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26화 (226/257)

외전 5화.

그렇게 미레아가 돌아올 때까지 열심히 쓸고 닦고 치운 결과물이 미레아가 마주한 이 상황이었다. 기다리는 쪽이 더 힘들었지 청소하는 것쯤은 별로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런데 벽에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던 페니드란은 무언가 불평불만이 가득 쌓인 기색이었다.

— 차라리 나를 휘둘러 달라니까 이런 쓸데없는 데에만 열중하고.

아리스는 요 몇 달 동안 검을 잡을 일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페니드란에게서 관심이 멀어졌고 제대로 만져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나도 엉뚱하게 청소나 했지 자신은 또 방치하는 꼴을 보자니 이건 제대로 따지고 싶었다.

“그래도 여기저기 다 데리고 다녀줬잖아. 오염 지역에서 5년 동안 버틴 놈이 왜 이렇게 불만이 많아?”

— 그거랑 이거랑 같아?!

“다를 건 또 뭐가 있는데.”

페니드란은 아리스의 머릿속에서 땍땍거리는 것을 멈추고 미레아에게까지 들리도록 소리를 빽 질렀다.

— 미레아! 아리스가 나 괴롭혀!

“그런 적 없거든.”

— 씨잉…….

“하…… 정말…….”

페니드란 때문에 골치가 아파진 아리스는 자연스럽게 바지 뒷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찾아 물고 라이터의 불을 피웠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라 자신의 행동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미레아가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다. 표정만 봤을 때 미레아는 별다른 생각이 없어 보였으나 아리스는 괜히 찔려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얼른 손가락으로 집었다.

“너, 담배도 피우니?”

그 질문에 아리스는 당혹감이 묻어나는 손짓으로 담배 연기를 휘휘 흩트리며 꽁초를 발로 비벼 끄려다 카펫 바닥인 것을 뒤늦게 깨닫고 우왕좌왕거렸다.

“어, 이건, 그…….”

그 모습에 미레아는 피식 웃었다.

“나쁜 짓 하다 들킨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놀라?”

“아니, 그게…….”

미레아 말대로 담배가 나쁜 짓은 아니었어도 그렇게 권장되는 짓도 아니었다. 정치판에서 굴러 보면 저절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고 싶었으나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해치는 행위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가끔만 펴.”

“그렇구나.”

“끊을 거야.”

“그럴 거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지. 파울로와 카디 언니도 몇 년째 못 끊고 있는데.”

결국, 한 소리 들어버렸다. 아리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미레아에게 허세를 부렸다.

“나는 할 수 있어. 걱정 마.”

“끊겠다니 다행이다. 너 담배 피우는 거 진짜 안 어울리거든. 피운다는 것도 완전 의외네.”

미레아까지 안 어울린다고 하니 정말 끊을 때가 된 것 같았다. 아리스는 담뱃갑을 미레아에게 내밀었다.

“자.”

“나 주는 거야? 왜?”

“네가 버려. 말 나온 김에 끊게.”

“그래. 잘해 봐.”

아리스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도 휴지에 물을 묻혀 적당히 불을 끄고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담배 끊을 생각을 하니 스트레스를 받아서 다시 담배가 고픈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지만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 아,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를 좀 봐 달라고!

페니드란이 다시 빽빽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고. 페니드란, 세렌트랑 놀래? 세렌트 데리고 올까?”

미레아가 중재에 나섰어도 페니드란은 여전히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나 걔 별로야. 너무 이것저것 하는 말이 많아서 귀찮아.

사실 페니드란도 말이 많은 편이긴 한데 세렌트는 그 이상으로 더 말이 많았다. 아리스의 수다스러움을 견디던 미레아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가끔은 세렌트를 일부러 떼어 놓을 정도였다.

퇴근한 이후에는 일부러 세렌트를 집까지 들이지 않는 이유도 반쯤은 그런 연유가 포함되어 있었다. 세렌트는 특히 페니드란만 보면 그보다 몇 배로 더 시끄러웠다. 페니드란은 세렌트를 볼 때마다 막둥이 동생이 하나 있는 오빠의 심정이 되었다. 그래서 2년 반 만에 만나는 것도 웬만하면 뒤로 미루고 싶었다.

“그럼 어떡하라고.”

— 나를 휘둘러 달라고! 기왕이면 끝내주는 활약을 하도록 말이야!

“그럴 일이 없잖아.”

페니드란이 씨근덕거렸지만, 아리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페니드란은 이제 자신이 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아리스와 페니드란에게는 전투의 선봉에 선다든가 무언가를 지킨다든가 하는 것들과 멀어진 일상이 찾아왔다.

페니드란은 자신은 몰라도 아리스가 그것을 대놓고 기뻐하는 터라 눈치 보지 않고 불평을 하자니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이래서야 자신의 존재 의의까지 위태롭지 않겠는가. 페니드란은 아리스가 자신을 버릴까 봐 불안했다.

미레아는 아옹다옹하는 둘을 보며 잠시 고민을 하더니 말했다.

“그럼 내가 너를 쓰는 건 어때? 세렌트와 너를 번갈아 쓰면…….”

“안 돼.”

미레아의 대안을 아리스가 반대했다.

“위험해.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 아, 왜! 내가 왜 위험한데?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들은 다 기우란 말이야! 내가 다 조절할 수 있어!

“그래, 그건 페니드란 말도 맞아. 페니드란은 스스로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하니까 힘이 폭주하거나 나쁜 쪽으로 작용하지는 않을 거야.”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의지에 먹히고 싶어?”

아리스의 단호한 말에 미레아가 입매를 굳혔다.

“페니드란을 걱정하는 게 아니야. 사용자가 걱정이지. 나는 상관없지만, 페니드란의 마력으로 너나 다른 사람이 의지에 먹힌다면? 상황에 따라 페니드란이 사용자에게 끌려갈 수도 있어.”

페니드란도 자신이 무작정 우기기엔 아리스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했다 해도 심정은 그렇지 않았다.

— 그, 그럼 아리스 네가 뭐라도 하면 되겠네! 가령 라슈발렌의 전투부에 들어간다든가. 미레아처럼!

“안 돼. 나처럼 여기저기 얼굴이 다 팔린 사람이 그런데 들어가서 무슨 일을 하겠다 그래.”

자신의 주장이 아리스의 반박에 연달아 막히자 할 말이 떨어진 페니드란은 성질만 낼 뿐이었다. 미레아는 페니드란의 눈치를 보며 둘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지 말고. 아리스가 네게 다른 방법을 찾아 줄 거야. 그렇지?”

미레아가 얼른 달래 보라며 눈짓하자 아리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하는 거 봐서.”

— …….

평소라면 더 떼를 썼을 테지만 이 상태라면 더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페니드란은 잔뜩 골이 나서 입을 다물었다. 차가운 분위기에 미레아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그보다 뭔가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생각도 없고 큰 기대도 없이 살폈을 뿐인데 뜻밖에도 냉장고 안은 음식물로 가득했다. 미레아가 아리스를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뭐를 좋아할지 몰라서.”

“이것들은 다 어디서 났어? 설마 다 만들었어?”

미레아가 알기로는 아리스는 요리를 잘 못 했다. 그는 애초에 음식이란 걸 거창하게 할 기회도 별로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조리법이라고는 굽고, 찌고, 삶는 것이 전부였다. 양념 소스? 재료 조합을 어떻게 해야 하는 줄도 모르니 간이라도 하면 잘한 것이었다.

“사 왔어.”

미레아는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을 했다.

“차라리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을 해. 내가 해 줄게. 식당에서 포장해 오면 비싸잖아.”

미레아는 아리스와 달리 요리에 자신 있었다. 한때 록산의 유명 레스토랑의 주인이었던 레인 마리어드의 딸로서 자존심이 있지, 그녀에게 전수받은 조리법대로만 하면 실패하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사서 먹으면 됐지.”

“너 돈 없다면서.”

아리스는 이 타이밍에 돈이 많으니 괜찮다고 할 수 없었다. 괘씸죄로 쫓겨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불쌍한 척이라도 하면서 여기 붙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대충 얼버무렸다.

“라케드 님한테 좀 꿨어.”

“그 용이 네게 돈을 빌려줬다고?”

미레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수상쩍다는 듯이 바라보자 아리스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처지를 잘 아니까.”

— 이 사기꾼아…….

페니드란의 목소리가 아리스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아리스는 그 역시 무시했다.

“이미 사 온 건 어쩔 수 없지.”

미레아가 음식들을 하나씩 꺼내 프라이팬에 부었다. 음식물을 데우는 동안 다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페니드란은 삐져서 말이 없었고, 미레아는 주전자를 올려놓은 불에 신경을 쓰기 바빠 말이 없었으며, 아리스는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서 미레아가 주방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물이 끓는 소리,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불이 타닥거리는 소리들 속에 미레아가 있었다. 지금은 그녀를 그렇게 보는 것도 좋았다.

아리스가 사 온 음식들로만 상을 차렸는데도 제법 푸짐한 상차림이 되었다.

“잘 먹겠습니다.”

미레아가 아리스의 맞은편에 앉아 먼저 수저를 들자 아리스도 그 뒤에 따라 들었다.

“이거 맛있는데?”

티를 내진 않았어도 허기졌는지 미레아는 부지런히 음식물을 입에 넣었다. 그러다 아리스는 다소 여유로운 태도로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는 혼자 음식을 독식하고 있던 사실이 머쓱해져서 입 안에 있던 것을 꿀떡 삼킨 후 물었다.

“그래서 계획이 어떻게 돼?”

“무슨 계획?”

“이제 뭘 할 거냐고. 설마 여기 아무것도 안 하면서 눌러앉겠다는 생각은 아닐 테고.”

“몰라.”

아리스가 감자 샐러드를 푹푹 퍼먹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마도 공학 쪽으로는 쿤둘렌과 라일라에게 이것저것 조언을 구하러 돌아다니긴 했지만 그렇다고 확실하게 결정이 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아리스의 원대한 꿈은 아직도 돈 많은 백수였다. 일전에 율비네에게 말했듯 그동안의 정신적인 소모를 핑계로 백수 한량처럼 지내고 싶었다.

전자는 얼추 들어맞은 것 같은데 앞으로 마냥 백수 한량처럼 굴자니 미레아의 눈치가 신경 쓰였다. 돈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으니 일을 안 하고 있으면 얼마나 한심하게 볼지 안 봐도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레아는 지금 아리스를 딱한 사람처럼 보고 있었다.

“당분간은 나도 쉬어야 하지 않겠어?”

“……하긴. 너도 지금은 휴식이 필요할 때긴 해.”

록산은 물 좋지, 공기 좋지, 경치까지 좋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휴양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그리고 아리스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도 상대적으로 많지 않을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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