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22화 (외전) (222/257)

외전 1화.

첫 번째 외전. 마음과 마음이 부딪히는 자리

며칠간의 해외 출장을 마치고 록산으로 돌아온 미레아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안락한 집이었지만 혼자 살기 때문에 조금은 외롭고 쓸쓸한 그곳으로 말이다.

어차피 집에서 그녀를 기다려 주는 사람은 없었고 가 봤자 밀린 집안일을 빼면 크게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서로의 집을 드나들 정도로 가장 친하고 가까웠던 사람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된 지 오래였기 때문에 최근 들어 혼자 있다는 것에 대해서 더 감성적으로 되었다.

그렇다고 파울로와 카디의 집에 눌러앉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쪽도 나름대로 오붓하게 지낼 시간 정도는 있어야지.

정신적 소모가 크다 보니 직장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귈 여력도 없었다. 거기에 하는 일이 워낙 위험하여 서로 언젠가는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처지라는 것이 동료 몇을 잃고 나니 실감이 났다. 미레아는 지금의 동료들에게 유대감은 있어도 그 이상 거리를 가깝게 할 의욕은 솟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은 정원을 가꿔 보고 있었다. 몇 년 전에 드디어 정원다운 꼴을 갖춘 그곳은 미레아가 정성스럽게 가꿔 온 덕에 언제나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슬슬 날이 풀렸으니 올해는 꽃나무를 몇 그루 더 심어 볼 계획이었다. 이 나무들은 몇 년이 지나도, 몇 십 년이 지나도 꺾이지 않을 고목이 될 때까지 자라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자신과 자신을 기억하는 자들까지 이 세상에 없게 되더라도 내가 있었다는 흔적 정도는 남길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정원이 더 애틋했다.

미레아가 지친 몸을 이끌고 트램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을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대문 앞에 누군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노숙자나 거지인 줄 알고 남의 집 앞에서 뭐 하는 짓이냐며 한 소리라도 하면서 쫓아내려 했다.

그런데 거리가 가까워지자 생각보다 그 사람의 차림이 생각보다 멀끔한 것이 보였다. 그리고 느슨하게 묶은 검고 긴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미레아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바닥에 내려놓은 커다란 짐 가방에 살짝 기대어 있던 상대방이 인기척에 눈을 비비며 머리를 들었다. 아무래도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동안 잠시 졸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미레아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 역시 상대방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지도록 웃었다. 미레아는 점점 걸음이 빨라지다 결국엔 달려갔다.

“아리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양팔을 벌린 상대방의 품 안으로 그대로 뛰어 들어가자 둘은 부둥켜안은 상태로 잠시 휘청였다.

“뭐야? 깜짝 놀랐잖아! 갑자기 여긴 웬일이야? 어떻게 왔어?”

미레아의 쏟아지는 질문에 아리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반문했다.

“뉴스도 안 보고 살아?”

“무슨 뉴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한 미레아를 보고 아리스는 실망했다는 투로 말했다.

“얘가 진짜 뉴스도 안 보고 사나 보네.”

“나는 출장 갔다가 방금 돌아온 건데 뉴스 볼 시간이 어디 있어?”

미레아의 변명에 아리스는 조금 삐진 티를 내었다.

“아니, 내가 황실 폐지하고 공식적인 업무는 그제부로 다 정리하고 왔다는 내용은 해외 토픽으로 전 세계에 기사가 났거든?”

그 말에 미레아는 잠시 입을 벌리고 생각을 하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게 그제였구나.”

그러고 보니 아리스와 마지막으로 편지를 주고받았을 때 슬슬 업무를 마무리할 생각이라는 것을 전해 듣기는 했었다. 미레아는 머쓱하게 웃었다.

“야…… 몇 년 못 봤다고 내게서 관심도 멀어졌구나.”

“아니, 아니! 미안해. 정말 그럴 의도는 아니었고……! 말했잖아. 내가 요새 좀 바빴다니까?”

허둥지둥 변명을 내뱉는 미레아를 보고 아리스가 낮게 웃더니 그녀를 자신의 품에 가두듯 꽉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미레아는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 그것이 보이지 않게 일부러 아리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매우 어색한 동작으로 양팔을 그의 허리에 두르고 속삭이듯 말했다.

“……나도.”

끌어안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어쩌다 보니 떨어질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 못한 둘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내렸다.

그렇게 한동안 끌어안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정말 닭살 돋는다, 너네.

그 말에 둘은 화들짝 놀라 약속이라도 한 듯 황급히 떨어졌다. 미레아가 반사적으로 상대방의 가슴팍을 손으로 퍽 하는 소리가 나게 밀어 버린 바람에 아리스는 마른기침을 했다.

미레아가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아리스의 가방 안에서 누군가가 투덜거렸다.

— 내가 눈이 없어도 주변 상황을 다른 기운으로 다 느낄 수 있다는 걸 너희가 까먹었나 본데, 가방 안에서도 너희가 뭐 하는지 다 알 수 있거든?

“페니드란…….”

아리스가 분위기에 산통 깬 자신의 검에게 이를 갈며 낮게 읊조렸다. 미레아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

“페니드란도 가져왔네? 안녕, 페니드란?”

— 그래, 안녕! 오랜만이야, 미레아! 잘 있었던 모양이네!

“저놈을 나 아니면 누가 써.”

페니드란을 가지고 온 것은 아리스도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남이 손대기엔 너무 위험했고 라우노가 그랬던 것처럼 악용될 여지가 컸다. 페니드란은 이쯤에서 대중 앞에 모습을 감추는 것이 맞았다.

— 맞아. 쟤 아니면 나를 누가 써. 아리스 놈 아니면 검기가 맞는 미레아 너일 텐데 당연히 나도 가져와야지. 그래서 나는 언제 가방에서 꺼내 줄 거야?

“기다려 봐.”

감동의 재회를 하고 있는데 페니드란을 꺼내 들 새가 어디 있어?

아리스가 마음의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아리스의 머릿속에서 페니드란이 콧방귀 뀌는 소리가 들렸다. 미레아는 누가 뭐래도 국어책 읽는 듯한 뻣뻣한 어투로 허둥지둥 화제를 돌렸다.

“시간이 마, 많이 늦었네! 일단 들어가자! 피곤하지는 않아?”

“그렇게 피곤하지는…….”

아리스는 뒷말을 얼버무리다 말고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피곤한 것 같기도.”

미레아는 여전히 여유 없는 태도로 열쇠를 주섬주섬 꺼내 대문을 열었다. 아리스는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정원의 모습보다 한결 더 나뭇잎이 우거진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가 정원을 처음 다듬어 주었을 때보다 꽃과 나무들이 한층 더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미레아는 정말로 착실하게도 3개월 주기로 정원의 사진을 보내 주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나마 보던 풍경을 실제로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이제 막 여름으로 넘어가려는 계절이다 보니 꽃내음과 싱그러운 풀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미레아는 아직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아리스에게 말도 걸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앞섰다. 괜히 끌어안았다. 그것이 자꾸 의식되었다.

한편 아리스는 앞서 걷는 미레아의 손을 바라보며 잡을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애석하게도 벌써 현관문 앞이었다. 쓸데없이 고민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냥 저지르고 볼걸. 어차피 이제 거리낄 만한 방해물은 없지 않나?

아리스의 마음속 생각을 미레아가 들을 수 있었다면 대체 무엇을 하려고 방해물 타령을 하는지 물었을 것이다. 아리스 역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새삼스러웠다.

무엇을 하긴. 이제 직진할 일만 남았는데.

아리스는 이제야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를 얽매고 있던 규칙이나 구속 같은 것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여신의 신탁? 황위 계승 서열 1위? 그런 거 다 알게 뭐람. 이젠 상관없는 일인데.

그런 연유로 아리스는 공식 업무가 끝나자마자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목적지도 알리지 않고 신분을 전부 지우고 튀었다.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보다 록산에 숨어 있는 쪽이 더 안전했다. 세진 지역은 아리스의 외가로 너무 잘 알려졌고,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갈 만한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록산은 라슈발렌의 입김이 직접적으로 닿는 곳이니 아리스의 행방을 숨기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비록 라케드가 제발 귀찮게 굴지 말라며 일갈하겠지만 말이다. 사실 꼭 록산으로 와야 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뒤늦게 붙인 핑계야 많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가 이곳까지 온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아리스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지금 미레아와 라케드밖에 몰랐다. 심지어 라케드조차 불과 몇 시간 전에야 알았다.

아리스는 록산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미레아의 집으로 찾아왔는데 깊게 생각지도 않고 무작정 온지라 미레아가 출장에 가서 며칠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미처 고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잔뜩 울상이 되어서 기다리는 동안 라케드를 찾아갔다. 라케드를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는 다른 것도 아니고 미레아는 어디 있냐는 질문이었다.

라케드는 기가 막혔다. 그는 아리스가 찾아올 것이란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하고 있어서 그가 새롭게 쓸 신분과 거처, 그리고 앞으로 생활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들을 얼마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건 다 제쳐 두고 미레아부터 찾는다니. 뭐 이딴 놈을 위해 자신이 그러한 노력을 해야 했는지 회의감이 밀려왔다.

그런 아리스가 꼴사나워서 라케드는 새 신분증만 들려 주고 바로 쫓아내었다. 미레아가 언제 돌아오는지는 알려 주지도 않고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있을 숙소는 알아서 잡으라며 매정하게 뒤돌아 가 버렸다.

아리스는 괜히 다른 호텔에 있으면 미레아가 집에 오는 것을 바로 알 수 없으니 무작정 미레아의 집 앞에 죽치고 있는 쪽을 택했다.

아리스는 정말 멍청하게도 편지함에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기면 미레아가 그쪽으로 연락을 하거나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였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정말 단순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것이 비록 비효율적이었지만 어찌 보면 가장 확실하게 성공 할 수 있는 방법이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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