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23화 (223/257)

외전 2화.

그렇게 반나절 가량을 미레아의 집 앞에서 죽치고 있으니 미레아가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것은 행운이었다.

“저녁은 먹었니?”

“대충.”

거짓말이었다. 아리스는 미레아가 올 때까지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아 대충 미리 사 온 맛없는 빵 쪼가리나 몇 입 먹고 말았었다.

“대충 먹으면 어떡해. 차라도 마셔.”

미레아가 찻주전자를 불에 올리며 물었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어? 델루카에서부터 거리가 있는데 겨우 이틀 만에 도착했다고?”

“제일 이른 시간에 있는 비공정 타고, 기차도 타고. 그렇게 무리한 일정은 아니었어.”

아리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엄청난 강행군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짐도 최소한으로 챙기고 율비네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몰래 황궁에서 빠져나와 가짜 신분증으로 비공정을 타고 비공정에서 내리자마자 대륙 횡단 열차를 몇 시간 동안 타고…… 심지어 혹여나 추적이라도 붙었을까 봐 일부러 뱅뱅 돌아왔다. 그렇게 해서 어제저녁에 도착한 것이었다.

비록 그렇게 온 보람도 없이 미레아는 부재중이었지만, 한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사이 미레아가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며 라케드의 새벽잠을 깨우기는 했으니 말이다.

“집 앞에서는 뭘 하고 있던 거야?”

“너를 기다리고 있었지.”

아리스의 대답에 미레아는 기가 막혔다.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거기서 그러고 있었어?”

“그렇게 오래 기다린 건 아니야. 너 오기까지 기다린 건 한 시간밖에 안 됐어.”

또 거짓말. 그러는 동안 아리스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히죽 올라가는 입꼬리가 너무 티가 나지 않도록 내리누르도록 애써야 했다. 미레아는 주전자의 차 망에 찻잎을 넣고 아리스의 앞에도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찻물이 우러나오는 시간을 대충 재며 아리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안부를 물어 오는 미레아의 말에 아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별다른 일이라도 있었겠어? 그냥 바빴지.”

“그래도 특별한 일이라든가.”

“특별하다고까지 할 일은 정말 없었는데…… 나는 제법 따분한 삶을 살았으니까 네 이야기나 해 봐. 너야말로 어떻게 지냈어?”

그 말에 미레아도 비슷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나도 별다른 일은 없었어.”

그러곤 둘 사이에 가벼운 정적이 흘렀다. 아리스는 초조함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침묵이 숨이 막히게만 느껴졌다.

예전에는 어떻게 미레아를 대했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2년이라는 세월은 가까웠던 친우 사이마저 서먹하게 만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 그런가. 우리의 관계는 친우라 그런 것이었나.

아리스는 작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에 자신의 무언가가 뚝 하고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점점 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졌다. 아리스는 입안으로 말을 고르고 고르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간이처럼 정면만 주시했다.

“예전엔 좀 더 수다스러웠던 것 같았는데.”

침묵을 깬 것은 한탄조로 말하는 미레아의 목소리였다.

“너 원래 말이 많잖아.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아리스가 피식 웃으며 미레아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봐서 좋네.”

“나도 그래.”

“마지막 기억보다 조금 변한 것 같기도 하고.”

“어디가?”

“더 예뻐졌어.”

아리스의 진심 어린 대답에 미레아의 얼굴이 천천히 달아올랐다. 그녀는 적당한 말을 고르다가 결국 폭소했다.

“아하하, 그래. 고마워.”

뭐가 그렇게도 웃기는지 얼굴은 빨개지고 눈물까지 글썽이는 꼴을 보아하니 아리스는 점점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재밌어?”

“으하하, 미안해. 난 그냥 좀…….”

아리스가 입을 삐죽거리자 미레아는 히죽거리며 숨을 골랐다.

“다행이다 싶어서.”

미레아가 바람 소리에 묻어가듯 중얼거렸다.

“뭐가?”

“넌 정말 하나도 안 변했네. 그런 부끄러운 소리 하는 것도 여전하고.”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데, 나는 부끄러운 소리를 잘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부끄러운 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하는 거야.”

“아, 예. 그러시군요.”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둘의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다.

“잘 곳은 있어?”

그 질문에 아리스는 눈을 끔벅거리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여기서 자면 되는데 굳이 다른 숙소를 잡아야 해?”

“이보세요. 그 계획에 대한 집주인의 허락은 받았습니까?”

미레아가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탁탁 때리면서 삐딱하게 딴지를 걸었다. 아리스는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내쫓을 거야?”

당연히 미레아는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도 뭔가 석연치 않아 하는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자 그는 찻주전자에서 잔에 차를 따르며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나 지금 딱히 돈도 없어.”

— 야, 이 사기꾼아.

아리스의 머릿속에서 페니드란이 속삭였다. 조용히 해라, 페니드란…….

아까부터 거짓말만 줄줄 나왔다. 황실에서 나올 때 재산을 거나하게 챙기고 나왔으면서 말이다. 따지고 보면 소시민 평민들 기준으로 거나하게였지 다른 황실 일원들 기준으로는 소박한 재산이었지만.

“밥도 제대로 못 먹어, 잘 곳도 없고, 돈도 없고…… 어쩌자고 여기까지 왔어?”

미레아가 딱하단 듯 혀를 끌끌 찼다.

“여기 와서 라케드 님은 봤어? 너 황태자 때려치우려면 이것저것 얽힌 이해관계들 다 정리해야 하잖아. 그게 네가 혼자 하겠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벨로아 회장이나 라케드 님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네 거처 정도는 그쪽에서 마련할 수 있을 테고. 뭐라셔?”

“그렇지 않아도 찾아갔다가 쫓겨났는데.”

“……무슨 짓을 한 거야.”

자신이 왜 쫓겨났는지 알면 한 소리 들을 게 뻔하다 보니 아리스는 어깨를 으쓱여 보았을 뿐 말을 아꼈다. 그것을 무슨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미레아가 불안한 눈으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너 정말로 문제없는 거 맞지? 무슨 큰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괜찮아.”

아리스는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에게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레아를 만나는 것에 방해받지 못하도록 해야 할 일은 전부 처리하고 왔고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미레아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인제 와서 새삼스럽게 너를 내쫓을 생각은 없으니까 얼마든지 묵어. 네가 쓰던 방 깨끗하게 치워 놨어. 거기가 아니면 빈 방 중에 하나 골라잡아도 되고.”

“전에 쓰던 거면 충분해.”

그제야 미레아가 조금 안도한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리스는 편안한 자세로 턱을 받히고 앉아 미레아가 쫑알쫑알 말하는 것을 들으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거리며 호응해 주었다. 마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미레아가 말하는 대화의 반쯤은 걸러 듣기 바빴다.

아, 예쁘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귀엽고 예쁘게 생겼을까. 저 귀여운 입으로 재잘거리면서 말도 잘한다. 말할 때마다 생기 넘치게 반짝이는 두 눈은 또 어떻던가. 사람이 이렇게 필요 이상으로 귀여워도 되는 것일까? 이런 건 나 혼자만 보고 싶은데.

속으로 그런 생각만 하느라고 아리스가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놓친 사이 미레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너 괜찮겠어?”

“어, 어? 괜찮지. 물론.”

“하지만 내일 바로인데…….”

무엇이 내일 바로라는 것일까. 미레아가 한 말을 건성으로 들은 덕에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알지 못한 아리스는 대충 들었다는 티를 내지 않으면서 은근슬쩍 물었다.

“내일 바로여도 괜찮지. 그냥 내가 뭘 하면 되는지만 얘기해 줘.”

“아니, 뭐 할 거는 없고…… 내가 없어도 집 잘 지키고 있어.”

“……뭐?”

“아마 길지는 않을 거야. 짧으면 이틀, 길면 삼사 일? 그래도 최대한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해 볼게. 그러니까 혼자 조금만 버텨 봐.”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말이다. 지금 미레아는 당장 내일부터 며칠간 집을 비우겠다는 소리였다. 안 괜찮았다. 아리스는 정말로 괜찮지 않았다! 겨우 다시 만났는데 며칠 또 못 본다고?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하란 말이다. 아리스는 황급하게 미레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거 나도 같이 가면 안 되나?”

미레아가 아리스를 미친놈처럼 보았다.

“임무에 부외자인 너를 데리고 가서 뭐 하게? 아는 놈이 왜 그래?”

“아니이…….”

고작 하루 만에 이러는 법이 어디 있냐는 말이다! 아리스는 정말 보비네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마치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드러누워서 떼라고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돈은 좀 두고 갈게. 필요한 건 사서 먹고. 온 김에 파울로나 라일라, 쿤둘렌한테 인사라도 좀 하고 있어.”

그러더니 마지막 잔을 따르며 아리스에게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곤하겠다. 천천히 그거 마시고 씻어. 나 먼저 금방 씻고 올게.”

아리스는 오랜만에 만났으니 밤늦게까지 놀아 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 사람에게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어 보였다.

미레아가 욕실을 쓰는 사이 아리스는 남은 차를 다 마시면 이 하루가 정말 아쉽게도 끝날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였다. 페니드란이 저 얼굴 꼴 좀 보라며 깔깔거리고 있는 동안 미레아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몸으로 나와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그녀는 눈빛으로 아리스에게 빨리 씻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리스는 미레아가 하품하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찻잔을 비우고 일어났다. 마지못해 아리스가 씻고 나오자 미레아는 어느새 자기 방에서 곯아떨어져 있었다.

아리스는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