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16화 (216/257)

216화.

[미레아의 육신 상태만 되돌릴 수 있다면 영혼을 끌어오는 것도 가능해.]

[육신의 정보는 미레아의 특이점 안에 함께 있으니 너는 미레아의 특이점만 찾으면 돼. 이 추론기가 그것을 도와줄 거야.]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희망이 있었다. 미레아가 그토록 말하던 희망이. 이것은 죽는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았던 리비엘로가 이어 준 희망이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는 소매로 눈물을 벅벅 훔쳤다.

추론기는 마지막 문장을 작성하고는 잠시 침묵했다.

[함께 미레아를 구하자.]

아리스는 리비엘로가 옆에 없는데도 그 문장을 보고 중얼거렸다.

“응, 함께 가자.”

이 상황이 너무나도 기적같이 느껴져서 얼떨떨했다.

리비엘로는 이 모든 것을 예상했구나. 이것은 단순한 예지 능력이 아니었다. 그들의 앞길에 변수가 워낙 많아 단순한 예지로는 이렇게 정확한 결말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예지 능력에 더불어 그녀가 지닌 통찰력과 관찰력 그리고 상황 파악 능력이 끌어낸 결과였다. 리비엘로 역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았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리비엘로, 너는 죽어서도 미레아를 도우려고 하는구나. 알고 있어, 미레아? 네 친구는 정말 대단해.

아리스는 리비엘로에게 절대로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졌다. 하지만 리비엘로라면 웃으며 손을 내저을 게 뻔했다.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없다는 게 이렇게 아쉽고 슬플 수는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끌어안아 주고 싶은데 하늘이 리비엘로를 너무나도 빨리 데려가 버려 남는 건 아쉬움과 그리움뿐이었다. 아리스는 눈물을 훔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함께 미레아를 마중 나가자.

미레아 제인스터. 내가 숨어 버리면 항상 나를 찾으러 왔던 너. 내 손을 잡아 주던 너. 내가 걸어야 할 길을 앞장서서 같이 걸어 주던 너. 이제는 내가 너를 찾아낼 시간이다.

아리스가 눈물을 훔치자 추론기는 문장을 하나 더 찍어 냈다.

[준비되었니?]

리비엘로의 메시지에 아리스는 추론기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리비엘로가 그랬던 것처럼 마석이 장치된 부품을 안으로 밀어 넣고 찰칵 소리가 나도록 돌렸다. 추론기가 통통 튀는 스파크를 내뿜더니 거대한 빛의 길 같은 것이 나타났다.

길은 방 안을 가로지르며 나 있었고 벽에 막힌 부분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스는 그 길로 들어서기만 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끌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네 사람은 길과 서로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우리도 함께…….”

파울로의 말을 끊고 아리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 혼자 가겠어요. 저 앞은 영소의 흐름이 거세서 다른 사람들이 괜찮을지 모르겠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너를 혼자 보낼 수는 없어.”

“맞습니다. 적어도 제가 동행하는 건 어떤지요.”

라일라와 율비네의 만류에 아리스는 금색 실 같은 것이 빛의 흐름 사이로 너울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혼자가 아니야.”

그는 그것을 가리키며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리비엘로가 함께야.”

파울로와 라일라는 여전히 근심 가득한 얼굴이었으나 아리스는 그 누구보다 밝은 표정이었다.

“그러니 다녀올게요.”

아리스는 금색 실을 따라 빛의 길에 몸을 던졌다.

* * *

영소의 유속은 아리스의 예상보다 훨씬 더 거세었고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자신을 치고 나가는 영소들 사이에서 정신을 잃지 않게 노력하면서 아리스는 리비엘로가 남긴 금색 실을 쫓아갔다. 빛의 길에는 바닥 같은 건 없었기 때문에 몸이 둥실둥실 떠 있었다. 그 상태로 몸을 움직이는 것은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전진이 더뎠다.

아리스는 영소에 떠밀리기도 하고 막히기도 했지만 이를 악물고 꾸역꾸역 전진했다. 그것은 제법 힘들었기 때문에 금색 실을 따라가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몸에서 진땀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속이 안 좋기도 했다. 수많은 영소들의 흐름 속은 어지러웠으며 그만큼 많은 정보가 있어서 두서없이 밀려오는 혼의 정보 덕분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 와서 다행이었다. 범인이었다면 필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신을 놓았을 것이다. 아리스는 의식이 혼미해질 때마다 미레아의 이름을 곱씹었다. 오로지 미레아를 생각하면서 버텨 내었다.

그러다 마침내 영소의 흐름 속에서 거대한 존재를 발견했다. 그는 모든 영소의 흐름을 품고 있었고 그것들이 제 갈 길을 갈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아리스는 직감으로 그의 이름을 알아차렸다.

“보비네…….”

짙은 쪽빛 털을 지닌 거대한 짐승이 아리스를 굽어보았다. 그 크기가 어찌나 큰지 올려다보려면 머리를 한참이나 뒤로 꺾어야 했다. 그는 한쪽 손에는 긴 지팡이를 짚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거대한 세 쌍의 뿔이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돋아 있었다.

대지와 하늘의 사이를 갈라 하늘을 떠받쳤다는 첫 번째 뿔은 제일 커다랬는데 굵고 일직선으로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알툰이 화한 두 번째 뿔은 창끝처럼 뾰족하고 예리했다. 토지를 갈아 풍요롭게 했다는 세 번째 뿔은 둥글게 반원형으로 돋아 있었다.

황금색 눈은 감히 눈을 맞추기 황송스러울 만큼 성스러웠다. 그의 커다란 콧구멍에서 뜨거운 숨이 훅훅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때마다 긴 수염이 나풀거렸다.

금색 실은 지팡이를 짚지 않은 보비네의 주먹 쥔 손으로 이어져 있었다. 아리스는 그것을 보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설마 미레아의 특이점이 보비네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싶어 보비네의 손을 보다 고개를 들었는데 눈을 마주쳤다.

〔이 세계의 변칙.〕

보비네가 아리스를 그리 일렀다. 목소리는 우레처럼 온 사방을 울렸다. 아리스는 자신도 보비네에게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 존재감에 압도되어 입만 뻥긋거렸다. 하지만 보비네는 크게 괘념치 않아 하는 듯싶었다.

그는 아리스를 신기하단 얼굴로 바라보았고 아리스 역시 그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아리스가 침착해지기 위해 침을 꼴깍 삼키고 있는데 보비네가 말을 이었다.

〔그대가 언젠가는 이곳에 닿을 것이라 기다리고 있었다. 찾는 것이 있다지?〕

여기서 죽도 밥도 안 되게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리스는 간신히 온 힘을 쥐어짜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입니다.”

보비네가 자신의 주먹을 지팡이 끝으로 톡톡 두드리자 금색 실이 너울거렸다.

〔나란 존재가 쥐고 있는 이것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터인데 여기까지 연결이 되다니 대단하군. 필시 그만큼 간절했을 테지.〕

아리스는 그 실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것은 제 친구가 연결해 준 길잡이입니다. 미레아 제인스터의 특이점이 당신에게 있나요?”

그 말에 보비네는 잠시 아리스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살짝 까닥거리며 대답했다.

〔그렇다. 그녀의 특이점은 내게 있다. 사라지려는 것을 내가 붙잡아 힘을 회복시켜 주었지. 나는 특이점을 다루는 데 그 누구보다 능숙하니 손상된 특이점을 복구시키는 것쯤은 내 힘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내게 이런 혜택을 받은 이들은 과거에 없었지. 특이점이 흩어진 죽음은 신이라 해서 돌이킬 수 없는 영역의 것이다. ……그래, 그렇지.〕

그 말에 아리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으며 창백하게 변했다. 보비네의 말에 따르면 미레아의 특이점이 흩어진 지금, 미레아는 죽었다는 소리를 확언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런 아리스의 안색을 살핀 보비네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느리게 말을 이었다.

〔본래라면 그렇다 했겠지만……. 이런 식으로 죽기에는 그녀는 너무나도 고귀한 희생을 하였다. 그러니 이것으로 끝내기에는 아깝지 아니한가. 이것은 이제 서리 여신의 특이점이 없어도 불안정하지 않은, 온전한 그녀의 특이점이다. 그녀의 육신과 혼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지. 이 특이점만 있으면 육신을 복원하여 그녀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다.〕

아리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것이 제가 찾는 것이 맞습니다! 저에게 주시면 안 될까요?”

〔…….〕

뜻밖에 보비네에게서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아리스는 그사이를 못 참고 초조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보비네이시여. 그것은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의 특이점입니다. 부디 제게 돌려주시길 바랍니다.”

〔돌려달라…….〕

보비네가 자신의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는 무언가 못마땅한지 한쪽 눈을 찡그리고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그대의 것이었던 적이 있느냐?〕

아리스는 말문이 막혔다. 미레아 제인스터를 감히 자신의 소유라 주장할 수 없었다. 누군가를 소유한다는 말이 이렇게나 무거울 줄은 아리스조차 몰랐다. 미레아는 자신 같은 사람이 소유하기에는 아리스에게 너무나도 고귀한 존재였다.

아리스에게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보비네는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을 그대에게 줄지 어떨지 결정하는 것은 그대에게도, 내게도 없구나.〕

“그럼…….”

아리스가 어물거리자 보비네는 금색 실이 연결된 자신의 주먹을 아리스와 떨어트리려는 듯 살짝 들어 올렸다.

〔그대는 무엇이 되었든 이 자의 의견에 따라야 할 것이다.〕

보비네가 말한 것은 미레아 제인스터의 의사인 것 같았다. 아리스는 보비네가 미레아의 특이점을 바로 내어 주지 않자 의문이 증폭되었다.

“당연히 돌아오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리스가 답답하단 목소리를 내었지만, 보비네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미레아가 돌아오고 싶지 않아 하는 겁니까?”

보비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리스는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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