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록산 사람들은 그들의 바로 옆에 있는 라슈발렌 본부에 큰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대부분의 일은 기밀이었기 때문에 알고 싶어도 알 수 없었던 탓이 제일 컸다.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이 촌구석은 국제 정세에 상당히 둔감했다. 아리스는 그 점을 노리기로 했다.
“그러면 당분간 원하는 만큼 쉬어.”
미레아는 설마 아리스가 평생 놀고먹을까 싶은 마음에 적당히 제안했다. 하지만 아리스는 지금 같아서는 정말로 평생 놀고먹고 싶었다.
원하는 만큼이라니. 내가 언제까지 여기 있고 싶은지 알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거니?
아리스가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 사기꾼…….
페니드란이 전부 들리도록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응? 뭐라고, 페니드란?”
미레아가 페니드란에게 관심을 주자 아리스는 그녀가 자신을 보지 않는 사이 마검에게 눈을 홉뜨고 가만히 있으라며 협박을 했다. 페니드란은 다시 딴청을 부리는 척했다.
“그러면 그때까지 여기 있어도 괜찮아?”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내가 그렇게까지 박한 사람도 아니고. 마음 편하게 있어.”
미레아가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이것으로 확실하게 미끼를 물었다. 아리스의 작은 계획이 하나 이루어지자 그는 저도 모르게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페니드란이 또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 * *
아리스가 미레아의 집에 눌러앉은 지 거의 한 달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사이 아리스는 연신 페니드란과 싸워야 했다. 자기를 써 달라는 페니드란의 요구를 아리스가 허락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레아가 그 이야기를 라일라에게 넌지시 꺼내자 그녀는 일단 페니드란과 세렌트 두 마검을 가져와 보라는 제안을 했다. 그것을 아리스에게 전달하자 그는 마지못해 페니드란을 미레아에게 내주었다.
“어찌어찌하면 미레아 너도 페니드란을 큰 위험 부담 없이 쓸 수도 있을 것 같아.”
페니드란과 세렌트를 번갈아 가며 살피던 라일라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페니드란이 환호했다.
— 야호! 그럼 나 이제 아리스 대신 미레아가 써 주는 거야?
“음…… 아직 확답은 조금 이른 것 같기는 하지만 세렌트와 함께 사용한다는 조건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
“세렌트도 같이 써야 한다니?”
“그러니까 페니드란의 마력이 사용자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어느 정도 제어할 장치가 필요한 거잖아? 세렌트가 그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사용자와 페니드란 사이를 서로 오가는 마력이 세렌트를 한번 거쳐서 가면 세렌트가 조절해 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페니드란을 사용해야 한다면 세렌트를 꼭 함께 써야 해.”
— 그렇다면 나는 페니드란과 함께 다닐 수 있다는 소리네?
세렌트가 신난 목소리로 말하자 페니드란이 뜻을 알 수 없는 신음을 내었다. 자신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 것은 좋았으나 세렌트와 함께라는 조건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페니드란 쪽이었다.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란 것은 본인도 알기 때문에 대 놓고 불평을 내뱉을 수도 없었다.
“세렌트 말대로 이 두 마검을 한 세트로 들고 다녀야 해. 괜찮겠어?”
라일라의 말에 미레아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다면 그 정도는 괜찮을 거야. 쌍검술은 익숙하니까.”
“세렌트 너는 중개소 역할을 잘해야 하고, 그렇다고 페니드란 너도 마냥 힘을 폭주시키면 안 돼. 알겠어?”
— 걱정하지 마!
— 괜찮을 거야.
두 검의 확언에 미레아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페니드란에게 말했다.
“그러면 일단 아리스에게 허락을 구해 볼게.”
— 그 녀석에게 잘 좀 말해 줘, 미레아. 누가 되었든 나를 휘둘러 주기만 한다면 내 옆에 세렌트가 있다 해도 나는 괘념치 않으니까!
페니드란의 말에 세렌트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나는 란이 옆에 있어서 좋은데 란은 안 그래?
— 누가 란이야?
— 페니드란의 란. 란이라고 부르는 거 귀엽지 않아?
— 아니!
페니드란이 진절머리를 쳤지만 세렌트는 연신 헤실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 나도 렌이라고 불러. 세렌트의 렌.
— 싫어.
— 3년 만에 란을 보니 너무 좋다! 이제는 쭉 함께 있겠네?
— ……살려 줘.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페니드란은 이제 세렌트에게 휘말릴 수 있단 걱정에 벌써 지친 기분이었다.
비록 세렌트가 일방적으로 떠들긴 했지만 두 마검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라일라는 미레아를 바라보며 입을 달싹거렸다. 그 반응은 대체 무얼까 싶어 미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라일라는 헛기침을 흠흠, 하더니 어색하게 운을 뗐다.
“페니드란은 일단 그렇게 처리하고…… 그런데, 아리스 말이야.”
“응.”
미레아가 순진한 눈망울을 깜박거리자 라일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리스가 록산에 온 지 한 달이란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라일라는 도대체 저 둘이 한집에서 무엇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 죽을 것 같았다.
아리스가 온 둘째 날 그를 만났을 때는 일 얘기를 하느라고 그 밖의 이야기는 미처 하지 못했었다. 거기에 자기가 찾아온 것은 미레아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까지 받은 터라 의리상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래도 마냥 모른 척하자니, 호기심이 슬슬 솟구치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너희 집에서 뭐 하고 있는데?”
미레아는 라일라가 겸사겸사 조정해 준 부츠의 출력을 확인해 보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대꾸했다.
“밥을 해.”
“……밥?”
라일라가 괴상한 소리라도 들은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남의 집에서 황태자 출신의 사람이 밥을 한다는 게 쉽게 생각하기 힘든 부분인 것이 보통이었다.
“아, 정확하게는 밥을 사 온다는 쪽인데…… 내가 식비를 대 주겠다 해도 한사코 거부한다니까? 걔가 돈이 있지도 않을 텐데 부담스러워 죽겠어.”
아닌데…… 아리스 녀석, 돈 많을 텐데…….
라일라가 혼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리스의 주머니 사정을 모르니 함부로 말을 얹을 수 없어서 그냥 그렇겠거니 하며 넘어가려는데 페니드란이 라일라에게 속삭였다.
— 아리스는 사기꾼이야.
페니드란의 힌트를 들으니 라일라는 한 번에 사태 파악이 되었다. 미레아 앞에서는 순진한 척 굴고 있어도 엄연히 정치판에서 뒹굴다 온 놈이다. 순진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식의 핑계로 눌러앉았다, 이 말이렷다.
“그리고 청소도 해.”
“걔는 대체 뭐 하러 왔다니?”
라일라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묻자 미레아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공짜로 숙박하는데 본인이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다면서 내가 집에 가면 밥 차려 주고 청소도 해 줘. 빨래는 내가 사양해서 하지 않는데 난 내가 무슨 메이드라도 들인 줄…….”
“현모양처야?”
미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희는 젊은 남녀가 한집에서 같이 사는데 왜 그렇게 건전해? 정말 아무 일도 없어?”
라일라의 말에 미레아가 얼굴을 붉히며 저도 모르게 항변했다.
“우리는 전부터 건전했거든?”
“그때는 그럴 만한 관계였는데 지금은 아니잖아? 너도 아리스 좋아하고, 아리스도 너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데?”
미레아는 라일라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졌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그게 벌써 2년도 더 전의 일이고…… 그, 사랑하네, 어쨌네 하는 소리는 그 이후에 하지도 않았는걸. 정말 그게 다란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은 그때랑 또 다를 수 있잖아.”
라일라는 뭐 이리 답답한 사람들이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미레아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아리스가 네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상태인데 공식 업무를 마치자마자 너희 집으로 달려왔다고? 걔가 여차하면 외가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 갈 곳이 없는 것도 아닌데? 보통은 안 그래…….”
그 말에 미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런……가?”
“그렇지.”
연신 자신에게 말을 거는 세렌트를 무시하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페니드란은 자기도 한마디 해 주고 싶어졌다.
아리스는 미레아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아리스도 그 나름의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후환이 두려워져서 입을 다물고 있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아리스는 그것에 관한 이야기는 꺼낸 적도 없고…….”
미레아의 말에 라일라가 어이없어서 피식 웃었다.
“이 답답아. 아리스는 먼저 나서서 네게 그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니야. 분명히 네 눈치나 보고 있을걸?”
“내 눈치를 왜?”
“생각을 해 봐. 아리스는 흑익으로 악명도 떨쳤고, 황태자였고, 여러모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좋은 상태잖아. 아리스가 지금 다른 것을 전부 정리하고 왔다지만 사람들은 달라. 유명인들한테 얼마나 관심이 많은데. 악질적인 스토커가 붙을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 사람이랑 가깝게 지내 봐. 분명히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을걸?”
“어…….”
라일라가 지적한 점을 미레아는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지라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얼굴을 했다. 미레아가 여태 아무 생각 없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라일라가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하게 생겼어? 걔가 너한테 그런 부담감을 주고 싶겠냐고. 당연히 눈치를 볼 수밖에.”
“하지만 난 그렇게까지 부담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네가 암만 괜찮다고 해도 지금 아리스는 괜찮다고 생각 않는 거라니까?”
“그럼 우리 집엔 왜 온 거야?”
미레아의 생각으로는 라일라의 말대로라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럼 차라리 연락을 끊는 쪽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연락을 끊는다는 가정만 했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미레아가 미간을 찌푸리는 동안 라일라는 조금 확신에 찬 태도로 말했다.
“그게 아리스가 할 수 있던 최대한의 타협점 아닐까? 걘 지금 상태로도 만족할 거야.”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한다고?”
“그럴걸? 그러니까 네가 먼저 해 버려.”
— 쿨럭.
페니드란이 당혹감에 기침 소리를 내었지만 라일리와 미레아에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뭘……?”
미레아가 조금 멍청한 얼굴로 되묻자 라일라는 심란해졌다. 미레아가 이렇게 방향을 못 잡는 것도 이해는 됐다.
얘가 연애해 본 적이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