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29화 (229/257)

외전 8화.

“너도 알다시피 이 집은 혼자 살기 좀 넓잖니. 그래서 조금 외로웠었는데 이제야 사람 사는 곳 같고 좋네. 그러니까 부담 같은 거 갖지 말고…….”

아리스는 다시 안도했다. 미레아는 실시간으로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중인 아리스의 속마음도 모른 채 너스레를 떨었다.

“전에 말했듯 네가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되니까! 네 집처럼 생각해.”

미레아가 선심 쓰듯 말했으나 아리스는 이미 반쯤 그러고 있었다. 그는 술을 꼴깍꼴깍 마시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생 눌어붙어야지.

아리스의 생각을 미레아가 알았다면 뻔뻔한 것도 정도껏 하라고 쫓아내는 시늉이라도 했을 것이다.

“페니드란은? 어땠어?”

미레아가 거실 한구석에 세워 놓은 페니드란을 가리키자 페니드란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 오늘 라일라가 그러는데 세렌트랑 같이 쓰면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랬어!

아리스는 페니드란에게 대답하는 대신 미레아에게 물었다.

“그래서 정말로 네가 쓰겠다고?”

“페니드란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게 너 아니면 나잖아. 괜찮아. 오랜만에 다시 쌍검술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하지만…….”

아리스가 여전히 의심 가득한 얼굴로 미레아를 보자 페니드란은 얼른 자신의 무해함을 어필했다.

— 네가 걱정하는 부분은 이제 괜찮아! 세렌트를 거쳐서 나와 마력을 공유하면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미레아라면 나를 잘 써 줄 수 있고, 내가 힘을 발휘하려면 다른 사람보다는 미레아가 훨씬 낫지. 물론 아리스 네가 가장 좋기는 하지만 넌 이제 검을 잡지 않을 거라며? 그렇다면 나는 미레아가 좋아.

페니드란이 떠들게 내버려 둔 미레아는 아리스에게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했다.

“그래도 네 검을 내 멋대로 쓰는 건 좀 그런가? 페니드란의 주인은 엄연히 너인데…… 네가 싫다면 쓰지 않을게.”

— 아니. 난 오늘부터 미레아를 주인으로 섬기도록 하겠어. 이 시간부로 우리는 결별이야, 아리스. 그동안 함께해서 즐거웠다.

미레아가 말을 바꿀까 봐 페니드란은 손바닥 뒤집듯 아리스를 버렸다. 그의 원래 주인인 아리스가 맥주를 꼴깍꼴깍 넘기며 잠시 생각에 잠기자 미레아는 상대방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안…… 돼?”

맥주 한 잔을 다 비우는 사이 생각을 정리한 아리스는 여전히 불안하단 얼굴이었지만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라가 그렇게 말했다면 괜찮겠지. 마도 기구 관련한 조언은 확실한 부분만 말해 주니까.”

— 정말? 정말로? 나 이제 미레아가 주인이야?

페니드란이 설렘 가득한 목소리로 재차 묻자 아리스가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아예 주는 거 아니야. 빌려주는 거지.”

— ……뭐, 지금은 그거면 되었다.

둘의 대화에 미레아가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페니드란.”

— 미레아, 네가 나의 새 주인이 된 기념으로 하나 알려 주자면, 아리스 저놈이 사실은 돈…….

“야!”

페니드란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된 아리스가 황급히 마검의 입을 막았다.

“돈?”

미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페니드란이 또 얄밉게 깐죽거렸다.

— 나중에 알려 줄게. 우리 둘이 앞으로 함께할 시간은 많으니까. 그렇지? 그렇지?

“너 다시 압수한다.”

— 에베베, 무서워라.

“미안한데 나는 아리스가 너를 돌려달라면 바로 돌려줄 거야, 페니드란.”

— 뭐? 그러지 마! 난 네가 좋다니까?

아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미레아가 너와 내 말 중 어느 쪽을 더 귀담아듣겠어?”

— 미레아, 어느 쪽이야?

“글쎄다. 내가 봤을 땐 둘 다 똑같은데.”

서로 웃고 떠들며 시답지 않지만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사이 미레아는 2년 반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수다스럽게 늘어놓는 반면 아리스는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는 2년 반 동안 정말 미친 듯이 지루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무엇을 하며 지냈냐는 미레아의 질문에 일하고, 일하고, 일했다……로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단한 일들은 신문 1면에 실리기도 하니 그 부분에 대한 것은 구태여 물을 필요가 없었다.

“아, 맞다. 너 스캔들 나지 않았었냐? 챠루의 공주님이랑.”

“아니야!”

아리스는 머리가 무슨 말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부정이 튀어나왔다. 그는 입가에 흐르는 술을 얼른 닦고 허겁지겁 손을 내저었다.

그런 적이 딱 한 번, 챠루의 아름다운 공주님과 루데키아스 황태자 사이에 핑크빛이 도는 기류가 흐른다는 기사가 났던 적이 있었다. 그것도 저명한 언론사가 아닌 삼류 신문사에서나 다룬 내용이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찬, 그것도 외모가 준수한 두 남녀를 묶어 스캔들이 나는 건 유명인들이라면 한 차례씩 치루는 연례행사 같은 것이었다. 아리스는 그 정도에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코웃음을 치면서 신경도 쓰지 않은 가벼운 촌극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실제로 그 이후 둘 사이에 별다른 사건이 없자 대중들의 관심은 흐지부지 사라졌고 그렇게 일단락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미레아가 그 사건을 여태 기억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말 아니거든. 그런 거 아니거든. 우리는 그때 초면이라 어색했단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무슨 스캔들? 기자들이 연애 소설을 너무 본 탓이라니까?”

그 어색한 분위기를 쑥스러움으로 재해석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어서 반쯤 흐리멍덩한 눈으로 졸지 않기 위해 초점 없이 쳐다본 것을 상대방에게 반해서 홀린 모습이라 과장되었었다.

“나도 믿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흥분하지 마.”

“믿지 않는데 그 얘기는 왜 꺼내?”

아리스는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미레아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궁금하잖아? 챠루의 공주님이 얼마나 예쁘길래 숲의 요정들이 비호한다는 소문이 났는지.”

“난 모르겠던데.”

“넌 꼭 남들이 예쁘다는 사람 앞에서도 예쁜지 모르겠다고 그러더라. 눈이 얼마나 높은 거야?”

자신의 눈이 그렇게 높던가? 잘 모르겠다. 예쁘다고 생각한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가령, 자신의 어머니라든가, 미레아라든가. 그러고 보니 쟨 왜 자기가 예쁘다는 걸 모르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아리스는 미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간혹 야외 임무를 하다 보면 얼굴이 타기도 했지만 금방 원래대로 돌아오는 깨끗한 하얀 피부에 큰 눈망울 안에는 감람석이라도 박아 놓은 것 같았고, 햇살을 받는 새순 같은 빛의 눈동자와 은은하게 타오르는 장작 속 불씨 같은 붉은 머리카락.

비록 화려한 미인의 인상은 아니지만 가지런하게 자리를 잡은 코와 입술은 언제 봐도 오밀조밀한 매력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명랑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저 정도면 부족하지도 않고 오히려 차고 넘칠 정도로 예쁜데 말이다.

“미레아는 예쁜데.”

아리스는 자기가 말을 내뱉어 놓고도 순간 덜컥 굳었다.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것이었다. 하지만 미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예이, 예이.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예의상 한 말로 치부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어쩐지 오기가 솟았다.

“진심인데.”

하지만 진심이 제대로 전해지지는 않았는지 미레아는 하하 웃을 뿐이었다. 아리스는 뚱한 얼굴로 맥주를 들이켰다. 알코올 도수가 낮은 맥주다 보니 한 잔 정도 마신 것으로는 크게 취하진 않았는데 미레아의 기분은 점점 좋아졌다.

그런 미레아를 보고 있는 아리스 역시 덩달아 흥이 오르기 시작했다. 지난 2년 반 동안 내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안다면 너는 어떻게 반응할까. 매일같이 너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아리스가 미레아를 그리워한 방식은 미레아와는 정반대였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눈앞에 미레아가 어른거렸었다. 삶이 지루해질 법도 한데 미레아를 생각만 해도 좋았다. 언제나 그 앞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 설레기도 했다. 그것은 아리스의 일상 속에서 일종의 위안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처음에는 단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이상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욕심은 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미레아를 보다 보면 내면의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부풀어 올랐다. 아리스의 겉껍데기는 그것을 다 담을 수 없어서 커질 대로 커진 내용물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파울로의 말이 맞았다. 단순히 보고만 있는 것으로는 점점 갈증만 더해질 뿐이었다. 입 밖으로 욕구가 치밀어 올라 돌아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지금까지 미레아를 그리워했던 시간과 비교했을 때 지금 상태는 그나마 덜 고통스러웠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아리스는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났다. 머리가 멍했다. 술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이 자리가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

“슬슬 치우자. 너무 많이 먹어서 배불러.”

그러면서 그릇 정리를 하는 아리스를 미레아는 다소 섭섭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러저러한 핑계로 이런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너와 더 있고 싶었는데.

그리워한 마음은 억지로 꾹꾹 눌러 담았던 만큼 한번 자각을 한 이후로는 급류처럼 터져 나왔다. 아리스와 무엇이든 함께하고 싶었고, 그와 많은 것을 공유하고 싶었으며,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고 싶었다.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이 그의 옆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상대방도 같은 생각이었다면 좋을 텐데. 라일라의 확언이 있었다 해도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아리스 덕분에 미레아는 아직 확신이 없었다.

미레아는 자신 앞에 놓인 술잔을 치우려 손을 뻗는 아리스의 손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아리스가 의아한 눈으로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미레아 역시 그를 마주 보았다. 붙잡은 손을 타고 열기가 전해져 왔다. 지금보다 그와 좀 더 닿고 싶었다. 더, 이보다 훨씬 더.

뱃속에서부터 강한 염이 올라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머릿속을 꽉 채웠고 미레아가 자각했을 때는 이미 행동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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