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미레아는 끝까지 이 세상과 아리스를 포기하지 않고 구원했다. 그 결과 라슈온은 미레아가 바란 대로 희망을 얻고 나아갈 미래가 그려졌다.
그렇다면 아리스 역시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미레아를 포기하면 안 된다.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낸다면 희망은 있기 마련이었다. 아리스는 지금 그 희망의 끄트머리를 본 것 같았다.
아리스는 흔들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혹시 리비엘로 람의 유품들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아? 급해!”
그 말에 파울로와 율비네, 라일라의 눈도 덩달아 같이 커졌다. 아리스가 채근하자 라일라가 당황해서 버벅거렸다.
“뭐? 리비엘로의?”
“그래!”
“리비엘로의 유품은 대부분 다 소각했어. 리비엘로는 친인척도 없었고 딱히 자신의 소품을 어떻게 처리해 달란 유언도 없었기 때문에…….”
그 말에 아리스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간신히 찾아낸 희망을 잃어버린 얼굴로 땅의 돌부리를 걷어찼다.
“젠장!”
“왜? 뭐가 필요해서 그래?”
“그 예지하는 기계, 그게 있었어야 했어.”
그러자 라일라가 멈칫했다.
“다발성 의지 유속 통합 추론기 말이야?”
“그래, 그거!”
“그거라면 내가 갖고 있어.”
라일라의 말에 돌부리를 퍽퍽 걷어차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던 아리스의 행동이 멈췄다. 그는 라일라의 양어깨를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쥐었다.
“뭐라고? 정말이야?”
아리스의 얼굴은 절박했다.
“그걸 개발한 건 나였으니까, 연구 차원에서 내게로 돌아왔어. 내 연구실에 있어.”
라일라는 영문도 모르게 아리스가 흔드는 대로 흔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필요해? 가져올까?”
“네 연구실에 있다고 그랬지? 그러면 함께 가자!”
아리스가 황급히 자리를 뜨려 그러자 파울로가 그들을 붙잡았다.
“무슨 생각이야?”
“‘예측’ 말이에요! 미레아가 무슨 일을 할지 예측한 사람이 있다면, 리비엘로 람이 아니겠어요? 람은 당사자들에게는 비밀이었겠지만 여러 사람의 유속을 손에 쥐고 있었어요. 그 녀석이 숨긴다 해도 저는 영소의 흐름에 민감하니까 알 수 있었거든요. 그렇다면 람이…… 미레아의 선택을 예지했을 가능성도 커요.”
아리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세운 가설에 과도하게 흥분하지 않기 위해 나름 애를 쓰는 중이었다. 하나라도 더 많은 희망을 모으기 위해서는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그렇다면 다른 대안을 마련해 놓았지 않을까요? 리비엘로 람이라면……!”
“그런데 왜 하필 추론기야? 다른 것일 수도 있잖아.”
파울로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물었다.
“람의 의지는 추론기에 고여 있었어요. 그렇다면 람이 죽기 전에 무언가 장치를 해 놨더라면 추론기예요.”
그 말에 라일라도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이었다.
“그 추론기, 사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어. 내가 회수한 이후 도통 작동하지 않았거든. 리비엘로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으니 그러려니 했는데…… 적어도 내가 점검차 가동했을 때 반응을 보이긴 해야 했어. 난 단순 고장인 줄 알고 시간이 될 때 손보겠다는 걸 까먹고 있었는데…….”
라일라의 말까지 들으니 아리스는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들은 아리스를 선두로 서둘러 집을 나섰다. 한가롭게 트램을 잡아탈 정신머리까지는 없었다. 아리스는 일단 날기 위해 날개를 꺼내려 했다.
“어……?”
그런데 날개가 나오지 않았다. 마력을 돌려 보려 했지만, 그의 몸에서는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리스는 그제야 자신이 전처럼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레아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는 바람에 자신의 상태를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의아하게 그를 보는 율비네의 말에 아리스는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전처럼 마법을 쓸 수…… 없어?”
하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할 새도 없이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파울로가 여기까지 끌고 왔던 지프의 시동을 걸었다. 아리스는 자신의 문제점은 뒤로 미뤄 둔 채 허겁지겁 그 지프에 몸을 실었다.
라슈발렌 본부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시동이 꺼지기도 전에 차에서 뛰어내렸다. 라일라를 선두로 그녀의 작업실 겸 연구실에 도착했다. 선반 한 귀퉁이에 잘 보관 중이던 추론기를 라일라가 꺼내 오자 일행들은 그것을 가운데에 놓고 둘러앉았다.
“이제 이걸로 뭘 하지?”
“일단 켜 볼까?”
라일라가 전원 버튼을 딸각거렸지만, 추론기는 잠잠했다. 몇 번 더 버튼을 눌러도 추론기는 여전히 작동하지 않았다. 아리스가 다리를 달달 떨다가 성미 급하게 물었다.
“고장이 난 게 아니고?”
“나도 모르겠어. 내게 돌아왔을 때는 처음부터 이런 상태였어. 오작동 이전에 켜지지도 않고…… 잠깐, 이게…….”
라일라가 추론기를 이리저리 뒤집는 것을 빼앗은 아리스가 추론기의 전원을 켰다. 그러자 꿈쩍도 하지 않던 추론기가 찰칵찰칵하는 톱니 소리를 홀로 내었다. 그러더니 기계에 연결된 마석이 빛나면서 추론기가 활성화되었다. 라일라가 점검했을 때는 켜지지도 않았던 것이 아리스가 매만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작동하고 있었다.
넷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일단 가동하기는 했으나 아리스는 이걸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리비엘로가 쓰던 것을 옆에서 구경했었을 땐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일단 작동은 했으니 리비엘로가 무슨 장치라도 남겼으면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이제…….”
라일라가 무언가를 제안하려 그랬는데 추론기에서 드르륵, 탁, 하면서 금속 부품끼리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조작하지도 않았는데 추론기 혼자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이런 일은 라일라도 예상하지 못했던 듯 당황한 얼굴로 추론기를 살피려 그랬다.
그때였다.
[안]
추론기의 활자 막대가 저절로 움직이며 종이에 글자를 찍어 냈다. 원래라면 사용자가 기계를 조작할 때 결과지를 출력하는 기능만 갖고 있던 활자 막대였다. 사용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홀로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추론기는 혼자 가동하더니 제멋대로 활자를 찍어 내었다. 이것을 만들어 낸 라일라조차 미처 상상하지 못한 기능이었다.
그 첫 글자는 ‘안’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침묵이 네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아리스와 파울로는 물론 율비네와 라일라마저 이게 저절로 움직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추론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종이 위에 열심히 활자 막대를 탁탁거리면서 움직이더니 다음 글자를 이어 갔다. 그러자 한 문장이 완성되었다.
[안녕, 아리스.]
누군가가 아리스에게 보내는 인사말이었다. 시간이 잠시 멈춘 것만 같았다. 그 문장을 몇 번이고 읽은 아리스의 손이 덜덜 떨렸다.
누구지? 지금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건? 어디서 보내고 있는 거지?
온갖 의문이 아리스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그 순간에도 활자 막대는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리스에게만 작동하도록 설정된 추론기에서 누군가 이 글을 보고 있다는 소리는 아리스 네가 이 힘이 필요해졌다는 의미겠지. 그리고 나는 아마 거기에 없을 거야.]
그것은 놀랍게도 리비엘로가 남긴 문장이었다. 이 추론기를 온전히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리비엘로밖에 없었다. 아리스는 이것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활자 막대는 아리스가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다시 홀로 움직여 메시지를 적어 내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네가 찾아올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메시지를 남겨.]
역시 리비엘로는 무언가를 예상한 듯싶었다. 아리스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가만히 지켜보자 추론기의 활자 막대가 다시 움직였다.
[세피로스가 나를 죽이기 전에 너희의 미래를 알고 있냐고 물었을 때,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고 대답했어. 그것은 사실이야.]
[너와 라우노의 의지는 너무나도 강력하여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아리스는 활자의 의미를 최대한 이해하기 위해 내용을 곱씹으며 읽어 내려갔다. 그는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지만 최대한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너희를 잘 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너희라면 이런 선택을 했겠지.]
[그래, 라슈온을 위해 너와 미레아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 말이야.]
[너희는 희생정신이라 생각하지 않겠지만 너희의 선택은 분명 쉽지 않은 길이지. 그런데도 너희는 기꺼이 그 짐을 자신이 지고 가겠다 했어.]
[아무나 할 수 없는 생각이야. 친구로서 너희가 자랑스러워.]
리비엘로의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들이 이어진 후 추론기의 메시지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미레아를 구할 방법을 찾고 있지?]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나 남겨진 말을 내뱉는 기계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리비엘로가 자신들의 옆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추론기에는 미레아의 혼의 정보가 남겨져 있어. 내가 미레아의 미래를 예지하기 위해 설정해 두었던 값이지.]
[네가 찾고 있는 미레아의 영소는 아직 흐름에 섞이지 않았어.]
심장이 어찌나 세게 뛰었는지 아리스는 그것이 자신의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추론기에 남겨진 리비엘로의 말이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혼이 흩어지지 않았다는 소리는 혼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미레아의 특이점이 아직 남아 있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