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사실 그동안 미레아를 좋다고 따라다니던 놈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예쁘고, 성격 좋고, 능력까지 있는 사람을 남자들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하지만 미레아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제대로 몰랐다. 결정적으로 상대방과 간질간질한 기미가 보이기도 전에 미레아가 넘어가지 않았고 남자들 대부분은 그 단호한 태도에 나가떨어졌다.
옆에서 보다 못한 파울로가 경험이라도 쌓게 연애를 좀 해 보라 그래도 미레아는 크게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유야 안 들어 봐도 뻔했지만…….
그렇게 수절 아닌 수절을 하였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불타는 사랑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지금도 봐라. 영 미적지근한 상태만 이어졌다.
“뭐가 되었든. 네가 아리스 좋아하는 거 걔가 알긴 아니?”
“그게…… 말했잖아. 2년 반 전에 그런 일이 있었던 이후 그런 걸 생각할 틈이 없었지…….”
처음 얼마 동안은 아리스에 대해 매일 생각했다. 그가 떠난 이후에도 줄곧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봤자 당장 옆에 없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만 커지니 괴로웠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확실한 기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슴속에는 사무침만 남았고 마냥 기다려 봤자 정신적인 소모만 클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자신이 아직도 아리스를 좋아하는 것이 맞는지조차 확신이 가지 않았다. 미레아는 이것을 사랑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만한 감정인 건지 알 수 없었다. 미레아가 라일라에게 그런 설명을 해 주자 그녀는 어이없어했다.
“그래서 지금 아리스에 대한 사랑이 식었다는 소리야? 너희는 대체 어쩌다 관계가 퇴보한 거야?”
“애초에 우리 사이에 사랑이라고 할 만큼…….”
“그럼 내가 2년 반 전에 들었던 절절한 고백은 무엇이었을까나.”
미레아의 말을 끊고 라일라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 반응에 미레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딱 그때뿐이었는걸. 지금은…….”
“지금은? 지금은 아리스가 싫어? 이제 질린 거야?”
라일라가 쏘아붙이듯 물어보자 미레아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고!”
“그럼 좋아?”
“좋다, 싫다로만 말하자면 당연히 좋… 지…… 그리고 질린 것도 아니고.”
2년 반 동안 얼굴 한번 보지도 못했는데 질렸다는 소리는 말도 되지 않았다.
“다시 묻자. 아리스는 그렇다 치고, 너는 아리스랑 뭘 하고 싶은 건데?”
미레아는 순간 허를 찔려 가슴 한구석이 따끔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아리스와 하고 싶은 게 무엇일까.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리스를 만난 것은 반가웠다. 좋았다. 그런데 아리스가 먼저 아무렇지도 않게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다 보니 자신 역시 유난을 떨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스는 그가 말했던 대로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미레아는 본인이 나서서 그 휴식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푹 쉬라는 의미로 아리스를 배려해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지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아리스의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처사였지만 말이다.
만약 평범한 상황이었으면 아리스를 다시 만났을 때 이것저것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듯, 미레아는 아리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있었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리스와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상상은 하지도 못했다. 할 말이 없어진 미레아는 난처한 얼굴로 붉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빙빙 꼬았다.
“트, 특별히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건 아닌데…….”
“그럼 내쫓든가. 옆에 둬 봤자 심란하기만 하지, 도움도 안 되는데.”
“그건 불쌍하잖아.”
미레아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라일라는 입술을 삐죽이며 딴생각을 했다.
아무리 봐도 아리스 그 녀석, 불쌍한 척하고 미레아를 이용해 먹고 있는 것 같은데…….
— 사기꾼이야.
페니드란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라일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다른 쪽으로 해석한 미레아가 중얼거렸다.
“내가 생각해도 나 우유부단하다.”
“따지고 보면 갑자기 쳐들어와서 집을 떡 하니 차지한 아리스가 그 이상으로 뻔뻔한 거지, 너는 천천히 생각하면 돼.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좋으니 앞으로 아리스와 어떤 식으로 지낼지 결정해 봐. 그렇다고 너무 오래 생각하지는 말고.”
“그런가…… 그런데 정말 아리스가 나를 좋아하는 건 맞는지 잘 모르겠는데 내가 나서 봤자 뭔가가 변할지는 모르겠고…… 관계만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 싶어서 무서워.”
사실 제일 걱정스러운 것이 그 점이었다. 현재 이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한번 깨고 나면 분명히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앞으로는 영영 사이가 변할 것이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라일라는 이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너를 좋아하는 게 맞는다니까 왜 내 말을 못 믿어? 걔는 은근히 가차 없는 편이라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시선도 안 주는 애라고!”
라일라의 확언에 미레아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쇠뿔도 단김에 빼랬어. 말 나온 김에 한 번 시도해 본다.”
라일라는 그게 무엇인지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 역시 함께 주먹을 쥐며 응원을 해주었다.
“잘해 봐.”
미레아의 두 눈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 * *
아리스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례적으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식당에서 사 온 음식이 아닌 막 밥을 짓고 있는 냄새였다.
“왔어? 거의 다 됐으니까 씻고 내려와.”
미레아가 냄비를 국자로 휘휘 저으며 손짓했다. 아리스가 부엌 쪽으로 고개를 쭉 빼며 들어왔다.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 해?”
“보면 몰라? 밥한다.”
“나 사 왔는데…….”
아리스가 허망한 얼굴로 양고기 스튜가 들어 있는 장바구니를 흔들어 보았지만, 미레아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는 괜히 일을 찾아서 하는 미레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딜 다녀왔어?”
“어…… 그냥 여기저기.”
아리스는 오늘 오래 외출한 것을 후회했다. 미레아가 일찍 들어올 줄 알았으면 자신도 일찍 들어왔을 것이었다. 그는 오늘 록산 주변에 있는 농경지를 보고 오는 길이었다. 그렇다. 아리스는 놀랍게도 진심으로 농업에 종사할 생각이 만만이었다. 어느 땅이 농사짓기 적당할지 사전 답사를 한 것이었다.
미레아가 차려 주는 음식을 보고 있자니 절로 침이 고였다. 아리스가 이번에 록산에 온 이후 그가 부지런히 장을 봐 와서 미레아는 음식을 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음식은 가히 전문가의 솜씨에 근접해 있다는 것을 아리스는 잘 알았다. 그야 일전에 먹어 본 적이 많았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미레아가 한 음식을 먹을 생각을 하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냉큼 손을 씻고 와서 탁자 앞에 앉았다. 아리스가 잠시 손을 씻은 사이 미레아가 차려 놓은 것들을 보고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몸을 데워 줄 따듯한 토마토 수프와 부드러운 흰 빵, 구운 칠면조 요리, 크림소스에 버무린 면 요리, 신선한 채소와 작은 새우 살이 들어간 샐러드 등. 언뜻 보기만 해도 손이 많이 갈 만한 것들이었다. 아리스는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져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아니, 그냥.”
미레아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어도 아리스는 어쩐지 더 불안해졌다.
“혹시 내가 사 온 음식들이 그렇게 별로였어?”
그것을 돌려 말하는 걸까 싶었는데 미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까지 딱히?”
“그런데 왜 이렇게 상다리가 휘어지라 차렸어?”
“환영식.”
“누구의?”
아리스가 재차 묻는 사이 미레아는 자신의 주머니를 주섬거리며 무언가를 꺼냈다.
“록산에 온 것을 환영해!”
빵!
작은 폭죽이 터지면서 그 안에 있던 길게 나풀거리는 종이 술과 반짝이는 종잇조각들이 아리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리스는 그 순간에 기시감이 들었다. 그야 그가 3년 전, 록산에 온 첫날 겪었던 일과 똑같았으니 말이다. 차이점이라면 지금은 미레아 혼자였다. 단둘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미레아가 어안이 벙벙한 아리스의 표정을 보고 허겁지겁 설명을 덧붙였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고. 내가 너 온 다음 날 바쁘다고 쌩하니 집을 비우고 가 버리고, 그 이후에도 별다른 걸 해 준 것도 아니라…… 미안해. 서운했지?”
“한 달이나 됐는데?”
“그러니까 더 늦어지기 전에 해야지.”
서운했냐고 하면 서운한 것이 맞긴 했는데 아리스는 그걸 미레아 앞에서 티를 내자니 너무 떼를 쓰는 것 같아 그냥 얌전히 있었던 것뿐이었다. 이런 걸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해주니 좋기는 했다.
“그런 의미로 이것저것 만들어 보았어. 맥주 마실래?”
“그래.”
미레아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와 아리스에게 술잔 가득 따라 주었다. 아리스의 환영식이라 했으면서 어째 미레아가 더 신나 보였다.
“맥주도 음식도 충분하니까 사양하지 말고 마음껏 먹어!”
미레아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이 순간을 즐기지 않는 것은 죄악이었다. 아리스는 미레아와 함께 잔을 기울이며 생각했다.
아, 나 지금 정신 줄 놓으면 실수할 것 같아.
그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술을 천천히 마셨다. 술기운에 볼이 발갛게 올라온 미레아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헤헤거리면서 웃었다.
“너랑 오랜만에 이렇게 술 한잔하니까 좋다!”
미레아는 흥이 올라 탁자에 팔을 기대고 감탄사를 내뱉다가 혹시 혼자만 좋은 게 아닐까 싶어 얼른 아리스의 눈치를 살폈다. 아리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미레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내가 부담을 주는 거 아니지?”
“무슨 부담?”
“네가 얹혀산다고 귀찮다는 것처럼 눈치 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없어? 만약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다 오해니까 너무 거북하게 생각하지 마! 나는 네가 우리 집에 있는 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고…….”
미레아는 거기까지 말하다 갑자기 뜸을 들였다. 그리고 얼른 말을 고쳤다.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고.”
그 대목에서 아리스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라니? 귀찮다는 소리인가? 그런 불안감이 머릿속을 찰나 스치고 지나가는데 미레아는 말을 이었다.
“네가 있어서 좋아.”
그 말에 아리스는 눈을 깜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