고먹으면서 밥만 축내는…….”

아리스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로 열은 말을 다 맺기도 전에 그에게 얻어맞아야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들은 것으로 앞뒤 맥락을 파악한 미레아는 심란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어쩌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할아버지께 뭐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할아버지가 멋대로 생각하신 거야. 무시해. 그보다 네가 나한테 존대를 하니까 되게 어색하다.”

“말 돌리지 말고요. 그런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무시해요? 내가 가서 오해를 풀어 드리고 올게요.”

그러면서 벗어 둔 신발을 신기 위해 마루로 나가려는 미레아를 아리스와 열이 붙잡았다.

“아니, 잠깐! 그럴 필요 없어!”

“그래, 그럴 필요 없어.”

아리스는 괜히 신경 쓰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만류했고, 열은 그냥 이 상황이 재미있어서 만류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호탕한 면이 있으니까 시간 지나면 풀리실 거야.”

“맞아, 맞아.”

“하지만…….”

미레아가 머뭇거렸으나 열과 아리스는 다시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들이 아웅다웅하고 있는 사이 다행히도 율비네가 나타났다. 그녀는 아리스와 미레아가 갈아입을 만한 옷을 챙겨 주러 온 것이었다. 그 덕에 미레아의 관심사가 율비네에게로 돌아갔다.

“다들 뭐 하고 계셨습니까?”

“아, 율비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제대로 못 했네요. 그동안 뭐 하면서 살았어요?”

미레아의 반가운 인사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덕에 아주 편하게 잘 지냈지요. 그 누구 씨께서 저를 버리고 간 덕에 그분의 생사 확인부터 제가 남아서 해야 했거든요!”

율비네는 지금까지의 분을 담아 아리스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행적 지우는 건 또 귀신같이 하신 덕에 기껏 자유의 몸이 된 것도 보람 없게 그분을 밤새우면서 찾아야 했습니다.”

“어차피 내 목적지는 뻔했잖아.”

아리스가 얄밉게 대꾸하자 율비네가 미레아에게 허락을 구했다.

“때려도 됩니까? 이제 저랑 신분이 같은데.”

“굳이 내 허락을 구할 필요가 있을까요?”

“왜 다들 나를 싫어해?!”

아리스가 억울하단 듯 항변하자 율비네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평생 미움받고 자라신 분이 새삼.”

“그동안 율비네가 얼마나 이를 갈았는데. 한 번쯤은 맞아 줘라.”

열도 한마디 거들자 아리스가 둘을 피해 한걸음 물러났다. 미레아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평생 미움을 받았다.’

이제는 그런 말을 농담으로 해도 아리스는 상처받지 않았다. 옛말이 되어 버린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 그에게 미움보다는 더한 위안을 주는 날들만 남았기 때문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이 가족들에게 나름대로 사랑받고 있었고 무엇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해 줄 미레아가 있었다. 아무리 세상을 구했니, 어쨌니 해도 아리스의 부채감이 전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잊지 않았다.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다. 그를 미워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 덕분에 말이다.

“아야! 진짜 때렸어!”

아리스가 율비네에게 등짝을 얻어맞고 충격받은 얼굴로 소리 질렀다. 율비네는 그를 때린 자신의 손과 아리스를 번갈아 가며 보더니 이내 개운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되게 기분 좋은데요? 한 번 더 해도 되나요?”

아리스는 외가에 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벌써 세 사람에게 얻어맞았다. 쒸익거리고 있는 아리스와 깔깔거리고 있던 열을 억지로 내보낸 율비네가 꾸러미를 미레아에게 건네주었다.

“잘 맞는지 한번 입어 보세요. 오늘 아침부터 은현 님이 장에 가서 직접 고르신 겁니다.”

보따리를 풀자 마이련 전통 양식의 치마와 저고리가 나왔다.

“오오.”

미레아가 저도 모르게 방긋 웃으며 감탄했다. 짙은 남색 치마와 흰 천에 자잘하게 눈송이 모양을 수놓은 저고리는 그냥 봐도 제법 질이 좋았다. 냉큼 입어 보려 했지만 어떤 식으로 입는 건지 몰라 버벅거리고 있는 미레아를 율비네가 도와주었다.

“이런 거 받아도 되나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은현 님의 성의를 무시하지 말아 주세요.”

“아니요, 무시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제가 무언가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손님으로 오셨잖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정 무언가를 해 드리고 싶으면 계시는 동안 알차게 보내다 가시든가요.”

그 말에 미레아가 쑥스럽게 웃었다. 옷을 다 갈아입은 미레아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다 문을 열고 나갔다.

“어때요?”

아리스는 이번에는 옷의 질감이 좋다는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미레아를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예쁘네. 역시 어머니의 안목.”

그것을 옆에서 들은 열이 아리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너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어떡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