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19화 (219/257)

219화.

종장

때는 테나력 3014년 5월.

마이련의 세진 지역에는 대대로 무신 가문이었던 류가의 본채가 있었다. 세진은 몇 년 전에 마수로 인한 오염 때문에 사람들이 떠나 있었지만, 마수가 사라지고 나서는 그 땅 역시 회복하여 지역 주민들이 돌아와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류가의 가장 큰딸인 류진은 안뜰에서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해 꿰어 놓은 햇곶감이 제대로 건조되기도 전에 하나씩 날름날름 빼먹는 중이었다.

한 해 중 아이나 대륙의 상반기는 가을과 겨울이 지나고 하반기에는 봄과 여름이 지난다. 최근에 텔라인이 해체된 덕분에 돌아갈 일자리가 아예 없어진 진은 옆에 율비네를 앉혀 놓고 곶감을 연신 집어 먹으며 헛, 참, 허, 거참…… 이런 추임새를 집어넣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들어 봐라, 율비네야. 내가 아주 어이가 없어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단다. 내 사촌 동생 말이다. 아,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촌 동생이 아리스 그 녀석밖에 더 있겠니? 루데키아스 레민나 류 파니드라우 씨말이다. 마이련식 이름은 류현천이신 그분! 루아드 제국의 황위 계승 서열 1위 황태자셨던 그분!”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치고는 참으로 다양한 호칭이 흘러나왔다.

“그래, 그래, 그놈이 말이다, 지난 2년 반 동안 루아드 제국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잖니? 그러다 드디어 2개월 전에 루아드 제국에서 공화 정권으로 바뀌면서 요직에서 물러날 수 있었지. 그것은 네가 제일 잘 알겠지만…… 그래서 나는 마이련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었거든. 그야, 그놈 어머니와 다른 외가 식구들이 다 여기 있으니까. 네가 생각해도 그렇잖니?”

진은 말을 많이 하느라 건조해진 목을 수정과로 축이더니 다시 주절거렸다.

“그런데 고 얄미운 녀석이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쪼르르 달려간 곳이 다른 곳도 아니고 세로킨의 록산이더라? 참나, 그러면서 나에게는 뭐라고 그런지 아니? 외가에는 이제 더 신세 지기 미안해서 못 오겠단다. 아니, 혈연 사이에 그게 무어가 문제 된단 소리냐?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지던 사이였냐? 그래, 그건 그렇다 쳐. 그런데 록산에 누가 있냐? 아리스가 그렇게 오매불망 보고 싶어 하던 어여쁜 미레아 제인스터 씨께서 있지 않니? 우리에게는 그딴 변명을 던져 놓고 몸이 달아서 록산으로 달려갔다 이 말이다!”

말을 할수록 울분이 터지는지 손에 들렸던 곶감은 형체가 이지러져 있었다.

“하지만 미레아는 생판 남이 아니긴 해도 여자 혼자 사는 집이잖니. 그쪽에 신세를 지는 건 괜찮고, 우리는 아니고? 변명해도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이던가. 참나, 내가 그놈 하는 짓을 보면 기가 막혀요.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몇 년인데 가족은 내버려 두고 자기 여자나 싸고도는 꼴이 참으로 가관이지 않니. 아, 내가 미레아에게 유감이 있다는 소리는 아니야. 미레아는 좋은 녀석이고 아리스 그놈에게는 분에 차고 넘치는 상대잖니. 다만 아리스 그놈이 눈꼴시다는 거지. 참나, 허! 참나! 내가 연락이라도 자주 하면 뭐라고 안 하지. 소식마저 감감무소식인 게 말이나 되니? 적어도 뭐 하면서 살고 있는지 정도는 알려 줘도 되지 않겠니?!”

율비네는 아니꼬워하는 말을 구구절절 내뱉는 류진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묵묵히 고개를 끄덕끄덕하다 대꾸했다.

“저에게는 뭐라 하셨는지 아십니까? 할 일도 없는데 마이련에 가서 류은현 님을 모시라고 하더라고요? 네, 원래 제가 하던 일이 그건 맞습니다만 명백하게 귀찮다는 기색을 보이잖습니까? 아니, 저는 록산에 가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더니만요. 사실은 말이지요, 저 라슈발렌에서 스카우트 제의받았거든요. 기사 서임을 받은 경력이 있잖습니까. 현장직에서 근무를 오래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저보고 그런 거 하지 말고 마이련에 가는 게 어떠냐는 식으로 말을 넌지시 던지더라니까요? 누가 봐도 제가 록산에 있으면 자기 연애 사업에 훼방 놓을까 봐 쫓아내는 거잖아요!”

그때, 류견우가 지나가면서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 그는 과년한 딸이 방정치 못한 자세로 반쯤 누워 곶감을 훔쳐 먹는 것에 한마디 하려다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그 둘은 언제 혼인을 올린다니?”

그 말에 류진이 반쯤 비웃음을 섞어 피식 웃었다.

“혼인? 혼인이라 하셨어요? 아리스가 미레아에게 먼저 혼인 얘기를 꺼낼 일은 없을걸요? 그놈은 아직도 자격지심이 있어요. 특히 미레아에게요. 아무래도 평범하지 않은 신분이다 보니 부담 주고 싶지 않겠지요.”

“같이 사는 건 되고?”

“법으로 묶이는 것과 자유롭게 동거하는 것과는 다르잖아요.”

류견우가 떼이잉……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혼인도 안 한 젊은 남녀가…….”

“아버지, 그것도 말입니다. 아리스는 일전에 혼인도 하지 않은 젊은 남녀가 한 지붕 아래 단둘이 살면 큰일이 나는 줄 알던 녀석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세요! 그런 거 신경도 안 쓰잖습니까!”

류견우는 곶감을 훔쳐 먹고 있는 장성한 딸아이에게 잔소리를 몇 마디 해 주고는 물었다.

“그래서, 아리스는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는 들은 것이 있니?”

진이 입술을 댓 발 내밀고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몰러유. 전화 한 통, 편지 한 통 없지만 잘 살고 있겄쥬.”

* * *

류진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 시각, 아리스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아, 누가 내 욕이라도 하나? 갑자기 귀가 간지러워 죽겠네.”

세로킨은 마이련과는 두세 시간 정도 시차가 있어 그는 이제 막 늦은 아침을 준비하던 차였다. 완성된 식사를 그릇에 덜어 식탁에 내려놓고는 2층 침실로 올라갔다.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늦잠을 자는 침대 주인의 옆에 모로 누워서 허리께를 간질거렸다.

“일어나세요, 내 아가씨.”

그런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불린 미레아는 간지러움에 몸을 이리저리 뒤틀다가 아리스의 품으로 쏙 들어갔다. 아리스는 간지럼을 태우면서 괴롭히는 것을 그만두고 늘어진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그녀의 몸 냄새를 들이마셨다. 햇볕에 쬔 것 같은 향기가 났다. 미레아는 아리스의 품 안에서 꼬물꼬물할 뿐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식사해야지?”

아리스의 말에도 미레아는 잠결에 고개만 도리도리 저을 뿐이었다.

“너 어제도 식사 제대로 하지 않았을 거 아니야. 응? 내가 오믈렛 만들어 놨어.”

아리스는 미레아를 어르고 달래서 침대 헤드에 푹신한 베개와 쿠션으로 등받이를 만들어서 기대게 했다. 미레아는 머리를 꾸벅거리며 그대로 앉아 있다가 아리스가 쟁반에 식사를 이것저것 담아 오는 것을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레아는 포크를 쥐려 했지만, 아리스가 더 빨랐다. 그는 포크에 오믈렛을 올리고 입가에 미소를 잔뜩 담고는 말했다.

“아.”

미레아는 자신을 손발이 없는 사람 취급하는 아리스에게 한번 눈을 흘겨 주었다가 이내 입을 벌렸다. 아리스가 주는 것을 받아먹으며 미레아는 조금씩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피로가 가신 것은 아니었다.

“피곤해.”

미레아는 어제 막 원정 임무에서 밤늦게 돌아온 차였다. 그러니 피로가 쌓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믈렛을 다 먹고 다시 졸고 있는 미레아의 어깨를 조물조물하며 아리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레아 있잖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아리스가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자 미레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말해 봐.”

“라슈발렌 그만두면 안 돼?”

그 말에 반쯤 감겨 있던 미레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싫어.”

“그럼 하다못해 사무직으로 보직 변경을 한다거나……!”

“그것도 싫어.”

아리스가 애달프게 말했다.

“미레아, 너 어제도 잔뜩 지친 상태로 왔잖아. 그리고 그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너도 잘 알고. 그런데 계속하겠다고?”

“응.”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아서 그래!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임무에 불려 나가서 떠나기 전에는 유서를 쓰지! 그걸 보는 내 심경이 어떻겠어?!”

아리스의 말에 미레아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할 줄 아는 건 그거잖아. 먹고살려면 그거라도 해야지. 내 한 몸 건사하는 것은 그럭저럭하겠는데 너도 있고…….”

그 말에 아리스는 큰 충격에 빠졌다.

“지금 뭐라고?”

“아니, 두 사람이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벌이도 그만큼 좋은 일은 또 없잖아.”

미레아의 변명에 아리스가 벌컥 화를 내었고 그의 진노는 생각보다 깊었다.

“너 나를 뭐로 보는 거야?! 네가 왜 나를 먹여 살려?! 내가 너를 먹여 살리면 모를까……!”

그러다 아리스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너, 너 혹시…… 내가 지금 직업도 벌이도 딱히 없어서 그래?”

“아니, 꼭 그런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너 지금 백수잖아.”

그 말에 아리스는 아까보다 더 크게 골이 울렸다.

“너 지금 내가 돈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미레아가 대꾸하기도 전에 아리스는 쿵쾅거리면서 방을 나가 버렸다. 그러더니 이내 무언가를 들고 와서 미레아가 앉아 있는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작은 수첩 형태의 종이 묶음이었는데 표면에 은행 직인이 찍혀 있었다.

“이거 봐!”

미레아는 류현천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통장의 가장 마지막 줄에 적혀 있는 금액을 보고 눈을 비볐다. 통장에 찍혀 있는 숫자는 제법 길었다. 단시백천…… 숫자의 단위를 세 본 미레아가 경악한 눈으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나 돈 많아! 돈 많단 말이야! 이 정도면 10년 동안 은행 이자만으로 사치해도 돈이 남는단 말이야!”

아리스는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미레아에게 울분을 쏟아 내었다. 미레아가 자신을 무일푼 취급한 것이 제법 억울했나 보다. 미레아는 미레아대로 아리스의 전 재산을 보고 기함했다.

“내가 루아드 제국의 국고를 탕진해 가며 이런 저러한 일들을 잔뜩 벌여 놓기는 했지만, 황실이 폐지될 때 품위 유지비 명목으로 들고나온 재산이 적지는 않아! 사실 얼마 못 들고나오긴 했어도 일반인들에 비하면 많다고! 거기에 클라인에서의 일로 라슈발렌에서 들어온 돈도 그렇고 외가에서 내게 따로 물려준 재산도 있고! 그리고 사실은 나 록산 주변에 내 이름으로 된 땅도 있다? 얼마 전에 너 모르게 사 둔 거란 말이야! 그 땅에 소작농 구해서 농사지을 거야! 아주 넓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쪽에서 재산이 근근이 나올 예정이라고!”

열심히 자신의 재산을 어필하며 불로소득의 존재까지 알린 그는 미레아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런고로 네가 임무 나가면서 받는 위험수당 정도는 내게 푼돈이란 말이다!”

금수저 짜증 나. 미레아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해 버렸다. 자신은 생사를 오가며 돈을 벌 때 금수저 물고 태어난 상대방은 가만히 숨만 쉬어도 은행 이자가 쑥쑥 들어왔다. 어쩐지 짙은 패배감이 밀려왔다.

“아, 그래. 그렇구나. 하긴 우리 사이에 상대방을 먹여 살린다는 생각은 좀 너무 나가긴 했어. 둘 다 제 한 몸 건사할 수 있는 상태인데.”

그 말에 아리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 사이? 우리 사이가 뭔데?”

그 말에 미레아도 팔짱을 끼고 뭔가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글쎄…… 잘 모르겠어.”

“뭐?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리스는 아까보다도 더 크게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우리 사이를 모르겠다니?”

“아니, 그게…… 그러니까 우리가 뭐 무슨 사이가 되자 아니면 다른 관계가 되자고 구두로 합의 본 게…… 전혀 없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뭐, 그냥 그런 관계?”

미레아가 능청스러운 얼굴로 어깨까지 으쓱이며 별일 아니라는 어투로 말하자 아리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받아쳤다.

“그냥 그런 관계는 뭔데? 우리가 지금까지 손잡고, 뽀뽀하고, 키스하고, 같이 잤……! 아니, 이건 여기까지만…… 아무튼, 이런 짓들을 함께했는데 이게 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우리가 무슨 관계인데?”

미레아의 말에 이번에는 아리스가 대답하기를 머뭇거렸다. 그래서 미레아가 대신 상황을 말해 줬다.

“들어 봐. 너는 2달 전에,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에 들이닥쳐서 이 집에 눌러앉을 것을 통보했잖아. 나는 집주인으로서 허락했고. 그러니까…… 집주인과 동거인의 관계 아니겠어? 그 이상으로 치기엔 우리가 서로에게 고백 같은 걸 하고 교제를 하자고 딱히 정한 것도 없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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