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18화 (218/257)

218화.

아리스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크게 외쳤다.

“나는 사르파니 축제 때 네가 춤을 추는 모습에 완전히 홀렸거든! 네게 깊이 빠져들었단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단 말이야! 내가 단순히 서리 여신의 특이점에 영향받았기 때문에 너를 좋아하게 되었다면 그건 처음부터 그리했겠지! 하지만 아니야! 나는 그때 처음으로 미래를 그려 볼 수 있었고 네게 수많은 것들을 받았단 것을 깨달았어. 그러자 비로소 나의 마음이 보였어. 미레아, 나는 네가 해 준 그 많은 것들 덕분에 너를 좋아하게 된 거야. 이래도 내가 너를 서리 여신의 특이점이란 것 때문에 막연하게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은 누가 함부로 하지 못해. 온전히 나의 것이야!”

아리스의 확신에 찬 연설에도 불구하고 금색 실은 점점 색이 옅어지더니 이내 팟 하고 사라졌다.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안 돼…….”

그는 이미 사라진 금색 실을 찾으려는 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 안 돼. 미레아, 이런 식으로는 싫어…….”

아리스는 이제 반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는 지금 미레아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렇게는 안 돼, 이렇게는…… 미레아, 제발!”

아리스는 절규했지만, 여전히 그가 원하는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아리스가 금색 실과 연결되어 있었던 커다란 주먹을 억지로 풀기 위해 힘을 쓰는 동안 보비네마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머리로는 아무런 대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보비네의 앞에서 자신의 진심을 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렇게까지 초라한 사람이 자신이었다.

아, 나는 역시 대단한 것이 없는 사람이다.

한때는 세계의 존망이 그의 손에 있던 적이 있더랬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보아라. 사랑하는 여자 하나 설득해서 구할 수도 없었다.

무력감과 탈력감이 몸을 휘감았다. 거대한 슬픔이 아리스를 덮쳐 왔다. 기운을 잃은 아리스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아래로는 영소의 강이 있었다. 그곳에 몸을 맡기면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은 아리스의 몸을 무언가가 감싸 왔다. 따듯한 온기에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바보야.”

고작 하루 만에 듣는 목소리였지만 미치도록 그리웠던 사람이었다.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던 아리스의 몸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내가 뭐라고 목숨을 그렇게 막 쓰려 그래.”

마치 푸르른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것 같은 환하고 따듯한 빛이 아리스를 감싸고 익숙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너…… 정말…….”

미레아의 목소리는 무언가에 꽉 억눌린 것 같은 소리를 내었다. 이 미련한 놈은 대체 내 뭐가 좋다고 이러는지…….

아리스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굳어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아리스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가 웃는 건가 싶었는데 아리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꼴사납게 훌쩍이는 소리를 내지 않겠다며 울음을 꾹꾹 눌러 참는 모습이었지만 눈물샘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미레아는 아리스가 우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에 제법 당황스러웠다. 연녹색의 빛무리가 어쩔 줄을 모르고 깜박거렸다. 아리스는 말을 더듬거리며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빛무리를 바라보았다.

“나, 나는 네, 네게 내 말이 안, 들릴까 봐…… 너에게 닿지 않을까 봐…….”

“안 들릴…… 수가 없잖아. 그렇게 소리를 고래고래 치는데.”

미레아의 목소리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전부 내 진심, 인데 네가 미, 믿지 않을까 봐…….”

“솔직히 아직도 완전히 믿기진 않아.”

그 말에 아리스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 반응에 미레아의 목소리는 허겁지겁 말을 덧붙였다.

“내 말은 그러니까…… 나는 네가 나를 미워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너를 미워할 리 없잖아. 내가 어떻게 그래.”

아리스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그는 빛무리를 보며 말했다.

“나와 함께 돌아가지 않을래?”

빛무리는 아리스의 주변을 배회하며 흔들거렸다. 그녀는 아직도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아리스는 다시 초조해져서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에 미레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미워하지만 않으면 난 괜찮으니까…… 아니, 사실은 미워해도 상관없어. 난 그저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게다가 아까도 말했잖아.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아. 하지만 내 행복 속에 네가 없다면 무의미해.”

그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말했다.

“너를 사랑해.”

빛무리가 한동안 말이 없자 아리스는 초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말로 너를 사랑해. 내 마음이 어디에서 기원했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지금의 나는 네가 필요하단 것뿐이야.”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미레아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보비네가 손으로 빛무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자 빛무리는 그의 커다란 손안에 아까처럼 쏙 들어갔다. 아리스가 그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자의 혼의 정보는 여기 있으니 이제 육신 정보를 되돌리겠다.〕

그렇게 말하며 보비네는 빛무리를 거두어 갔다. 아리스가 무어라 말하려 하는 것을 가로막고 보비네가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라. 육신의 정보만 복원된다면 그녀가 돌아갈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곳이 어디인데요?”

〔자네가 더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더니 보비네는 눈 부신 빛을 내뿜었다.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영소의 흐름에 떠밀려 가다 어딘가로 튕겨 나왔다.

* * *

환한 빛을 정면으로 봐 버린 탓에 시력이 한동안 돌아오지 않아 눈을 찡그리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스!”

율비네였다. 아리스는 그제야 자신이 라일라의 작업실로 돌아온 것을 깨달았다. 허공에서 내팽개치듯 떨어진 바람에 온몸이 아팠다.

“정신이 들어? 어땠어?”

파울로가 아리스를 일으켜 주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리스는 경황이 없는 얼굴로 허겁지겁 일어났다. 서서히 시력이 돌아오자 그는 방을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무작정 달렸다.

미레아가 돌아갈 곳. 그런 곳이라면 한 군데밖에 없었다. 그녀의 공간이라고 할 만한 곳이 미레아의 집밖에 더 있겠는가.

라일라의 작업실에 왔던 대로 차를 타고 이동해도 좋으련만 아리스는 그저 달리고 싶었다. 게다가 자신의 검은 날개는 어째서인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니 두 발로 달리는 수밖에.

아리스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멈추지 않고 해안 도로를 따라 달렸다. 산소가 모자라 폐가 찢어지는 것 같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아리스는 자신이 비로소 현실에 있음을 실감했다. 고통스러운 만큼 기뻤다. 그에게 있어서 이 고통은 살아 있음의 증거였다.

그리고 보비네의 말을 믿는다면 아리스가 원하는 바는 틀림없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흥분해서 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아리스는 미레아의 집에 다다르자마자 대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쳤다. 뛰어오면서 미친 듯이 혈액을 펌프질하던 심장이었지만 지금은 그 이상으로 가슴을 때리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리스는 머리를 털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바닷바람에 숱이 많고 곱슬곱슬한 붉은 머리를 나부끼는 한 사람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팔랑거리는 치맛자락 아래로 보이는 맨발은 아침 이슬에 젖은 흙을 밟고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기척에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감람석 같은 눈동자가 록산의 바다색과 닮은 눈을 응시했다.

미레아는 과거 어떤 날 그랬던 것처럼 아리스를 보고 말했다.

“다녀왔어.”

아리스는 달려가 그녀를 껴안았다. 맞닿은 곳에서 따듯한 체온과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전해져 왔다. 아리스는 비로소 자신들의 생명이 충만한 것을 느끼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와.”

미레아가 작게 웃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리스 역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흔들의자 옆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두고 있던 페니드란과 세렌트가 잔뜩 흥분해서 무어라 외치고 있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미레아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나의 구원. 나의 구세주. 그리고 나의 사랑.

그 간질거리는 단어들의 나열에 미레아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맞춰 왔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먼저 입 맞추는 쪽은 미레아였지만 그 둘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미레아가 먼저 하지 않았어도 아리스가 저질러 버렸을 테니까. 아리스는 미레아의 허리를 바싹 끌어당기며 숨이 가빠 오도록 입술을 머금었다. 내면부터 기쁨이 충만하였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가며 운명을 따라가다 보니 함께 이 세계의 종말을 맞이했다. 서리 여신이 폐위되었고 아리스는 잠시나마 이 세계의 새로운 조율자로서 지금까지 그들이 알던 세계에 안녕을 고했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를 맞이한 이상 이제는 당분간 종말인가 뭔가 하는 말 따위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둘이 함께 살아갈 세계는 계속 평온할 것이었다. 그들이 그러도록 앞으로도 함께 만들 것이었다. 그들은 행복을 만들어 내는 힘이 있으니 말이다.

이것이 미레아 제인스터와 루데키아스 레민나 류 파니드라우가 종말의 끝에서 찾아낸 새로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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