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아리스는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격한 고민을 했다. 전보다 일찍 들어갈지, 아니면 아예 밤늦게 들어갈지 말이다. 다만 미레아가 혼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제도 자신이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 울고 있지 않았던가.
결국,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일찍 집에 들어가는 쪽을 택한 아리스는 혹시 몰라 대문을 살금살금 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미레아가 정원에 떡하니 서서 그를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아리스의 걱정과는 달리 미레아는 생각보다 밝은 얼굴이었기 때문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눈을 예쁘게 반달 모양으로 접어 웃었다.
“왔어?”
고개를 끄덕인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미레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미레아는 디자인이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거창하지는 않지만 섬세한 레이스 장식이 공들여 재단된 블라우스에 연한 겨자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것이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는 미레아의 분위기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반은 묶고 반은 자연스럽게 풀어놓은 긴 머리는 삐져나온 잔머리마저 사랑스러웠다. 어쩐 일인지 평소에 잘 신지도 않던 플랫슈즈도 꺼내 신고 있었다. 마치 사교 모임이라도 나갈 것 같은 차림이었다. 그게 아니라 해도 나들이라도 가지 않으면 차려입은 보람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레아를 응시했다.
왜 저렇게 예쁘게 입었지?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일단 미레아를 평소대로 대해 보기로 했다. 아리스가 일부러 크게 반응하지 않고 게걸음으로 현관 쪽을 향하고 있는데 미레아가 옆으로 따라붙었다.
“오늘은 일찍 왔네?”
“응, 그냥…… 일이 좀 일찍 끝났어.”
“음…….”
미레아는 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했지만 일단 그 질문은 보류하기로 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런데 너는…….”
“응?”
아리스는 손가락으로 미레아의 위아래를 차례대로 까닥거리며 말했다.
“어디 가? 아니면 이미 다녀온 건가?”
미레아가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것치고는 차려입었길래.”
“네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아리스가 걸음을 우뚝 멈추고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그 반응이 제법 마음에 들어 미레아는 최대한 예쁘게 웃어보았다.
“성공했는지 모르겠네.”
“이쪽은 갑자기 영문을 모르겠네.”
아리스가 말을 돌리니 미레아가 새초롬하게 말했다.
“그냥 예쁘다 해 주면 안 돼?”
“예뻐.”
“이건 뭐 엎드려서 절 받기…….”
미레아가 일부러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지만 아리스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진심이야.”
그 말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미레아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허리 뒤에서 손깍지를 끼고 아리스의 눈앞을 왔다 갔다 했다. 아리스가 저도 모르게 눈으로 그녀의 행동을 좇고 있는데 미레아가 불쑥 상체를 내밀었다.
“이러고 있어서 깜짝 놀랐지?”
“응.”
“정말로 나 예쁘지?”
“응.”
방금 대답한 내용이기에 아리스는 별다른 생각 없이 긍정했다.
“예쁘니까 만지고 싶지?”
“응…… 뭐?!”
이번에도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을 하려다 뒤늦게 되물었다. 하지만 미레아는 멈추지 않았다.
“만지고 싶고, 손도 잡고 싶고, 끌어안고 싶기도 하지?”
연달아 이어지는 물음에 아리스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 정답이기는 한데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제 그런 일도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미레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뽀뽀하고 싶고, 키스도 하고 싶고, 어쩌면 그보다 더한 것도…….”
이쯤 되니 아리스는 미레아의 입을 틀어막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커다란 손에 입이 막힌 미레아가 내쉬는 숨결이 아리스의 손바닥을 간지럽혀서 머릿속까지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잠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레아가 아리스의 손을 떼어 내며 짓궂게 되물었다.
“아니야?”
“그게…….”
“정말?”
“그러니까…….”
“욕망에 솔직해져 봐, 루데키아스 레민나 류 파니드라우. 아니, 이젠 아리스 류인가?”
미레아가 히죽거리며 점점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리스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어도 미레아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일단 침묵했다.
“나는 다 하고 싶은데.”
“……야.”
아리스는 이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이 관계가, 이 상태가 변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지금 미레아가 그것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미레아를 막아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키스해 줘.”
그 당돌한 요구에 아리스는 오히려 한 발 물러났다. 그러자 미레아는 두 걸음 다가왔다. 그녀는 감정을 싣지 않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겁쟁이.”
“맞아. 나 겁쟁이야.”
아리스는 선선히 인정했고 미레아는 불만스럽게 콧등을 찡그렸다. 두 사람은 그 이상 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은 상태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뭐가 두려운데?”
“너를 잃을까 봐.”
“어째서?”
“네가 다쳐.”
“그렇지 않아.”
“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최악의 데르카이드 흑익이야.”
“지금은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중요해?”
“적어도 내겐 중요해.”
“왜?”
“그 사람들 때문에 네가 상처 입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난 상처 입지 않아.”
“네가 나를 떠날까 봐 무서워.”
“나 어디 안 가. 오히려 나는 네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까 봐 불안해.”
“너야말로 왜 그렇게 생각해?”
“나는 네게 다가가려고 하는데 너는 항상 제자리잖아?”
아리스는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나는…… 여기서 움직일 수 없어.”
그 단호한 말에 미레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이유는 너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 그래서 어제도 그런 식으로 내 마음을 드러내면 안 되었어. 그건 명백한 내 실수야.”
아리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게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자신과 미레아를 위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 이상의 것을 주고받을 수는 없다 해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정도의 거리감.
둘 중 어느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없이 완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미레아는 이렇게 묻고 있었다.
정말 이게 최선이니?
“우리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이 아닌 타인들에 의한 것 때문에 우리 사이가 돌이킬 수 없게 되는 미래가 올까 두려워. 너를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 이상 다가가지 않고 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어. 여기서 더 욕심 부리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나는 여기서 움직일 수 없어.”
미레아의 눈가가 떨리는 것을 본 아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레아의 입이 달싹거렸다. 그를 쥐고 흔들어서라도 자신을 선택하라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그의 옆에 있는 동안 겪을 일들에 대한 각오 정도는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리스 저 비겁한 겁쟁이는 여전히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생각만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얄미웠다.
“그래서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쪽이 마음에 든다는 거야?”
“아니.”
아리스라 해도 지금 같은 상황이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 제일 나은 선택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미적지근한 태도에 미레아가 답답함에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는데 아리스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하지만 네가 먼저 다가온다면 그건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지.”
미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리스는 나름 비장한 표정으로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내가 먼저 다가갈 순 없지만 네가 이쪽으로 다가오기만 한다면 그만큼 도망가지 않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아리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네가 오고 싶은 속도로 와. 너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그 말에 미레아는 더는 기다리지 않고 아리스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두 사람의 몸은 아슬아슬한 간격을 두고 서로를 마주했다.
“어…… 그렇다고 이렇게 바로 전진하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그래서 싫어?”
“말했잖아. 너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아리스가 안도의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미레아 역시 한층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속삭였다.
“네가 이 집에서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언제까지 이 집에 있을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스의 이마가 미레아의 이마 위에 콕 내려앉았다.
“내가 있고 싶은 만큼이 아니고…… 네가 있으라고 하는 만큼 있을게. 그동안은 멋대로 떠나지 않을게. 그리고 어느 날 네가 질려 버려서 이 집을 나가라고 한다면 그때는 정말 미련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줄게.”
말은 그렇게 했어도 미련이 남지 않을 리는 없었다. 가슴 속에 인처럼 새겨진 그녀의 존재는 평생을 가도 아리스를 쫓아올 것이었다. 미레아 제인스터가 자신의 인생 앞에 나타나기 전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날은 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내가 없을 것이란 가정 따위는 하지 마. 나는 네가 허락하는 한 언제든지 이 집으로 돌아올게. 아니, 돌아올 수 있게 해 줘.”
미레아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내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너 하나밖에 없어.”
“그건 기분 좋은걸.”
둘은 맞닿은 이마에 서로의 체중을 실어 기대었다. 한동안 그렇게 체온을 나누고 있던 아리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키스해도 돼?”
“안 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즉답이 날아왔다.
“왜?”
“아까 내가 해 달라고 할 때 안 해 줬잖아. 벌이야.”
그 말에 아리스는 뚱한 표정을 짓는 척하다가 고개를 틀어 미레아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대었다. 미레아가 얼른 몸을 뒤로 빼며 항변했다.
“야, 이 거짓말쟁이야! 방금 내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
아리스가 다시 입술을 겹쳐 오는 통에 미레아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어제처럼 다급하고 이리저리 휘두르던 키스가 아닌 느릿하고 다정한.
미레아의 치열을 하나하나 훑고 입 안쪽의 여린 살을 혀로 살살 쓰다듬다가 뻣뻣하게 굳은 미레아의 혀를 달래듯 문질렀다. 미레아는 삐걱거리다 아리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진득한 그 시선에 얼이 빠졌다가 보채듯 얽혀 오는 혀에 느리게 반응했다.
혀가 스칠 때마다 전신이 오싹했다. 아리스가 미레아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자기 쪽으로 끌어안았다. 어느 순간 미레아가 쿡 하고 웃었다. 그 웃음은 아리스에게도 전염이 되어 둘은 서로 키득거리면서 키스를 이어 갔다.
아리스가 미레아의 허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동작이었다. 예고 없는 움직임에 미레아는 반사적으로 상대방의 몸에 다리를 휘감아 균형을 잡았다. 그럴 필요도 없이 그는 한쪽 팔로도 상당히 안정적인 자세로 미레아를 안고 있었다.
아리스가 집 안쪽을 보며 눈짓했다. 미레아는 아무것도 모르겠단 얼굴로 시선을 돌렸고 그것을 제멋대로 해석한 아리스는 미레아를 안은 상태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전부 다 하고 싶다는 미레아의 의사에 따라 함께 이것저것 해 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