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17화 (217/257)

217화.

“어째서인가요? 미레아가 죽음을 바라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자는 지금 망설이며 겁에 질려 있다.〕

보비네의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미레아가 겁에 질려 있다고? 아리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미레아는 아리스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용감했다. 어느 순간에서도 당당했으며 아무리 거대한 두려움이라 해도 이겨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모든 일이 다 정리된 마당에 겁에 질려 있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미레아가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한다는 소리입니까?”

보비네는 손을 들었다. 그의 집게손가락 끝이 아리스에게 향했다. 아리스는 푸른 눈을 깜박거리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저 말씀입니까?”

아리스 역시 자기 손가락을 자신을 가리키자 보비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리스는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을 했다.

“저는 미레아에게 그 어떤 해도 끼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맹세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를 두려워한다는 소리입니까?”

〔정확하게는 그대의 마음이다.〕

“네?”

보비네는 엄한 표정으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네 마음이 이 자를 상처 입히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당연하잖아요!”

아리스가 반발하듯 하는 말에 보비네가 고개를 저었다.

〔네 마음이 온전히 네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가.〕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서리 여신의 조각에 영향을 받은 부분이 온전한 너의 마음이라 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그 말에 아리스가 멈칫했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서리 여신의 조각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고작 전날에 알지 않았던가.

〔네 마음은 서리 여신의 조각이 끼친 영향으로 시작되었다. 미레아 제인스터란 인물은 서리 여신이 설계하여 네게 보낸 그녀의 파편이다.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로지 너를 위해 만들어 냈으며 네가 그녀에게 마음을 내주게 된 것은 숙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게 되도록 서리 여신이 만들었다.〕

보비네의 말에 아리스의 두 눈이 일순 흔들렸다. 보비네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미레아 제인스터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서리 여신의 조각으로 힘을 잃은 이상 네가 미레아 제인스터에게 마냥 호감의 감정을 보낼 이유는 이제 없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서리 여신의 조각이라 불린 여신의 특이점을 잃은 그녀에게 향한 네 마음은 정녕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온전한 너의 마음인가?〕

“제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것이 서리 여신의 특이점이 작용한 이야기라는 소리인가요?”

〔그렇다. 그것 이외에도 네가 미레아 제인스터에게 느낀 모든 감정 역시, 그리되도록 서리 여신이 의도한 것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아리스에게 보비네는 침착하게 인내심을 갖고 설명을 더 자세히 해 주었다.

〔네가 미레아 제인스터에게 막연하게 보낸 호감, 그리고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 동안 즐겁고 행복했던 것은 미레아 제인스터가 네게 쉽게 호감을 살 수 있도록 성격이 그리 만들어졌고, 외형이 그리 만들어졌고, 성질이 그리 만들어졌다.〕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보비네는 아리스의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없었다면 이 세계의 변칙, 그대는 미레아 제인스터에게 호감을 보이지 않았겠지. 지금 네가 품은 그러한 감정 역시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미레아가 두려워하는 것이…….”

〔그렇다. 미레아 제인스터는 그대가 그녀에게 보내는 그 감정이 거짓임을 깨달아 등을 돌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아리스는 멀뚱멀뚱 보비네를 올려다보다 이내 저도 모르게 핫, 하고 실소했다.

“뭐야 그게.”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한 손으로 얼굴을 쓸고는 양 눈을 덮었다. 그는 다시 허허하고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떨궜다.

“어이가 없네. 정말로…….”

보비네는 그런 아리스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한참을 땅을 보고 있던 아리스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보비네에게 연결된 금색 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미레아를 불러 주세요.”

〔그럴 수 없다. 이 세계의 변칙, 그대는…….〕

“아, 보비네 님이 신이건 뭐건 지금 나한테는 아무런 상관없으니까 미레아나 빨리 내놓으라고요! 얼굴 보고 직접 이야기하게!”

〔그녀가 거부하고 있다.〕

“답답하네!”

아리스는 나풀거리고 있는 실을 손으로 덥석 잡았다. 하지만 그건 잡는다고 잡히는 성질의 것이 아닌지 손을 쓱 통과할 뿐이었다. 그러자 아리스는 잔뜩 약이 오른 표정으로 실을 따라 성큼성큼 걸어갔다.

몸을 훌쩍 띄우자 보비네의 주먹 앞까지 어렵지 않게 닿을 수 있었다. 그는 인내심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라 보비네에게 취해야 하는 예의고 뭐고 다 때려치운 상태였다. 그리고는 실의 끝이 연결된 보비네의 주먹에 코끝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고래고래 외쳤다.

“미레아 제인스터! 너 빨리 안 나와?!”

하지만 보비네의 주먹과 연결된 실은 잠잠했다. 아리스는 미레아의 이름을 부르며 손으로 보비네의 커다란 주먹을 퍽퍽 때렸다. 그 무례를 보비네는 참아 주었다. 하지만 미레아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연결되어 있던 금색 실마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보비네의 상태는 신경 쓰지도 않고 반투명해진 금색 실을 붙잡고 애걸하였다.

“제발…… 미레아…….”

이대로 미레아를 잃을 수는 없었다. 다시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자신이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아리스의 손이 떨려 왔다. 그는 손에 얼굴을 묻은 상태로 중얼거렸다.

“미레아, 네가 이렇게 겁쟁이일 줄은 몰랐어. 내가 아는 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아리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았다. 지금 흥분해서 일을 그르치면 리비엘로가 간신이 이어 준 이 희망의 끈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그럴 수는 없었다.

“내 말을 들어 봐, 미레아. 네게 내 목소리가 닿을 거라 믿어.”

아리스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좋아.”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직접 내보이는 것은 처음인지라 고작 그런 고백에도 심장이 크게 뛰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말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오히려 한번 운을 떼니 속에 한가득 품고 있던 것들이 밀물처럼 우르르 터져 나왔다.

“네가 너무나도 좋아. 지금 이 순간에도 네가 그리워 미칠 것 같아. 너를 다시 한번 보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이것만큼은 내 진심이야.”

아리스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서리 여신의 조각이라 내가 네게 끌렸다는 건 일단 이해했어. 이유 없이 네게 심장이 뛰었던 그 감정이 설명되었어. 하지만 미레아. 난 화나지 않았어. 정말이야.”

미레아가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지만, 아리스는 말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내 감정이 거짓이라 그래도 추억만큼은, 기억만큼은 사실이잖아. 실존하잖아? 우리는 그것들을 함께 겪었잖아. 그걸로는 부족해?”

실제로 함께 몸을 부대끼고 지낸 것은 고작 4개월이었다. 하지만 아리스에게 그 4개월은 그의 22년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찬란했던 기간이었다. 미레아와 함께 있으면 세상이 빛나 보였다. 처음으로 내일도 모레도 그 이후의 시간도…… 다가올 하루하루가 기대되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비록, 그렇다 해도! 우리가 처음 만난 이후의 시간을 무의미하다고 말하지 마. 그런 슬픈 소리는 하지 말아 줘. 우리가 함께했던 그 4개월은 내게 너무나도 큰 가치가 있어. 그리고 너와 떨어져 있던 다른 3개월마저 나는 너무나도 특별한 하루하루를 보냈지. 왜냐하면, 전부 네가 만들어 준 내 자리였으니까. 그건 네가 서리 여신의 조각이어서가 아니야. 단순히 내가 너를 좋아해서도 아니야. 너에게 그런 감정이 없다 해도 네가 보여 준 것들은 잊지 못했을 거야. 왜냐하면, 미레아 너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라 해도 항상 빛나 보이는 사람이니까.”

그것을 없던 일로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쉽고 그 이상으로 슬펐다.

“미레아, 네가 나를 빛으로 이끌어 준 것은 사실이잖아. 그런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너는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 했지만, 이것도 분명 사랑의 한 형태야.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담담하게 제 생각을 읊던 아리스는 지금까지 불명확하고 자기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었던 부분이 점점 명확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신 있게 주장을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말이지, 이건 내 생각이지만 애초에 사랑이란 건…… 이유가 없어! 이유 따위 없단 말이야! 이유가 중요해?! 그냥 어쩌다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흔한 것은 왜겠어? 일순간의 끌림에 마음이 커져 버리는 게 논리적으로 설명이 돼? 나는 그런 일에는 논리 따위가 없다고 생각하거든. 사랑이란 그런 거잖아! 완전히 비합리적인 사고의 결과란 말이야. 그러니 그런 것보다는 사랑이란 감정이 싹텄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않아?”

그답게 다소 뻔뻔한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떼를 쓰는 것에 가까운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리스는 그것만큼은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네게 정말로 반한 그 순간이 언제인지 알 것 같아. 그것은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가 아니야. 물론 그 당시에 호감이란 감정이 있긴 했지만, 사랑이었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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