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35화 (235/257)

외전 14화.

“예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내가 천이 외조부 되는 사람이오.”

광준을 오래 봐 온 식구들은 그가 저렇게 인자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리스가 미레아에게 속삭였다.

“내 다른 이름은 알지? 우리 외할아버지는 나를 천이라고 부르셔.”

그의 외조부가 마련해 준 마이련의 신분은 일전에 견우가 말했듯 ‘류현천’이란 이름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류광준이 직접 지어 준 이름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아리스라는 이름보다는 현천의 끝 글자만 따와서 천이라고 부르는 것에 더 익숙하였다.

아리스는 황실을 폐지하고 자신의 호적을 외가에 편입할 때 아리스와 현천 중 어느 쪽 이름을 사용할지 고민이 많았으나 자신의 정체성으로 따지고 보면 루아드 쪽이 더 맞는 것 같아 지금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했었다. 그래도 광준은 꿋꿋하게 그를 천이라 불렀고 그 영향인지 다른 식구들도 그를 현천이라 부르기도 했다.

광준은 미레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총명해 보이는 맑은 눈을 가진 아가씨는 표정에 꾸밈이 없었으나 천성이 바른 것이 묻어 나왔다. 예쁘장한 얼굴이 다소 경직된 것을 보아하니 광준은 미레아가 긴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추운지 미레아의 코끝과 귀 끝이 빨갛게 얼기 일보 직전이라 광준은 서둘러 그들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다들 인사는 그만하고 일단 어서 들어오거라. 날이 춥다.”

광준이 어서 들어오라며 손짓을 하며 앞섰다. 그 뒤를 식솔들이 따랐고 광준은 끝에서 따라오는 미레아를 연신 돌아보며 그녀가 잘 오고 있는 것인지 세세하게 살폈다.

안방에 따라 들어온 미레아는 툇마루를 오르기 전에 신발을 벗는 것도 까먹지 않았다. 광준을 가운데 두고 다른 식구들이 양옆에 앉았다. 미레아는 방바닥이 뜨거운 것이 신기해서 발을 꼼지락거렸다.

“이쪽은 내 자식 놈들과 며느리들, 이쪽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 큰손녀 딸인 류진과 그 밑의 손자 녀석이…….”

그렇게 식구들을 소개하던 광준은 머리가 하나 비는 것을 보고 견우에게 물었다.

“열이는 어디 갔냐?”

“모릅니다.”

“몰라요.”

견우와 진의 대답에 광준이 혀를 쯧 찼다.

“그놈은 맨날 없냐. 기어들어 오면 밥 굶기거라.”

“네.”

광준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이쯤 인사하면 되었지. 집안 어른들만 남고 나머지는 물러가거라.”

광준은 미레아가 이 자리를 다소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배려하여 다른 사람들을 물렸다. 다만 아랫사람 중에서 미레아와 친분이 있는 진과 율비네는 남았다. 한결 편안해진 미레아에게 광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내가 듣기로는 우리 천이와 만나는 사이라 들었소.”

“네, 네.”

미레아가 부끄러움에 말을 더듬으며 얼굴을 붉혔다.

“천이 저놈이 부족한 것투성이나 부디 잘 부탁드리네.”

“아뇨, 아뇨. 저야말로 부족한 것이 많고 잘 부탁드립니다. 아리스는 좋은 사람인 걸요.”

광준은 점점 미레아가 마음에 들었다. 예의도 바르고 싹싹했다. 그는 기분이 좋아져서 미레아에게 이것저것 퍼 주고 싶어졌다.

“만약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게. 약혼식이든, 결혼식이든 자네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방식대로 진행해 주겠네.”

율비네를 포함하여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그건 너무 멀리 가시는 거라니까…….

신우가 팔꿈치로 광준의 옆구리를 푹 찍자 광준은 커흠, 하며 멋쩍은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아리스는 미레아의 눈치를 보더니 광준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 귀에 대고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할아버지, 저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는데요.”

“뭐?”

광준이 다소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그의 외손자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제가 결혼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무슨 약혼식이에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너 저 아가씨와 한집에 산다고 그러지 않았느냐?”

“지금은 그렇죠.”

그건 마이련에서 평생을 산 광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결혼할 생각이 없다니? 네가 데리고 사는 아가씨의 혼삿길을 막는 소리를 하는구나?”

“하이고, 그깟 혼삿길 좀 막히면 어때요. 그럼 저야 좋지. 그리고 정확하게 따지고 보면 제가 데리고 사는 게 아니고 미레아가 저를 데리고 살아 주는 겁니다. 거긴 미레아 집이라고요.”

그 말에 류광준은 아리스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이거 완전 식충이 아니냐?!”

수박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경악한 눈으로 류광준과 아리스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류신우였다.

“아버지! 애를 그렇게 때리면 어떡하시나요!”

“아리스, 얘! 괜찮니?!”

“전…… 아니, 아리스! 괜찮습니까?!”

율비네와 진이 반쯤 혼이 나가 땅에 엎어진 아리스를 부축해 주었다. 광준은 대로하여 자신의 딸아이를 불렀다.

“외손자라고 있는 놈이 식충이 노릇이나 하고! 류은현아, 너, 네 아들 교육을 대체 어떻게 한 게냐?!”

자식 교육 똑바로 하라는 힐난에 은현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버지, 아리스는 인생의 대부분을 루아드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쪽 문화와 이쪽 문화는 다를 수밖에 없…….”

“사람의 도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딴 것을 문화 차이라고 말하지 말아라!”

도무지 노인의 기력이라고는 볼 수 없는 분위기인 류광준은 길길이 날뛰었다.

“이놈 괜히 호적에 편입시켜 주었다! 다시 파내 버릴까 보다! 에이잉, 정신 빠진 놈!”

“아니, 할아버지! 제가 왜 식충이인데요?! 저 돈도 벌어 오고 할 거 다 하고 산단 말입니다!”

“시끄럽다, 이놈아!”

결국, 한바탕 난리가 난 상황을 견우가 수습하기 위해 나섰다.

“아버지, 제발 그만하세요. 미레아 양이 지금 겁에 질렸잖습니까.”

그 말대로 미레아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애처로울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녀는 진에게 기대고 있는 아리스와 아수라장 한복판에 있는 류광준을 보고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류광준이 크게 기침을 한번 하고는 입을 쩝 다셨다.

“거기, 아가.”

“예? 저요?”

광준의 부름에 미레아가 화들짝 놀랐지만 그는 좀 더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그래, 자네.”

“네에에…….”

미레아는 처음에는 주춤거리다가 자세를 낮춘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광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놈이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다면 내가 책임지고 좋은 신랑감을 구해다 주겠네.”

“네?”

“내 손주 놈이 저지른 짓은 내가 끝까지 책임져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게.”

“네?”

“이게 다 내가 부덕하여…… 에휴.”

미레아는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일단 ‘식충이’가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광준이 화를 내는 것을 보니 뭔가 좋지 않은 뜻 같은데 대체 무엇이길래 아리스가 저런 말을 들어야 하나 싶었다.

혹시 자신의 마이련어가 서툴러서 광준이 하는 말의 의미를 곡해하고 있나 걱정도 들었다. 무슨 책임을 진다는 거지.

광준은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리스를 가리키며 주변인들에게 고했다.

“저놈도 밥 굶기거라!”

“네…….”

대답은 그렇게 했어도 식구들은 아리스를 정말 굶길 생각까지는 없었다. 밥이야 작은 상에 몰래 내주면 그만이었다. 광준은 길길이 날뛰던 태도를 싹 바꿔서 미레아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피곤하겠군. 손님용 방을 준비해 놓았으니 푹 쉬시게. 식사 시간이 되면 시종이 부르러 갈 걸세.”

“네, 감사합니다.”

미레아는 머리를 싸매고 있는 아리스를 곁눈질하면서 일단 광준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그리고 진의 안내를 받으며 아리스와 함께 나왔다. 진은 방을 나오자마자 아리스의 뒤통수를 퍽 때렸다.

“아, 왜 맞은 데를 또 때려?!”

아리스의 반항에 진이 한 대 더 내리쳤다.

“할아버지 성깔 알면서 굳이 거기서 그런 식으로 초를 쳐야겠어?!”

“하지만 그걸 그런 식으로 하면…….”

미레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왜? 아리스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아리스도 그렇고 진도 그렇고 아리스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미레아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별건 아니고…… 할아버지의 말이 아리스의 결혼관과 잘 맞지 않아서 그랬어.”

“결혼이라니…….”

미레아가 애매하게 웃으면서 머리카락을 빙빙 꼬았다.

“괜히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그렇잖아. 신경 쓰지 마, 미레아.”

“그래, 그래.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사실 미레아 역시 결혼에 대한 것은 깊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광준의 말이 조금 부담스럽게 다가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소 쑥스러운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자 아리스 역시 괜히 부끄러워졌다.

아리스와 미레아에게는 각방을 마련해 주었다. 아리스는 자신의 짐을 풀자마자 미레아의 방으로 놀러 갔다. 홀로 어색하게 있던 미레아가 그를 반겨 주었다. 아리스가 밖의 날씨를 살피며 말했다.

“추워서 산책이라도 나가자니 애매하네.”

그러더니 방바닥에 벌렁 눕고는 미레아에게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누워 봐.”

미레아는 아리스가 가리킨 자리에 눕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이 자리 정말 따듯하다. 따듯하다 못해 끓는걸?”

미레아의 감상에 아리스가 웃었다.

“온돌 최고야. 한겨울에 이러고 있으면 좋다니까.”

그렇게 누워 있자니 몸이 녹진하게 녹아 나른해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직 시간이 일러 식사를 하라고 부르러 온 것은 아닌 듯싶었다. 둘이 몸을 일으키자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이야, 나 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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