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화.
“일단 울지 말아 봐. 네가 울면 정말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큰일 났네. 어떡해야 울음을 그치지?”
상대방이 말없이 울기만 하니 아리스는 잔뜩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잠시 고민을 하던 아리스는 오갈 곳 없던 손으로 미레아의 눈물을 닦아 주고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음…… 울음을 그치는 게 쉽지 않으면 진정될 때까지 있어 줄게. 울고 싶은 만큼 울어.”
미레아는 대답 대신 딸꾹질을 하며 아리스의 가슴팍에 대고 얼굴을 비비면서 남아 있는 눈물을 닦았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아리스의 손가락 끝에 두피가 스칠 때마다 기분이 점점 풀렸고 눈물도 점점 잦아들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미레아의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보고도 아리스는 한동안 그녀를 떨어트려 놓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이제 괜찮아?”
여전히 아리스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미레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리스는 그녀가 언제쯤 떨어질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미레아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는데 미레아가 웅얼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응.”
아리스가 듣고 있다 그래도 미레아는 다소 고민을 하고 있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 어제 술 때문에 한 거 아니야. 애초에 거의 취하지도 않았었고. 말한 대로 후회 같은 것도 하지 않았고.”
아리스가 멈칫했다가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미레아는 한번 입을 여니 이어 말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네가 무얼 눈치 보고 있는 건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그래. 나는 네가…… 네가 그런 식으로 다가와 줘서 좋았고…….”
미레아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말을 주섬주섬하는 것을 보던 아리스는 아까 전부터 깊게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같은 상태도 좋지만, 너와 내가…….”
그저 너와 내가 함께하고 싶은 것이 일치했으면 좋겠다. 그런 식으로 말을 하려 그랬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쉽사리 설명되지 않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리고 눈꼬리를 내리며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던 탓일까. 아직까지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고 있던 탓일까. 미레아의 표정에 아리스는 다시 질척질척한 무언가가 몸과 머리를 지배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심장 박동이 점점 거세어지더니 이내 갈비뼈를 때리는 것처럼 쿵쿵 몸이 울렸다.
미레아가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은 그렇다 해도 겉으로 내보내는 것은 별개였다.
별개라는 것은 알지만…… 네가 그렇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리스는 뒷일 따위는 어찌 되었든 전부 상관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미레아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다소 다급한 동작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살짝 올리고는 입을 맞춰 왔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미레아는 일순간 숨 쉬는 것도 잊었다. 아리스가 약간의 체중을 실으면서 그녀를 압박해 왔다.
“읍……!”
몸을 물리고 싶어도 허리를 꽉 잡힌 덕분에 꼼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습한 소리가 귀를 파고들어 올 때쯤에야 미레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간신히 숨을 들이마시려고 했는데 맞닿은 각도가 바뀌면서 이번에는 혀가 제멋대로 밀고 들어왔다. 입 안으로 들어온 불청객은 제집인 양 미레아의 입안을 헤집고 다녔다.
아리스는 미레아가 도망가면 도망갈수록 집요하게 쫓아왔다. 얽히고설키고. 숨을 쉴 수 없으니 절로 호흡이 가빠져 오고. 그럴수록 더더욱 아리스에게 매달리는 꼴이 되었다.
정말로 숨이 막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미레아는 아리스의 어깨를 때렸다. 처음에는 힘없이 때리다 점점 힘을 싣자 아리스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미레아는, 이 상황의 뒷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 맞은 건가?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림과 동시에 아리스의 입술이 떨어졌다. 미레아가 가쁜 숨을 내쉬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는데 그는 나지막하게 욕설을 뇌까렸다.
“젠장…….”
아리스는 미레아의 어깨를 지나치게 힘주어 잡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황급히 손의 힘을 뺐다. 미레아가 누구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흠뻑 젖은 입술을 소매로 닦는 사이 아리스는 그녀에게 한발 뒤로 물러나 있었다.
“나름 잘 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너…… 지금…….”
미레아가 간신히 정신을 되돌리며 내뱉은 말은 상당히 단순했다. 하지만 아리스 역시 새하얘진 머리로 할 수 있는 말을 쥐어짜 내야 했다.
“내가 지금 한 건…… 그러니까 네가 어제 한 건 실수가 아니란 건 알겠어. 실수라면 이게 실수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상황을 수습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레아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귀에 이명이라도 울리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네게 이러고 싶지 않았어.”
“그게 무슨 의미야?”
미레아가 재차 묻자 아리스는 어쩐지 자신이 상처받은 얼굴로 말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간신히 생각을 정리한 아리스가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나는 네게…… 이러면 안 돼.”
“왜?”
미레아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아리스는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이건 없던 일로 하자. 미안해.”
“잠깐만…….”
어제 있었던 일은 괜찮고 이번 것은 안 된다니. 미레아는 그 기준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상당히 난처한 기색이었다.
“이만 자.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데 심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아리스는 그 말만 남기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아리스!”
미레아가 뒤늦게 불렀어도 방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미레아는 지금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라일라에게 질문을 받은 이후 아리스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미레아 혼자 할 수 있는 내용의 것이 아니었다.
가까워진 것 같다가도 멀어지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인데도 서로 눈치만 보고 있고. 그래서 우리 둘은 이 집에서 대체 무엇을 하는 건지.
미레아는 아까보다 기분이 더 저조해졌다.
* * *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 날은 미레아의 휴일이었다. 늦은 아침에 눈을 뜬 상태로 천장을 보고 누워 있는데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난다 싶더니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뒤이어 났다.
미레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밖을 내다보니 아리스가 정원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미레아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방에는 아리스가 간단하게 빵과 커피를 내려 마신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아리스가 흔적을 지우기 위해 한번 환기를 시킨 것 같은데도 공기 중에서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났다. 미레아는 눈가를 찡그렸다.
끊는다며…….
시계를 보니 아침이라고 하기엔 늦고 점심이라고 하기엔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미레아 역시 커피만 끓였다. 점심은 먹고 올지 아니면 그사이 돌아올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아리스의 행동 패턴을 봤을 때 저녁 전까지는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미레아는 아리스가 어제 했던 말의 의미를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어제 있었던 일을 또 모른 척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건 싫었다. 하지만 아리스가 이 집에 있는 동안 현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관계가 변한 것을 계기로 아리스가 그녀를 떠나는 것은 더 싫었다. 아리스가 자신에게 여전히 마음이 있다는 것쯤은 라일라의 확언이 없다 해도 요 며칠 사이의 일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벽을 치는 모습이라면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아리스의 걱정거리들을 다 극복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반문했다. 괜찮지 않을까 싶다가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게 아닌지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마냥 꿈속에서만 살기에는 현실의 벽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미레아는 선뜻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미레아는 생각을 바꿔서 상황을 단순하게 보기로 했다. 그녀는 아리스와 함께 있는 것을 원했다. 그리고 정황상 아리스 역시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서로 합의하고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 정도의 관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길게 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문제는 그러한 상황에 자신이 만족할 수 있냐는 것인데…….
미레아는 잠시 생각을 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현 상황을 유지하고 길게 가기’ 대 ‘더 가까운 관계이지만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태’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전자 아닌가.
아리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른 척하려고 들 것이 당연했다.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석연치 않음이 남아 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겁이 많던 사람이던가?
미레아 제인스터는 겁대가리가 없다는 말을 밥 먹듯이 들으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무리를 넘어 무모하기까지 했고 대책 없이 긍정적일 때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살다 꺾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었다. 오지 않을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좋았으나 현재에서 겁을 먹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미레아는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 대체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여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아리스의 불안감이 옮은 것 같았다. 이건 정말로 자신답지 않았다. 한때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몸이었다. 그 이상으로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다는 소리일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시야가 트인 것같이 머릿속이 맑아졌다. 미레아는 현 상황으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었다. 언제나 불안하고, 애가 타고, 감질난 심정으로 상대를 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어느 쪽을 택해도 결국 후회하게 된다면 오지 않은 미래보다 당장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더 중시한 선택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다. 그리고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지. 아리스가 도망간다면 도망가는 대로 죽어라 따라다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 말이다.
나는 미레아 제인스터. 별명은 사냥개. 사냥개가 왜 사냥개인지 보여 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