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그 말에 미레아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입이 헤벌쭉 벌어졌지만 입으로 나온 건 다소 부끄럼 섞인 말이었다.
“어우, 얘 좀 봐. 또 낯간지러운 말을 한다. 그런 건 어디에서 배웠어? 설마 파울로야?”
미레아는 아리스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리며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아리스는 자신이 한 말의 파급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문도 모르고 맞고 있었다.
“그럼 지금도 예뻐?”
“말했잖아. 넌 항상 예쁘다고.”
“이히히.”
미레아가 히죽거리며 웃었지만 아리스는 딱히 민망하지 않았다. 그는 호감의 표현에 있어서 박하지 않았고, 자신이 내린 평가를 입 밖으로 내는 것에 항상 당당했다. 만약 진이 옆에서 봤다면 쌍으로 정말 주책이 아닐 수 없다고 토하는 시늉을 했을 것이다.
미레아는 콧노래를 흥흥거리면서 아리스의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땋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기꺼이 자신의 머리를 내주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이 스치는 감각이 기분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피곤하다던 미레아는 어느새 초롱초롱한 눈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미레아는 그의 옆머리를 여러 줄로 만들어 조금 땋더니 나머지 머리카락들을 모아 하나로 묶어 주었다. 거울을 들여다본 아리스는 그게 마음에 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사실 미레아가 해 주는 건 다 좋았다. 일부러 예쁘다고 한 대로 기르고 있었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매트리스 위를 굴러다니는 것에 질린 미레아는 그녀에게 주어진 휴일을 충실하게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정원 나무와 테라스 기둥에 해먹을 걸고 그 위에 몸을 뉘었다. 바람이 훑고 지나간 나뭇잎을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고 멀리서 뱃고동 소리와 파도 소리가 이곳까지 밀려 들어왔다.
아리스는 미레아의 곁에서 지나가던 길고양이를 붙잡고 나뭇가지로 놀아 주고 있었다. 미레아는 조용히 눈을 감고 이 모든 것들을 즐겼다.
“있잖아, 다음 달이면 너희 아버지와 우리 식구들 기일인데 어떡할래?”
“아.”
미레아가 해먹을 흔들거리며 한 말에 아리스가 짧은 탄식을 했다.
“……잊고 있었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투의 질책에 아리스는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되었나 해서…….”
아리스는 3년 전, 클라인의 대공저 인근에서 백골이 되어 버린 케이드와 마라피네스의 시신을 수습해 각자의 가족묘에 안치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 주었다. 덕분에 케이드의 유골은 록산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문제는 마라피네스의 묘는 루아드의 영토가 아닌, 아이나 대륙의 마이련에 있는 아리스의 외가에 있는지라 성묘라도 갈라치면 바다를 건너는 대장정을 거쳐야 했다. 미레아가 한 달이나 남았는데 미리 물어본 이유는 이것이었다.
“나야 우리 식구들 묘는 가까우니 괜찮지만 너는 이참에 성묘라도 다녀오는 게 어때? 지금까지는 바빠서 너희 아버지 묘에도 제대로 가 보지 못했을 거 아니야.”
“음…… 그렇긴 한데 어쩔까.”
아리스는 마이련까지 왕복하는 최단 시간을 계산하였다. 부모님을 귀찮아서 내팽개치려는 것이 아니라 미레아와 오래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속셈을 알아차린 미레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물었다.
“마이련까지 같이 가 줄까?”
“정말?”
아리스가 반색하자 미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식구들 묘는 가까우니까 언제 가도 상관없지, 뭐. 이참에 나도 여행 다녀온다는 기분으로 가면 되고.”
“나는 그럼 좋지.”
아리스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외가가 있는 세진은 산악 지대라 여기랑은 완전히 정반대인 곳인데 분명히 너도 좋아할 거야. 다음 달이면 세진은 늦가을에서 초겨울 정도 되는 날씨라 좀 춥긴 하겠지만, 온천도 있고…… 같이 이것저것 구경하러 다니면 재미있겠다. 외숙들은 너도 이미 얼굴을 봐서 알고 있겠지만 다른 외가 식구들도 소개해 줄게! 아, 우리 외할아버지도 되게 재미있으신 분이거든. 아마 너라면 두 팔 벌려 반겨 주실 거야. 그리고…….”
신이 나서 이것저것 떠들어 대는 아리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레아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혼자 주절주절 말하다 아직 한 달도 더 넘게 남았는데 비공정 표부터 구하고 오겠다는 아리스를 불러다 다시 앉혀 놓은 미레아는 해먹에 느른하게 기대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전에 신세를 졌던 사람들에게 연락이라도 돌리는 게 어때? 네가 루아드에서 2년 반 동안 시달리다 온 걸 알고 있어서 지난 2개월 동안 잠자코 있었는데 근황 정도는 알려도 되잖아.”
“내 근황? 누구에게?”
무심한 말에 미레아가 아리스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많잖아! 하다못해 글로리아 씨라든가 발록 대령님이라든가…….”
“너 글로리아 씨랑 연락도 해?”
뜻밖이라는 아리스의 말에 미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게, 같은 서리 여신의 조각이었던지라 내적 친밀감이란 게 있었달까. 그래 봤자 잊을 만할 때쯤 편지 한 통씩 보내는 게 전부지만. 네가 추진한 클라인 복구 지원 정책 덕분에 처지가 많이 좋아진 모양이더라고. 네게도 고맙다고 전해 달래.”
“그랬구나…….”
아리스가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스는 아직도 글로리아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굳이 제가 먼저 연락을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미레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여간, 친화력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그건 그렇고 발록 대령과는 비교적 최근까지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있어. 지금까지 마수에게 입은 피해와 오염 및 부식이 진행된 지역의 복구 사업 때문에 여러 이야기가 오갔었거든.”
대마수 부대인 텔라인은 마수가 없어지면서 조직의 존재 의의를 상실했다. 하지만 그 많은 부대원이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어 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100년 동안 마수가 남기고 간 피해들을 조사하고 피해 지역의 수복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마수들이 할퀴고 간 흔적들은 전 세계 여기저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바빴다.
“그러고 보니 라케드 님도 그 건 때문에 아직도 속을 썩고 있나 보던데.”
라케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아리스는 이해가 되지 않는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라케드 님은 왜 굳이 벨로아 회장의 옆에서 그 고생을 하나 모르겠네. 장로씩이나 되는 용이…….”
“뭐, 용들의 존재 의의 때문인 것 같더라고.”
라케드의 말에 따르면 용들이 마수로부터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 낸 인공 생명체인 이상 마수가 없어진 세상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3,000년 전, 미봉책으로 마수를 아공간에 봉인했을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야말로 마수들은 완전히 라슈온에서 사라졌다. 용들의 비밀을 지켜 오던 장로들은 현세대 용들이 오로지 싸움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닌, 다른 인간들과 오빈들처럼 하나의 인격체로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애를 쓰는 중이었다.
마수들이 사라지고 보비네가 깨어나면서 데르카이드 역시 사라졌다. 서리 여신의 조율 아래 제어되지 않았던 이상 영소들은 모든 원소의 흐름을 관장하는 보비네가 깨어나자 그의 법칙 아래 다른 영소들과 같은 성질의 것이 되었다.
데르카이드들은 평범한 인간이 되었고, 데르카이드 사냥이라는 말도 안 되는 행위 역시 중단되었다. 검은 날개를 가진 자 역시 사라졌으니 서리 여신의 예언이니 신탁이니 하는 것도 의미를 잃었다. 미레아와 아리스를 얽매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은 좋은 쪽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보다 아까 그 주제로 다시 돌아가자면.”
아리스는 자신이 흔드는 나뭇가지 끝에 달린 잎을 고양이가 앞발로 툭툭 치는 것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네가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 못 하겠다.”
그 말에 미레아가 미간을 좁혔다.
“네 돈으로 놀고먹으라고?”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래도 되는데.”
아리스가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으나 미레아는 혀를 쯧쯧 차며 대답했다.
“사람은 자고로 적당히 일을 해 줘야 자아실현이 되는 법이야. 그걸 굳이 이해까지 해야 알 수 있는 부분이야?”
“난 굳이 자아실현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데다 내가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한 부분은 다른 거야. 아니, 생각을 해 봐? 우리가 3년 전에 한 일이 뭐야? 이 세계를 구했잖아? 세계를 구한 영웅이라고.”
그 말에 미레아가 입을 헤 벌렸다.
“그게 그렇게 되나.”
“넌 거기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거야?”
“난 그냥 할 일 했다 싶었지.”
무심한 대답에 아리스는 어쩐지 자신이 치졸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껏 자신이 한 일에 생색내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하는 바람에 루아드 제국을 말아먹은 놈이라며 욕이란 욕은 다 고스란히 먹어야 했으니 말이다.
“우리야 할 일 했다 쳐도 우리가 아니었으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동의하지?”
“그렇긴 하겠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면죄부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단 말이지.”
“무슨 면죄부?”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는 권리? 우리는 연금 같은 거 안 나오나?”
“……너 지금 헛소리한다.”
“그래도 봐 봐. 내가 얼마나 억울하겠어?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신탁을 받아서 욕먹다가…… 뭐, 솔직히 종말 비슷한 걸 가져오긴 했지만 그게 나쁜 건 아니었잖아? 하지만 정말로 모두 멸망으로 몰아넣지 않고 우리는 이 세계를 구했어! 오히려 이 세계 사람들이 나한테 엎드려서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요컨대 아리스는 아직도 억울해하고 있었다. 뚱한 얼굴로 고양이의 눈앞에서 전투적으로 나뭇가지를 흔드는 아리스의 투정에 미레아는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진짜 영웅은 그런 것에 매이지 않는 법이야.”
“…….”
“너와 내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거야? 꼭 다른 사람들이 알아야겠어? 전 세계가 우리에 대해 알면 뭐가 바뀌기라도 해? 아, 물론 바뀌긴 하겠지. 그런데 그게 네가 원하는 쪽으로 바뀔까?”
“그건…… 아니지만.”
3년 전 그 사건 이후, 이 세계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마수가 사라졌고 평화란 것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갑자기 주어진 평화에 얼떨떨하였으나 기쁨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자 이번에는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하였다. 하지만 구체적인 진실을 알려 주는 이는 없었다. 세계를 구한 것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도, 그러한 것들을 한 이들이 누구인지 까지도 말이다.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이 세계를 구한 사람들에게로 쏠렸었으나 미레아도 그렇고 아리스도 그렇고 그걸 굳이 나서서 알려야 할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일을 누가 한 것인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사실은 대단히 고귀한 이유로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숨은 것이 아니었다.
미레아의 말대로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이 남들에 의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신들에게로 향할 관심이 귀찮고 피곤했으며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어린애 같은 투정을 하였으나 사실은 아리스도 알고 있었다. 아리스가 세계를 구한 영웅이라는 소리가 퍼지면 지금 같은 평온한 일상은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했다. 온 세계 사람들이 그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질지 안 봐도 뻔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억울한 건 억울한 것이다. 그도 한 인간인지라 작은 보상이라도 받고 싶다는 간사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로는 안 돼?”
그 말에 아리스가 해먹에서 허리를 굽히고 자신을 내려 보고 있는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미레아는 예쁘게 미소를 지으며 재차 물었다.
“그 덕에 나를 만났잖아. 그걸로는 부족해?”
하긴, 그런 일들이 없었다면 아리스와 미레아는 평생 만날 일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미레아가 그렇게 물으니 아리스는 할 말이 없긴 했다. 아리스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을 준다 해도 절대로 바꾸지 않을 단 하나의 존재. 그들이 만난 연유야 어찌 되었든 마치 기적처럼 내려와 자신을 구원해 준, 미레아 제인스터.
“뭐, 그거 하난…… 감사하긴 한데…….”
아리스가 말꼬리를 흐리며 마지못해 대답하자 미레아가 그의 정수리에 쪽하고 입술을 내리눌렀다. 아리스가 손을 들어 미레아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애정 표현을 더 해 주었으면 좋겠다 싶은 눈치였지만 미레아는 다시 해먹에 벌렁 누웠다.
“그래서, 연금 같은 건 기대하지 않는 대신 너는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게 돼? 뭘 하면서 살지 슬슬 생각해 볼 때가 되지 않았어?”
미레아의 말에 아리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분간은 조금 더 놀고 싶었는데…… 적당히 놀고 부족한 공부나 좀 할까나.”
“공부?”
뜻밖의 말에 미레아가 되물었다. 아리스는 어쩐지 초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쿤둘렌이 내게 마법을 가르치는 걸 포기하지 않았거든. 난 이제 데르카이드가 아닌데 말이야.”
“데르카이드가 아니어도 네 재능이 마음에 들었나 보지.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걸 보아하니 너도 쿤둘렌을 무시할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마법을 배운 다음엔 어떡할 거야?”
“그리고 라일라랑 같이 일할 것 같아.”
“라일라와? 무슨 일을 하는데? 너 설마 라슈발렌에 들어올 생각인 거야?”
뜻밖에 말에 미레아가 깜짝 놀라자 아리스는 나뭇가지로 데리고 놀아 주던 고양이를 보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것까지는 아니고. 마도 기구 개발에 관한 일인데 나한테 외주 형식으로 일감을 맡기기로 했어. 그 연장선으로 쿤둘렌에게 마법을 배우기로 한 거고.”
“너희 나 없는 사이에 그건 언제 또 정했니?”
“우리가 꼭 너를 껴야지만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랬구나…… 너도 나름 일할 생각이 있기는 했구나?”
미레아가 뜻밖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리스가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며 하하 웃었다.
“에이, 나도 언제까지 백수 노릇 할 수는 없지.”
사실 아리스는 정말로 일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미레아의 말에 양심이 조금 찔렸다. 그의 꿈은 돈 많은 백수였다. 연금 운운한 것도 그렇고 일전에 류진에게 백수 한량처럼 지내고 싶다고 한 말은 온전한 진심이었다.
다만 미레아는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일하는데 자신이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면 뭔가 한심해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라일라가 함께 일하지 않겠냐고 제안했을 때 그 정도라면 적당히 생색내면서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아리스는 이후, 생각보다 배로 밀려드는 일감 덕에 이 결정을 3개월도 못 가서 후회하게 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까운 훗날의 일. 지금의 아리스는 자신의 계획이 싫지만은 않았다.
“어쨌든 그래, 잘해 봐.”
격려해 주던 미레아는 아리스에게 웃으며 물었다.
“잘됐지?”
“뭐가?”
“하고 싶은 게 생겼잖아.”
그 말에 아리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아리스는 하고 싶은 것 따위가 없었다. 그래서 세계 멸망이라도 할 수 있으면 해 보이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였었다.
하지만 미레아를 만나고, 다른 이들을 사귀고, 내일이 기대되기 시작하자 며칠 뒤, 몇 달 뒤, 그리고 몇 년 뒤의 일까지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그렇게 먼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깨달은 아리스는 미레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다소 감사와 경의의 의미를 담아서.
“네 덕분이야.”
미레아가 쑥스러워하며 작게 웃자 아리스는 미레아가 누워 있는 해먹을 손으로 흔들었다.
“그것과 별개로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지만.”
“뭔데?”
미레아의 물음에 아리스가 대답 대신 양팔을 벌렸다. 미레아는 그것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피식 김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고는 해먹에서 내려와 아리스의 품으로 뛰어들 듯 안겼다. 그 반동에 아리스가 뒤로 넘어가며 둘은 함께 잔디밭 위로 쓰러졌지만, 흙과 잔디가 부드럽게 받쳐 준 덕분에 아프지는 않았다.
“아하하하!”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아리스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미레아는 아리스의 반응에 조금 어이없어하다가 이내 따라 웃었다.
“좋아?”
“응.”
“뭐가 좋은데?”
아리스의 가슴 위로 엎어진 미레아가 아리스의 볼을 쿡 찌르며 물어 왔다. 아리스는 미레아의 머리통을 꽉 끌어안아 자신의 품에 푹 기대 만들고 대답했다.
“지금 이 모든 것이.”
그렇게 대답한 오늘은 특별할 것 없는 평온한 하루였다. 보비네의 축복이 온 세상에 내려앉았다. 먼 하늘에선 짐승의 부드러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보비네가 깨어나며 함께 돌아온 신수들이 내는 소리였다. 라슈온의 사람들은 2년 반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존재들에 대해 익숙해진 상태였다.
미레아는 역시 이 세상이 좋았다. 서리 여신의 특이점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녀가 미레아에게 남긴 설계의 힘 역시 함께 사라졌다 해도 그 마음은 변치 않았다. 푸르른 하늘과 대지도, 상쾌한 바람과 물살도, 그 위를 살아가는 수많은 존재까지. 사랑스럽지 아니한 것은 없었다. 비록 이 세계는 좋은 부분만큼 좋지 않은 이면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아리스 역시 그런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 세계를 싫어하지는 않게 되었다. 처음 시작이야 어찌 되었든 미레아가 가르쳐 준 것이었고, 미레아가 보여 준 풍경이었다. 한때 증오스럽기까지 했던 이 세계는 추한 만큼 아름답다는 것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아리스는 이제 추한 이면보다는 아름다운 모습을 더 많이 보려고 노력했다. 살아가는 것이란 그런 것이었다. 적어도 아리스에게는 그러했다.
정원에서 노닥거리는 둘의 주변에 들어찬 행복의 밀도만큼 햇살이 내리쬐었다.
‘그들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이야기를 끝내기 좋은 날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