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미레아는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되냐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레아의 말대로였다. 아리스는 루아드 제국이 제국의 칭호를 버리고 공화정이 되는 그날 자신에게 지워진 모든 짐을 내려놓고 잠적했다.
말이 잠적이지 아리스가 한달음에 달려온 곳은 록산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미레아와 만났다. 약 3년 남짓, 정확하게는 2년 반이라는 세월 만에 조우한 그녀였다. 미레아는 그런 아리스를 반겨 주었고 예전에 그러했듯 그에게 방 한 칸을 내어 주었다. 그것이 구두로 합의된 일의 전부였다.
미레아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데, 그 반응에 슬슬 약이 오른 아리스가 울컥 한 소리했다.
“야, 너는 그냥 단순한 동거인이랑 그렇고 그런 짓까지 다 하고 살아?”
“글쎄,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실제로 남들을 보면 그런 관계가 없지는 않잖아?”
미레아는 일부러 유도신문을 펼쳤다. 오늘이야말로 아리스의 입에서 원하는 말을 들을 작정이었다. 미레아의 말대로 아리스는 자신과 미레아의 관계를 명확하게 정의 내린 적이 없었다. 미레아는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사는 것을 허락해 준 것도 처음에는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고 집에 남는 방도 많겠다…… 거두지 못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렇게 함께 지내다 보니 예뻐 보이고 뽀뽀하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래서 이러저러한 농밀한 짓거리도 했지만 어어 하는 순간 휘말린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짓궂게 아리스를 몰아붙였다.
“너는 그럼 우리 관계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응?”
“나는 우리가……!”
거기까지 말한 아리스의 말문이 턱 막혔다. 둘 사이를 설명할만한 적당한 수식어조차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웅얼거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네가 함께 있어 달라 그랬잖아.”
“내가 그랬던가?”
“나한테 떠나지 말아 달라 그랬잖아.”
“아, 그거? 내가 그런 말을 하긴 했는데 그래도 내가 싫증 나면 내쫓을 건데.”
“뭐?”
“네가 그래도 된다며. 내가 언제쯤 네게 질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소리를 했었다. 아리스는 록산에 온 후 미레아에게 조심스럽게 그녀의 옆에 있는 것에 대해 허락을 구했었다. 그 대신 눈앞에서 사라져 달라는 소리를 들으면 미련을 남기지 않고 떠나 주겠다고 말이다. 미레아의 뜻대로 하라고. 그 말을 미레아가 수락했고 덕분에 아리스는 이 집에 눌러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게 다였다.
미레아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의 관계는 딱 그 정도다, 이 소리지.”
“…….”
아리스가 보기 드물게 침묵하자 미레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것까지 자신이 등 떠밀어야 대답을 듣나 싶어서 미레아는 새초롬한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뭐, 아무 소리 않는 거 보니 아리스는 만족하고 있나 보네!”
갑자기 아리스 역시 침대 위를 올라오더니 미레아의 머리 옆으로 손을 짚어 자신의 몸 아래 가두었다. 미레아는 순진한 눈망울을 깜박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를 한 아리스가 미레아의 양 손목을 잡고 침대 위에 눌러서 결박했다.
“아니, 뭐 하는 거야?”
“아침부터 자극하지 말지?”
“엥.”
“피곤하다며?”
“뭐 하는 건데? 저리 비켜, 동거인.”
그 표현에 아리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얼 하냐니. 네가 그 말을 취소하게끔 할 수 있는 나쁜 생각을 수백 가지 정도 하는 중이다.”
“그게 무슨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구체적으로 대답을 들려줘야 알겠는데.”
“…….”
“그래야 말을 취소할지 말지 결정할 거 아니야.”
미레아의 재촉에도 입을 꾹 다문 아리스의 밑에서 그녀는 은근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말해 봐. 우리 사이가 뭐야?”
미레아는 이번에도 아리스가 대답을 피해버리면 조금 화낼 준비를 했다. 아리스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더니 미레아의 손목을 놔주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미레아는 그의 행동을 눈으로 좇으며 한숨을 쉬었다.
저거 봐, 또 도망치려고…….
하지만 아리스가 그녀의 손을 잡고 침대 위에서 일으켜 주자 미레아의 상념은 금방 깨졌다. 아리스는 침대 끝에 미레아를 앉히더니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리스는 몸을 일으켜 주느라 잡고 있던 미레아의 손을 놓는 대신 손깍지를 꼈다. 손가락끼리 부드럽게 얽혀 들었다. 그는 미레아의 다섯 손가락에 하나하나 입을 맞추고는 말간 눈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해.”
자기가 먼저 다 알고 있다는 듯 물어봤으면서 미레아는 얼굴을 붉혔다. 생각해 보니 아리스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것이 제법 오래되었던지라 심장 부근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너도 나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말이지.”
“내가 너를 사랑할 거라는 그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아리스는 얄밉게 깐죽거리는 미레아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하……. 원래는 이게 자다 깬 상태로 할 말이 아닌데.”
그럼 어떻던가. 자다 일어난 모습도 사랑스러우니 되었다. 아리스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또 자신의 머리를 헝클더니 제법 진지한 얼굴로 미레아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러니 저와 교제해 주시죠, 미레아 제인스터 양.”
아리스가 미레아의 손등에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그리고 한쪽 눈썹을 올리며 씩 웃는 얼굴로 미레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미레아가 거절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어도 사실은 내심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와, 그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 얄미워서 거절하고 싶은데…….”
미레아의 말에 아리스는 얼른 표정을 바꿔 유순해 보이는 얼굴을 했다. 그 반응에 그녀는 픽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로 퉁 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네. 오래 기다리기도 했고. 그러니까 나는…….”
미레아가 다른 말을 잇기도 전에 얼렁뚱땅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인 아리스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고는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하던 미레아의 입을 자신의 입술로 막아 버렸다.
미레아가 쿡쿡 웃으면서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걸 도발로 여겼는지 바로 혀가 그녀의 입안으로 침범했다. 서로 상체를 바싹 붙이고 입맞춤을 이어 갔다.
더운 숨을 공유하고 맞닿은 가슴에서는 두 심장이 천천히 서로 박동 수를 맞췄다. 뱃속이 간질거렸고 충만감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행위를 이어 나갈 때마다 머릿속에서는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지만 반대로 귓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입술이 떨어졌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쁜 숨으로 다시 입을 겹쳐 왔다. 아리스가 미레아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는 동안 그녀는 아리스의 목에 팔을 두르고 제 쪽으로 흘러내린 상대방의 검고 긴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손가락으로 장난을 쳤다.
“그나저나 너는 머리 안 잘라?”
다시 몸을 붙여 오려는 아리스를 손가락 하나로 밀어낸 미레아가 침대 위에서 몸을 핑그르르 굴리며 다리를 흔들거렸다. 미레아와 지내는 동안 아리스는 긴 머리를 어영부영 땋는 대신 깔끔하게 빗어서 하나로 묶거나 반 묶음을 하고 있었다. 미레아의 질문에 아리스는 자신의 긴 머리를 손가락으로 빙빙 꼬면서 길이를 가늠하였다.
“머리 자를까?”
“어…… 자르게?”
자기가 먼저 물었으면서 미레아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자르라는 소리야, 아니면 말라는 소리야?”
“아니…… 나는 다른 사람들은 보통 공석에 서면 머리를 짧게 자르던데 너는 그냥 기르고 있길래 궁금해서 물어봤어. 혹시 루아드에서는 그게 보통이야?”
아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보통은 네 말대로 머리를 짧게 치지.”
실제로 아리스는 주변에서 머리를 자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몇 번 받기도 했다. 율비네도 한 번쯤은 지나가는 말로 머리는 그대로 두실 거냐고 물었었다. 아리스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어깨를 으쓱이곤 미레아에게 대꾸했다.
“네가 이 머리가 예쁘다며.”
“내가?”
“응.”
“언제?”
“기억 안 나?”
일전에 미레아가 이 머리가 예쁘다고 했기 때문에 이전처럼 대충 땋는 대신 나름대로 빗질도 정성껏 하고 예쁜 끈으로 묶고 다니던 아리스였다. 그런데 정작 그런 말을 한 당사자는 기억을 못 하고 있었다.
“왜 전에…… 축제 때 있잖아.”
미레아는 열심히 기억을 되감아 보았다. 아리스가 축제라고 할 만한 일은 사르파니 축제 이외에는 없었다. 그러다 장식장 위에 나열된 사진을 지긋이 응시했다. 여러 액자 사이에 사르파니 축제 때 다 같이 찍은 단체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 속의 아리스는 지금처럼 반 묶음을 한 모습이었다. 미레아는 관자놀이까지 꾹꾹 누르며 기억을 떠올렸다.
“아! 기억났다!”
미레아가 손바닥을 짝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사르파니 축제 때 아리스가 엉성하게 땋은 머리가 마음에 안 들어 빗질을 벅벅 해 준 다음에 예쁘게 묶어 준 것이 사진 속의 모습이었다. 그게 벌써 3년쯤 전의 이야기라니 세월이 참 빨랐다.
“그런데 넌 그게 언제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그 말에 아리스는 조금 우쭐대었다.
“네가 한 말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어.”
“치…… 거짓말.”
“정말인데요, 내 아가씨. 말씀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고 있답니다.”
“말은 잘해요.”
내 아가씨라고 불리는 게 쑥스러운지 미레아는 볼을 긁적였다.
“머리는 네가 자르라면 자르고, 자르지 말라면 안 자르고.”
아리스는 머리카락에 대한 애착을 잃은 지 제법 오래되었다. 하지만 관성이란 것은 또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라 막상 자른다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이상하긴 했다. 미레아는 아리스의 머리카락을 갖고 손장난을 치면서 고개를 저었다.
“자르지 마.”
“그래?”
“사실 자른 모습도 궁금하긴 한데, 그래도 아깝잖아. 오래 길렀는데.”
“그런가.”
아리스가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미레아가 뒹굴뒹굴 굴러와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나는 네가 머리를 그냥 길게 풀어 놓은 것도 좋고, 낮게 묶은 것도 좋고, 높게 묶은 것도 좋고, 땋은 것도 다 좋은데…… 우리 인간적으로 깔끔하게 빗질은 하자.”
남이 들으면 머리라도 안 감는 줄 알겠다며 아리스가 투덜거렸다. 미레아를 의식해서 나름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이 상태였다. 그래도 이전에 홀로 머리를 관리하던 시기와 비교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까 그때 어땠어?”
당시를 추억하던 미레아가 돌연 질문을 던지자 아리스가 그녀를 응시했다.
“뭐가?”
“사르파니 축제 날 내가 옷 갈아입었었잖아.”
“그랬지.”
“그때 나 어땠어?”
미레아는 기대에 가득 차서는 아리스를 바라보았지만 아리스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내 평가라면…… 그때 들었잖아?”
그러니까 천의 재질이라든지, 자수의 상태라든지, 색감이라든지…… 하는 것들의 평가 말이다. 하지만 미레아는 그것 이외에 다른 대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이었다.
“그거 말고. 왜,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 보면 여자 주인공이 평소에 안 입던 예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을 때 남자 주인공이 새로운 모습을 보고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린다거나 하는 상황이 있잖아. 혹시 너도……?”
그렇게 설명한 미레아가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자 아리스는 당시를 짧게 회상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그랬는데.”
그 단호한 대답에 미레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러고는 자괴감 섞인 어투로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소설이나 영화는 현실이랑 다르니까…… 대체 얘한테 뭘 기대한 거람.”
미레아가 중얼거리고 있는데 아리스는 아직 끝나지 않은 말을 마저 했다.
“근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게, 넌 항상 예뻤잖아?”
그 말에 시선을 돌리고 있던 미레아가 다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음?”
“그러니 새롭게 두근거릴 필요가 없었지. 내가 제대로 동요한 건 너와 춤출 때였지만 단순히 외형만 놓고 보면…… 똑같이 예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