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25화 (225/257)

외전 4화.

다음 날, 아리스는 파울로의 말대로 정말 쿤둘렌을 찾아갔다. 파울로의 예고대로 아직 저녁 시간이 되지 않은 것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가지 않아 시계를 확인하니 일어난 지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리스는 딱히 홀로 할 일을 찾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쿤둘렌에게 겸사겸사 물어볼 것도 있었다. 오랜만에 아리스를 본 쿤둘렌은 생각지도 못한 손님의 방문에 반색하며 맞이해 주었다.

“바쁜데 괜히 시간만 뺏는 것이 아닌지 죄송합니다. 선약도 없었는데…….”

아리스가 어색하게 인사를 하자 쿤둘렌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아리스 군이라면 상관없으니까요. 아, 이젠 루데키아스 군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그거 다 때려치우고 나왔다니까요? 이제 저는 황실이랑 상관없으니 그냥 부르시던 대로 부르세요. 제 새 신분은 이제 ‘아리스 류’라고요.”

“그렇습니까. 호적을 외가에 편입하기로 했군요.”

“뭐, 그렇지요. 성이랑 이름의 괴리가 아무래도 어색하긴 하지만…….”

“저는 마음에 드는걸요.”

그 따듯한 말에 아리스는 미소 지었다. 쿤둘렌은 아리스가 퍽이나 반가웠는지 아리스에게 홍차며 쿠키며 이것저것 내어 주었다. 그게 어쩐지 지난날 세피로스가 자신에게 달곰한 것들을 내주었던 것이 생각나서 기분이 이상했다.

“저야 건너 건너 군의 소식을 대충 전해 듣기는 했으니 안부를 묻는 건 좀 이상하군요. 그래도 예의상 잘 지냈는지 정도는 묻겠습니다.”

“쿤둘렌이 들으셨던 것과 별다른 바 없겠죠.”

“저런. 그렇다면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네야겠군요.”

그동안 무슨 소식을 들은 건지 쿤둘렌이 동정의 시선을 던졌다. 실제로 그동안 죽도록 일한 것들은 동정을 받을 만큼 고된 일들이었으니 아리스는 오히려 그 시선에 감동했다.

“그래서, 군이 아무 이유도 없이 저를 찾아왔을 리도 없고…….”

쿤둘렌의 말에 아리스는 가슴이 따끔했다. 인사를 하러 온 게 틀린 말은 아닌데 쿤둘렌의 말대로 아리스가 그를 찾아온 이유는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쭤볼 게 있어서요.”

“무엇이든지 말해 보세요.”

“마도 공학자가 되려면 어떻게 하죠?”

아리스의 말에 쿤둘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도 공학이라면 라일라 군처럼 말인가요?”

아리스는 관자놀이께를 긁적이며 천천히 말했다.

“꼭 그런 쪽이라기보단 그냥 제가 아는 것들을 가장 잘 활용할 만한 건 그쪽인 것 같아서요. 물론 마법에 대한 학문적인 지식은 아직 햇병아리 수준인 데다 그때 이후로 마법을 마음껏 부릴 수는 없어졌지만…….”

쿤둘렌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아리스가 말한 부분을 가늠해 보았다.

“군은 배움이 빠른 편이니까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본적인 원리는 몸으로 알고 있잖습니까? 하지만, 마도 공학이라…… 라일라 군이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보통은 그 정도까지 수련을 쌓으려면 십 년 이상은 공부해야 할 수도 있지요.”

쿤둘렌의 말에 아리스가 끄응 거리는 신음을 흘렸다.

“십 년…….”

아리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지식을 익히는 기간이 제법 길었다.

“하지만 제가 말했듯 군은 배움이 빠른 편이니……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은 편은 아닙니다. 십 년이라고 말씀드린 기간은 범인들의 기준이니 군이라면 기간을 단축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더니 기대에 가득 찬 학자의 눈으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당장 오늘부터 시작할까요?”

“……무얼요?”

“마법학 말입니다.”

아리스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쿤둘렌은 아리스를 가르치는데 언제나 진심이었고 이번에도 그에게 지식을 전수할 생각이 만만이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달팽이보다 더 느린 속도로 가고 있었는데 여기서 마법학 책까지 들여다보면 1분 1초가 영겁과도 같이 느껴질 게 뻔했다. 아리스의 사양에 쿤둘렌은 조금 실망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서, 마도 공학을 배우려는 진짜 이유가 뭔가요?”

“꼭 마도 공학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는데…….”

아리스가 말끝을 흐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저는 앞으로 돈이나 쓰면서 놀고먹고 싶거든요. 그동안 한 고생에 대한 보상이려나요.”

원초적인 본능에 충실한 고백에 쿤둘렌이 그를 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렇다고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놀고먹으면 영 그림이 이상할 것 같아서요. 사람이 소속감이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더라고요.”

아리스는 아무것도 안 하고 허송세월한 경험이 있지만 그게 마냥 좋았다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말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짐이었다. 텅 빈 껍데기처럼, 무언가를 쏟아 내어도 채워지지 않는 금이 간 그릇처럼, 그저 살아만 있었을 뿐 제대로 된 삶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조차 없는 비참함에 잠식된 시간이었다.

그러다 라슈발렌에 들어와서 무리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동료를 만들고, 유대감을 쌓은 경험은 그에게 제법 인상 깊게 남았다. 그것은 반란군에 있을 때와는 다른 경험이었다.

당시의 그는 자기편의 사람들에게조차 동료라는 개념을 두지 않고 거의 병기로서 움직였으니 말이다. 아랫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갈 여유가 없어서 항상 겉돌았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당시에는 아무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고 혼자 있고 싶었다. 그야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잠시 클라인에서 평화로운 한때를 보냈던 시절에도 주변 사람들은 아리스와 가깝게 지내는 것보다는 경외심을 품은 채 대했다. 그러한 거리감이 생긴 이유 정도는 아리스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아리스는 그러한 시선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감내하는 쪽을 택했다. 그에게는 엄연히 죄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클라인이 그 지경이 되었을 때 류가를 제외한 다른 세력들은 아리스에게 전부 돌아서 버렸다. 그 경험에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당시 어렸던 아리스는 어떡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혼자서도 살 수는 있지만, 타인과 교류를 하는 쪽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쿤둘렌의 따듯한 갈색 눈동자가 아리스를 응시했다.

“많이 성장했군요.”

“아니, 제 나이가 25살인데 성장했다는 표현 말고 다른 말을 해 주면 안 되나요?”

어린애 같은 취급을 받자니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니지요. 머리가 굳으면 성장도 못 하니까 말입니다. 젊은이의 특권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리스는 뚱한 얼굴로 자신의 눈앞에 놓인 쿠키를 이로 깨물어 먹었다.

바삭.

혀끝에 맴도는 맛이 달았다.

“어쨌든 제 생각에는 아리스 군이라면 마도 공학 쪽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다른 길도 물론 많겠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으니…….”

쿤둘렌이 여전히 학구열이 불타는 눈으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리스는 그 시선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워서 오히려 확답을 줄 수 없었다. 그는 최대한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제가 지금 농사라도 지으면서 사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거든요.”

아리스는 아직도 귀농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했다. 율비네가 들었다면 필시 비웃었을 테지만, 그는 마도 공학에 대해 생각해 본 것만큼 농사에 대해서도 나름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목장도 괜찮을 것 같고 말이다. 그러니 아리스는 여지만 남겨 두는 쪽으로 대답을 피했다.

“지금은 더 생각해 보고 결정은 나중에 알려 드리는 쪽으로…….”

쿤둘렌의 눈가가 실망감에 살짝 씰룩였지만, 아리스는 그것을 못 본 척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사실 마도 공학을 공부하는 것이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 확신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스는 당분간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자신이 미처 고려하지 않고 있었던 새로운 길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초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두근거렸다.

* * *

미레아는 사흘 만에 록산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이틀 만에 일을 해결하고 올 생각이었는데 사람 사는 일이 언제 그렇게 뜻대로 된 적이 있던가. 그래도 고작 하루가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늦지는 않아서 미레아는 가벼운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다 잠시 주춤했다. 3일 만에 본 집은 번쩍번쩍 광이 나고 있었다.

자신이 집을 잘못 찾아왔을 리는 없고 분명 자신의 집이 맞는데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어색한 시선으로 둘러보니 커튼도 새것처럼 깨끗했고 바닥은 미끄러질 정도로 반질거렸다. 싱크대는 어찌나 깨끗한지 거울로 써도 될 정도였다. 화장실과 욕실에서는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꽃향기가 나고 있었다.

아리스는 미레아 옆에서 신난 얼굴로 서성였지만, 그녀는 그에게 시선을 던져 주는 것보다 깨끗해진 집을 입 벌리고 구경하는 데 더 열중이었다.

“네게 집을 맡기고 외출했다 돌아오는 게 이젠 무섭구나. 어째 내가 못 볼 때마다 한둘씩 바뀌어 있냐? 다음에는 뭐야? 층을 하나 더 늘릴 거야? 아니면 수영장이라도 만들 거야?”

“그런 것들이 있었으면 좋겠어? 말만 해. 내가 해 볼게.”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아 미레아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정말로 필요해서 말한 게 아니고! 너 힘들었을까 봐 그렇지.”

아리스는 미레아를 기다리는 동안 파울로의 집에서는 하루 만에 쫓겨났고 쿤둘렌에게 찾아갔던 그날에 라일라에게 한번 얼굴을 내비쳤다. 쿤둘렌에게 그랬듯 마도 공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라일라의 격려를 받으며 헤어졌다.

그 이후엔 너무나도 할 일이 없던 탓에 리비엘로의 묘에도 잠시 다녀왔다. 리비엘로가 살아 있었다면 나는 시간 때우기용이냐며 한마디 했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일을 마치고 보니 그 이상 시간을 보낼 만한 마땅한 일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심신 수양을 하는 기분으로 집을 청소하는데 열을 올렸다. 전에 정원을 가꿔 주었을 때는 사람을 써서 자신은 기분만 내었지만, 이번에는 손수 양팔을 걷어붙이고 빗자루와 걸레를 들었다. 그런데도 시간이 빨리 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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