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24화 (224/257)

외전 3화.

“그래서 누가 그렇게 임무 일정을 짠 겁니까? 아니, 어떻게 임무에서 돌아온 다음 날 또 출장을 보내요? 너무 혹독하게 굴리는 거 아닌가요? 미레아도 쉴 때가 있어야지요.”

아리스가 탁자에 엎어져서는 불평불만을 내뱉으며 웅얼거렸다. 옆에서 오랜만에 꺼내 든 ‘폴 포르디’를 홀짝이던 파울로는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아리스가 록산까지 찾아온 것을 당사자가 집까지 찾아오고 나서야 알았지만, 기껏 휴일이라 쉬고 있던 파울로의 집에 다짜고짜 찾아와 미레아가 없다며 술이나 내놓으라고 한 아리스의 뻔뻔한 행태에 반가운 마음이 반감되었다.

그래도 한껏 관대함을 베풀어 술상을 차려 주었더니 술을 콸콸 마시며 자기 얘기만 하고 있었다. 아리스는 아침 일찍 나간 미레아를 그리워하며 낮을 보내다 밤이 되니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와 파울로의 집까지 온 것이었다.

“핑계하고는. 본심은 그런 게 아니잖아? 너는 단순히 미레아를 볼 수 없으니까 그렇게 불만 가득한 거 아니냐. 기껏 아껴 두었던 폴 포르디를 오랜만에 본 너를 위해 가져와 주었는데 할 말이 그것뿐이냐?! 나는 안중에도 없지?”

“네.”

“내 집에서 나가. 고얀 놈이랑 술 마시는 취미는 없다.”

“싫은데요.”

몇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뻔뻔한 얼굴에 파울로가 헛웃음을 들이켰다.

“참 좋을 때다, 좋을 때야.”

옆에서 안주를 축내고 있던 카스카디아가 혀를 끌끌 차며 한숨처럼 혼잣말했다. 하지만 아리스는 혼자 징징거리기 바빴다.

“그 좋을 때 상대방이 없는데, 뭐가 좋아요.”

“나랑 카디도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 잘 있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랑은 달리 미레아는 금방 돌아오잖아?”

“근데 나는 당신이 다른 지부에 있을 때도 저렇게까지 애틋한 적이 없어서…….”

“카디? 나만 당신이 보고 싶었던 거야?”

파울로가 억울하단 목소리로 아내에게 말했다. 카스카디아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 목소리로만 자신의 억울함을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다소 과장된 어투였다.

“내가 없을 때마다 다른 여자들에게 바람둥이처럼 구는데 보고 싶었겠냐?”

“그건 오해라고 옛날에 말했잖아?”

“그러니까 오해받을 만한 상황을 왜 만드냐고.”

어쩐지 아리스를 가운데에 끼고 부부싸움으로 번지려는 분위기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니까? 믿어 달라고. 뭘 어떻게 해야 내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거야?”

파울로가 양손을 모으고 애달프게 애원했다. 카스카디아는 술을 꿀떡꿀떡 삼키고 입가를 훔치며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증명이고 자시고, 일단 나도 당신을 그렇게 믿어 주니까 결혼까지 했겠지? 그렇게 징징 짜지 마. 지금 남편은 당신이니까.”

부부싸움이 아니고 염병으로 넘어갔다. 저 둘 벌써 취한 거야? 아리스는 그 광경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술잔이나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왜 파울로도 별다른 임무가 없는데 미레아만 연달아…….”

“나도 잘은 모르지만, 갑자기 라케드 님이 어제 갑자기 일정을 그렇게 잡던데.”

그 말에 아리스가 분개했다.

“복수했겠다?!”

아리스는 이건 복수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라케드가 자신을 방해한 복수가 분명했다!  미레아가 알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졌다며 억울해서 속이 터졌을 처사였다.

“어쨌든 아예 못 보는 것도 아니고 고작 며칠이잖아. 좀 기다려 봐. 햇수로는 대략 3년…… 정확하게는 2년 반 동안 잘 기다렸으면서 왜 그래?”

“2년 반이나 못 봤으니까 이러는 거잖아요. 지금까지 한껏 기대했는데 이런 박탈감만 느끼고…….”

“그런데 너 엄청 중요한 걸 간과하는 것 같은데.”

“뭔데요?”

“미레아가 네게 보냈던 관심이 그사이 사그라들었으면 어떡할래?”

그 말에 아리스는 술잔을 놓쳤고 눈도 보이지 않는 카스카디아가 재주도 좋게 그것을 받았다. 파울로의 말대로였다. 미레아가 2년 반이란 시간 동안 아무런 일이 없었을 리 없었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단 소리였다. 아리스는 그것을 애써 부정했다.

“하지만 어제 몸이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진 거냐고 물었을 땐 부정했거든요? 그리고 그동안 편지도 틈틈이 했고…….”

“너 같으면 거기서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지라고 했겠냐? 거기다 미레아는 그런 말을 잘하는 성격도 못 되잖아. 그러니 겉보기엔 그럴 수도 있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닐 수도…….”

“그러니까 그게 아닐 거라니까요.”

아리스의 반응에 재미가 들린 파울로가 낄낄거렸다.

“물어봐. 그럼 확실하잖아?”

“싫어요.”

이건 또 무슨 바람인가 싶어서 파울로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물어봐요.”

“부정적인 말이라도 들을까 봐?”

아리스는 조금 뜸을 들이다 말했다.

“……저도 염치란 게 있거든요.”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다짜고짜 집에 눌러앉은 건 염치 있는 행동이고? 어쨌든 파울로는 아리스가 한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반문했다.

“염치는 또 무슨 말이야? 네가 지금까지 염치 있게 행동한 것은 아니잖냐. 언제부터 그런 거 챙겼어?”

“아니, 그러니까 제가 그…….”

아리스는 손가락끼리 만지작거리며 적당한 표현을 생각했다.

“미레아가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부담스러울 게 뭐가 있는데?”

“제가 다 때려치우고 나오긴 했는데 아직도 가십거리로 소비하기 딱 좋은 위치인 데다 소문도 좋게 나지는 않아서…… 그런 게 미레아에겐 부담이 되지 않을까 하고요.”

“요컨대 미레아도 원치 않는 관심을 받는 위치가 될 수 있을 거다?”

“뭐, 그렇죠. 그런 식으로 주목받는 걸 반기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음…… 확실히 그건 문제가 있네.”

카스카디아가 땅콩을 우물거리며 한 말에 아리스가 울상 지었다. 파울로는 그런 아리스를 보고 한심하단 듯 물었다.

“그럼 대체 여기까지 뭐 하러 왔냐?”

“보고 싶으니까요?”

“그럼 그냥 보기만 하려고?”

“…….”

“그 집에 얹혀살면서 보기만 하고 다른 짓은 안 한다고? 정말?”

“…….”

아리스는 눈을 굴리며 대답을 잠시 보류했다. 그 반응에 파울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니까 네가 겨우 그 정도로 만족 할 수 있냔 말이야.”

“지금은 그 정도도 감지덕지죠. 비록 작은 것이지만 전 만족할래요.”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기 마련이다. 네가 미레아랑 정확히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잘 생각해 봐. 그런 것도 결론짓지 않고 무작정 찾아오면 어떡해?”

“으…… 그런 건 지금부터 생각해 보면 되잖아요?”

아리스는 술잔에 남아 있는 술을 쭉 들이켜고는 파울로에게 손을 까닥거렸다.

“담배 좀 빌려주세요.”

그 말에 파울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담뱃갑을 꺼냈다.

“너 담배도 피우냐?”

“좀 됐어요. 스트레스 받을 때만 펴요.”

아리스는 그동안 스트레스를 주구장창 받았었다. 담배를 매일매일 피웠다는 소리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입에 물자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담뱃갑을 꺼낸 김에 파울로와 카스카디아 역시 담배를 물었다. 비흡연자가 없는 자리이다 보니 셋은 눈치 보지 않고 뻑뻑 피워 댔다.

“너 담배 피우는 거 진짜 안 어울려.”

파울로의 평에 아리스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한번 보고는 혀를 쯧 찼다. 성격과는 조금 다르게 상당히 산뜻하게 생긴 자신의 인상과 담배는 그다지 어울리는 그림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끊을 생각이에요.”

“언제?”

“조만간……?”

아리스는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 대고는 턱을 괴었다.

“저는 그냥 미레아의 옆자리에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거면 된다고…….”

쭈욱 빨아 들여 순식간에 절반이 재가 된 담배를 손으로 옮겨 들고는 아리스는 다시 탁자 위에 이마를 쿵 박으며 엎드렸다.

“그 이상은 몰라. 생각 안 할래.”

카스카디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 때문에 미레아의 눈에서 피눈물 나면 그땐 우리 부부에게 죽는다고 생각해라.”

“그런 일 안 만들어요. 만들고 싶지도 않고.”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하지만 아리스는 미레아의 얼굴을 봤으니까 됐다며 물러날 녀석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게 가능했으면 무작정 재워 달라고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고 언제까지 있을 건지 정해 놓은 기간조차 어물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파울로도 카스카디아도 잘 알았다. 그러니 걱정이 될 수밖에. 둘이 그런 걱정을 하는 줄도 모르고 지금의 아리스에게는 그렇게 깊게 생각할 기운이 없었다. 한없는 기다림은 질렸으니 고작 며칠이라 해도 그 기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질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너 그럼 시간 빨리 가는 방법 알려 줄까?”

파울로의 말에 아리스가 상반신을 슬쩍 들었다.

“뭔데요?”

“쿤둘렌에게 가면 좋다고 반겨 주실걸? 쿤둘렌이랑 놀아. 그분도 내일은 일정이 없으실 테니.”

아리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기각.”

쿤둘렌이랑 대체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라는 소리인지…… 지난날의 수업 시간을 상상만 해도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아리스는 남은 담배를 마저 피우며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상당히 늦은 시간이 되어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밤에는 재워 주실 순 없어요? 우리 집까지 가기도 귀찮네.”

파울로와 카스카디아는 아리스가 뻔뻔하게 자고 가겠다는 것을 먼저 지적해야 할지, 미레아의 집을 자기 집이라도 된 양 부르는 것을 먼저 지적해야 할지 몰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스는 평소에는 취한 티도 내지 않았으나 오늘은 그저 속상한 마음에 진상을 부리고 있는 것이니 귀엽게 봐주고 넘어가기로 했다. 상심이 크다며 씻지도 않고 손님용 침대 위에 널브러진 아리스는 차라리 잠이라도 자서 긴 밤을 넘겨 버리자며 바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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