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30화 (230/257)

외전 9화.

미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스의 볼에 재빠르게 입술을 갖다 대었다. 쪽 하는 소리가 짧게 났다. 그리고는 얼른 떨어졌다. 아리스가 토끼 눈을 하고 아직 예민한 감촉이 남아 있는 볼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미레아는 조금 머쓱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뱅뱅 꼬았다.

“이건 그러니까…… 그동안 고마웠다는 의미의 상이야.”

“상이라고?”

“그, 그래.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다른 집안일도 다 도맡아서 하니까…… 아니, 사실 꼭 그렇다는 의미만은 아니고 지금까지 네게 신세 진 것이 한둘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그런 것들에 대해 제대로 표현을 하지 못한 것 같아서, 그 모든 것들이 고맙다는 의미로…….”

미레아가 누가 봐도 어설픈 핑계로밖에 보이는 말을 하고 있는데 아리스는 무언가 못마땅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너 취했냐?”

그 말에 미레아는 실수했다 싶었다.

아, 역시 술 마시고 이런 짓을 하는 건 아니지. 이건 아니지! 이런 건 적어도 이성적인 생각을 할 정신일 때 해야 진정성이란 게 보일 텐데 이건 그냥 술 취한 진상이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취하진 않았으나 아리스 눈에는 영락없이 만취한 주정뱅이로 보일 게 뻔했다!

“아, 아니! 이건 그러니까… 취해서 그런 게 아니고…… 그…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미안해.”

주섬주섬 변명하는데 점점 더 모양새가 이상해지고 있었다. 정말로 취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 기분이 고조된 덕은 술 때문이니 술의 잘못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냥 전부터 하고 싶었던 것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되레 아리스의 기분만 상하게 한 것 같아 그녀의 얼굴은 점점 울상이 되었다.

미레아는 제멋대로 굴어서 그가 화라도 났나 싶어 조심스럽게 눈을 맞춰 왔다. 아리스는 양미간을 모으고 미레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이러다 내일 후회한다거나 그러면…….”

“아니, 그런 식의 후회는 안 해. 그러니까 나는 그냥…….”

미레아는 얼른 아리스의 말을 끊고 변명을 하려 했으나 아리스는 가벼운 어투로 다짐이라도 받아 내겠다는 듯 말했다.

“그래? 그러면 정말 후회하면 안 된다?”

미레아가 대답하려는 순간, 아리스는 별안간 그런 그녀의 머리통을 양손으로 잡더니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촉감의 것이 미레아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아까보다 조금 더 크게 쪽 하는 소리가 났다.

아리스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연이어 코끝, 눈가, 이마에 쪽쪽거리더니 다시 입술로 내려와 한 번 더 짧은 키스를 하고 떨어졌다. 미레아가 잔뜩 새빨개진 얼굴로 어버버거리고 있는데 아리스는 검지로 미레아의 이마를 꾹 눌렀다.

“이 정도는 되어야 상이지.”

아리스는 미레아에게 한 번 웃어 주고는 재빠르게 그릇들을 싱크대 위에 가지런히 올려다 놓고 현관으로 향했다.

“나 술 깰 겸 밤 산책 하고 온다. 나머지는 다녀와서 치울게.”

아리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미레아는 대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여전히 굳어 있는 미레아와는 달리 아리스는 태연하게 겉옷을 챙겨 입더니 쌩하고 나가 버렸다.

딸각거리면서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미레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얼굴을 감싸 쥐고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니까 이게 대체…….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는 말이 이런 것이었다. 취한 거는 아리스 쪽이 아닐까?

하지만 미레아는 아리스가 어지간해서는 취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리스는 지금 거의 맨 정신으로 그러한 행동을 했다는 소리다.

술 깰 겸 산책하고 온다는 말이 아리스에 한해서는 웃긴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태연해 보이는 저 태도는 뭐란 말이냐! 그 점이 미레아는 받아들이기 혼란스러웠다. 이건 너무 급진전 아닐까? 이래도 될까 싶은 물음표가 머릿속을 꽉 채웠다.

한편,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지만 거실 한쪽에 세워 두었던 페니드란은 이 모든 광경을 보고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기 혼자 바보가 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 * *

아리스는 해무가 내려앉은 해변까지 내려왔다. 짙은 해무 덕분에 사방이 구별되지는 않았어도 등대가 불을 밝힌 덕분에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해변을 따라 정처 없이 걷던 아리스는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이쯤 하면 집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거리일 것이었다. 그는 바다 쪽을 바라보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별안간 입꼬리가 찢어지게 웃으면서 외쳤다.

“이야호우!”

바다다 보니 산처럼 메아리는 없었다. 그 덕에 아리스는 눈치 보지 않고 목소리를 시원하게 내지를 수 있었다. 그는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크게 소리를 내 웃더니 이번에는 하늘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미레아 제인스터가 아직 나를 좋아하나 봐! 보비네, 듣고 있어요?! 미레아 제인스터가 아직도 나를! 좋아한다고! 기도한 거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비네는 땅에 스며 있는 신인데 하늘에 대고 소리쳐 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라슈온의 어딘가에서 아리스의 행동을 보고 있던 보비네는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눈감아 주기로 했다. 보비네가 굳이 나서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잘 풀리리라 내다본 일이었지만 밤마다 저놈의 기도 소리가 너무 시끄럽게 귀를 때렸었다.

보비네 님, 가장 믿을 만한 신이 당신이라 이렇게 기도를 올립니다. 평생 미레아 옆에 있게 해 주세요. 그저 옆에만 있으면 됩니다. 제가 미레아의 옆에 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런 식으로 말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감사 인사를 받은 것은 덤이고 더는 소란스럽게 굴지 않겠지 싶었다.

아리스는 이제 제자리에서 방방 뛰고 있었다. 그는 이것으로 확신이 들었다.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미레아가 그런 행동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좋아한다는 감정이 다른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 미레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리스 자신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루아드 제국의 가장 높은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을 때도 느껴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럼 이제…… 계속 옆에 있어도 되는 것이겠지?

적어도 미레아에게 필요 없는 부담감을 주고 싶지 않아서 지금 같은 생활에 만족하려 했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겠다고 파울로에게 호언장담했지만, 막상 미레아가 자신을 아직 좋아한다는 것을 확인하자 다른 욕망이 잠식했다.

그녀의 남은 인생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과 함께 나락까지 가 주었으면 좋겠다는 지저분한 소유욕이 강하게 치고 올라왔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의 욕망대로 미레아에게 그럴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망가트려서는 안 되었다.

그럼 이다음은 어떡할 작정인지?

아리스는 자신에게 반문했다.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하다가는 미레아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옆에 있기는커녕 평생 얼굴 한번 보지 못하는 상황까지 올 수 있었다. 마냥 좋다고 날뛸 때가 아니었다. 아리스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상기했다.

최악의 데르카이드 흑익. 서리 여신의 발아래 있지 않은 불길한 자.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가리지 않고 혈육의 피를 밟고 선 도살자. 클라인을 집어삼킨 악마.

아리스는 지금까지 그 꼬리표를 완전히 떼어 낼 수 없었고 앞으로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이런 자신의 옆에 있다가 미레아까지 낙인찍히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자 다시 머릿속이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침착해졌다. 아리스는 아직도 3년 전의 그 암흑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질척거리는 늪이 발목을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자신은 필시 미레아가 발을 담그고 있는 맑은 강물에 스멀스멀 일어나는 흙탕물이 되리라.

* * *

“그래서…… 그랬어…….”

미레아의 말을 전해 들은 라일라는 매만지고 있던 세렌트와 페니드란을 옆에 치워 두고 이마를 감싸 쥐었다.

잘들 논다, 잘들 놀아. 뽀뽀 몇 번 한 것 가지고 아주 소꿉장난에 재미가 들렸구나.

무언가라도 해 보라고 등을 떠밀긴 했으니 이 정도면 나름의 진전이 있는 것은 맞았는데…… 뭐 크게 거창한 걸 한 것도 아니면서 자랑이라도 하듯 말하는 미레아를 보고 라일라는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좀…… 다른 일은 없었어?”

“다른…… 무슨 일?”

“그러니까 그런…….”

라일라는 머리를 휘휘 돌려 주변을 본 후 자신들의 대화를 들을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미레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몸으로 하는 대화?”

미레아는 바보가 아니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미쳤어?!”

펄쩍 뛰는 미레아와는 달리 라일라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다 큰 성인 남녀가 밤늦게 한집에 있으면 할 만한 게 그런 거 아니야?”

“진짜 미쳤나 봐!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왜 꼭 그런 걸 해야 해? 그런 게 아니라 해도 할 건 많잖아?”

“그럼 뭘 할 건데.”

“술 마시기? 이것도 미성년자는 못 하는 거잖아.”

“장난해?”

— 몸으로 하는 대화가 뭔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렌트가 속닥거리자 페니드란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 눈치껏 조용히 해.

미레아는 홧홧하게 열이 올라오는 얼굴을 연신 부채질하며 머리를 저었다.

“아니, 그건 너무 급진전이고…….”

“그래, 꼭 당장 할 필요는 없겠지. 네가 그렇다면 천천히 해.”

무슨 변명을 해 봤자 그 몸으로 하는 대화는 적어도 언젠가는 하게 되어 있다는 의미에 미레아는 계속 부정해 봤자 라일라에게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그래, 그래도 전진이 없는 게 아닌 것도 아니니까. 그러면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이후에 아리스는 뭐라는데?”

그 질문에 미레아는 조금 긴가민가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밤 산책을 하러 간다던 아리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침착하다 못해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를 풍기며 돌아왔었다. 그러더니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미레아가 싱크대를 깨끗하게 치워 놓은 것을 보고는 별말 없이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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