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아리스를 정면으로 마주하기 쑥스러웠지만, 막상 저러니 미레아만 혼자 김이 팍 새 버렸다. 오늘 아침만 해도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미레아는 이게 맞는 건지 아직 답을 못 내리고 있었다.
“뭐, 걔도 하루 만에 뭔가 생각이 정리될 리는 없지. 어제 말했잖아? 지금 눈치 보고 있는 거라고. 아리스도 나름대로 하고 있던 생각이 있을 텐데 이런 상황을 상정하지 못했다면 그런 반응을 보일 수도 있어. 그건 네가 이해해.”
“내가 괜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미레아는 금방 어두운 얼굴이 되어서는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라일라는 콧방귀를 흥 뀌고는 대답했다.
“적어도 싫어한 건 아니었을걸.”
하지만 미레아는 그 말에 쉽게 안도할 수 없었다. 역시 어제는 아리스를 미처 배려하지 못하고 여러모로 실수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리스가 다음날 후회한다고 하지 말랬으니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는 아리스가 정말 화낼 것 같았다.
“페니드란, 너도 뭐라고 한마디 좀 해 봐. 우리보단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 나는 아무것도 몰라.
라일라의 협박 비슷한 말에도 페니드란은 묵묵히 거절했지만 미레아도 매달렸다.
“그러지 말고. 적어도 아리스가 무슨 생각인지 정도는 알려 달라고.”
—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리스에게서 미레아로 주인을 갈아타느니 마느니 한 주제에 쓸데없는 의리만 강했다. 페니드란은 이 일에 자신이 끼어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런 건 당사자 간에 해결해야 하지 누군가가 중재한다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는 쪽을 택했다. 페니드란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것을 포기한 미레아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한 번 더 해 볼까?”
이번에야말로 알코올 따위는 없는 상태로 말이다.
“무슨 일을 해도 아리스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군다면 내 쪽이 먼저 눈치 볼 필요는 없겠지?”
어쩐지 오기가 생겼다. 미레아가 하는 짓을 아리스가 어느 선까지 모른 척할지 말이다. 그러다 불안감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니야……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었다가 부담스럽다고 집 나가면 어떡해.”
미레아는 턱을 괴고 앉아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라일라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집에 사는 젊은 남녀가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데 왜 서로 보고만 있는 것이란 말인가.
아리스가 눈치를 보는 이유는 이해가 갔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정체된 관계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가 후회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법이었다.
제삼자가 끼어들어 봤자 모양새가 이상해지니 미레아의 등을 떠밀어 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라일라는 그 둘이 제대로 대화라도 했으면 싶었다. 하지만 라일라가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미레아는 당분간 이렇게 있고 싶었다. 현 상황이나 이유가 어땠든 지금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아리스가 있었다. 그게 작은 위안이 되었다.
“그럼 지금 상황이라도 즐겨.”
“즐겨?”
“뭐…… 현재 관계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은 많잖아. 대체 한 달 동안 뭐 했니? 제대로 하는 데이트가 아니라 해도 둘이 놀러 가는 것쯤은 할 수 있잖아.”
“그럴까?”
라일라의 제안에 미레아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그래, 그래. 너 내일 쉬는 날 아니야? 소풍이라도 가자고 해 봐.”
“그 정도라면…….”
조금은 기분이 풀린 것 같은 미레아의 분위기에 라일라는 미레아 몰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두 마검에게 말했다.
“너희는 조정 봐야 하니까 오늘 나랑 같이 있는 거다. 페니드란도 두고 가.”
— 야호!
라일라가 마검 둘을 함께 조정해야 하니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단 소리를 하자 세렌트가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반면, 페니드란은 신음했다.
— 살려 줘…….
* * *
“다녀왔습니다!”
기세 좋게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왔는데 아리스는 어디로 갔는지 집이 썰렁했다. 최근 들어 아리스가 집을 비우는 빈도가 늘었다.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제대로 말도 해 주지 않았으나, 미레아는 구태여 묻지 않았었다. 라일라에게 했던 말대로 별다른 사이가 아니니 하나하나 미주알고주알 고하는 것도 이상하다 싶어 반쯤은 방목하며 지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일 계획을 아리스와 함께 세울 기대에 잔뜩 투기가 오른 상태로 돌아왔거늘 상대방이 없으니 기분이 저조해졌다. 미레아는 어제 먹다 남은 것들을 꺼내 다시 데우면서 생각했다.
소꿉장난이라 해도 좋았다. 앞으로도 쭉 지금 같은 상태라 해도 좋았다. 그보다는 아리스가 떠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있고 싶은 만큼 있으라 했어도 아리스가 언제 떠나겠다는 언질조차 주지 않았으니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당장 내일 짐을 싸서 나간다 해도 미레아는 그것을 말릴 만한 구실이 없었다.
지금도 어디를 그렇게 말도 없이 나돌아 다니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 집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혼자서 식사를 마쳤는데도 아리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미레아는 바다를 보고 앉아서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안락의자의 팔걸이를 딱딱 때렸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넘어가도 이 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고작 한 달 사이 집에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 익숙해졌는지 또 마음이 공허해지려고 했다. 처음부터 혼자였던 시간 동안은 괜찮았지만 바로 오늘 아침까지 누군가가 있다가 없으니 예전에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끔찍한 고독감이 다시 밀려왔다. 식구들을 전부 잃은 직후 처음으로 이 집에 들어왔을 때의 고독감 말이다.
미레아는 벌떡 일어나 온 집 안의 불을 켰다. 평소에는 잘 쓰지도 않던 전축까지 돌려 음악을 크게 틀어 놓았다. 그리고 다시 안락의자로 돌아와 머리끝까지 담요를 둘러쓰고 웅크리고 앉았다. 음악 소리가 집 안에 왕왕 울렸어도 그것으로 빈 곳을 채우기엔 부족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빨리 와 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까. 음악 때문에 밖의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 왔어.”
익숙한 목소리에 미레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리스는 온 집 안에 켜진 불과 큰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는 전축을 보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 있어?”
담요를 벗어 버린 미레아는 약간 비틀거리며 아리스에게 달려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미레아?”
“…….”
미레아는 대답 대신 손에 힘만 더 주어 아리스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아리스의 어깨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꾹 눌렀다. 그러는 사이 눈꺼풀을 비집고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억지로 삼켜 버렸다.
“너 왜 그래?”
그 물음에 미레아는 사실대로 대답할 수 없어서 얼버무렸다.
“아니…… 별거 아닌데…….”
“잠깐 나 좀 봐 봐.”
아리스는 미레아를 억지로 떼어 내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볼을 감싸 쥐었다. 미레아가 표정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아리스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별것이 아니긴? 너 지금 얼굴 좀 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란 말이야!”
“하지만 정말 별것 아니라니까.”
“별것 아니라면 뭔지 말할 수 있잖아!”
“…….”
하지만 미레아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가 아리스에게 부담감 같은 것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다그쳐도 미레아가 조개처럼 입을 꽉 닫아 버리자 아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화내는 게 아니고…… 뭔지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 다만 지금은 좀 쉬는 게 좋겠다.”
아리스는 미레아가 뒤집어쓰고 있던 담요를 가져와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리고 소파에 데려다 앉힌 후 부엌으로 갔다. 시큰해졌던 미레아의 코가 가라앉는 사이 아리스는 얼른 물을 따듯하게 데워와 미레아에게 건네주었다. 미레아가 물을 마시는 것을 보며 전축을 꺼 버린 아리스는 건너편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괜찮아?”
미레아가 고개를 까닥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지 않았는데 네가 와서 괜찮아졌어.
그렇게 말하는 대신 미레아가 물었다.
“어디 다녀왔어?”
“그냥 볼일이 있어서.”
지금도 아리스는 뭉뚱그려 대답할 뿐 정확한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아리스가 말하지 않는다면 그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것이었다. 미레아가 무슨 일인지 말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페니드란은?”
“라일라가 조정 좀 보겠다고 두고 가라 그러기에 맡기고 왔어.”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세렌트랑 함께 있을 거야.”
“그놈 걱정은 딱히 안 해. 너야말로 기분이 좀 풀렸어?”
미레아가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저조한 기분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미레아를 보고 있자니 아리스의 마음도 썩 좋지는 않았다.
“오늘은 일찍 쉬는 게 좋겠다.”
또 기운 없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 아리스는 미레아의 손을 잡고 소파에서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2층 계단을 터덜터덜 오르는 미레아의 뒤를 따랐다. 그는 손수 미레아의 방문을 열어 주며 미레아를 방 안으로 조심스럽게 떠밀었다.
“잘 자.”
미레아가 인사를 하는데 시무룩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리스는 무슨 말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있잖아.”
미레아가 멈칫하고 올려다보자 아리스는 손을 자신 쪽으로 까닥거렸다.
“이리 와 봐.”
미레아가 그것을 보고 머뭇거리자 아리스가 먼저 다가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리고는 제품 안에 안긴 미레아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아. 나 여기 있어.”
뜻밖의 위로에 미레아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아리스가 정말로 조심스러운 손길로 달래 주며 낮게 읊조린 말에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되어 미레아는 갑자기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나왔다. 아리스는 자신의 옷깃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감각에 화들짝 놀랐다.
“헉? 너 울어? 아니, 잠깐.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아무래도 자신이 잘못 달랜 것 같은 기분이라 팔을 풀고 몸을 물리려 그랬는데 이번에는 미레아 쪽에서 그를 꽉 끌어안았다.
“으허엉…….”
잔뜩 억눌린 울음소리가 나왔다. 이 집을 떠나지 말아 달라 하고 싶었다. 자신을 혼자 두지 말아 달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놓기 두려워 눈물만 나왔다. 상대방이 당혹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았어도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