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14화 (214/257)

214화.

아리스는 홀로 해변을 빠져나왔다. 오솔길을 지나 조금 걸으니 잘 정비된 인도가 나왔다. 그것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풍경을 지나왔다. 그 길의 끝에는 미레아의 집이 있었다. 아리스는 대문을 열었다. 문이 잠겨 있기는 했으나 아리스에게 그 정도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을로 접어든 정원에는 올리브가 열려 있었고 몇몇 나무는 단풍이 들어 있었다. 아리스가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아리스는 정원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걷고는 현관 옆으로 난 테라스에 있는 흔들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피가 여기저기 말라붙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페니드란과 세렌트 역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이 되어 침묵을 지켰다. 아리스는 차라리 그게 나았다. 지금은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기력도 없고 말이다.

어느덧 해가 완전히 저물어 달과 별이 떴다. 아리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밤하늘이었다. 이 세계의 모든 생명이 보비네의 부활을 축복해 주고 있었다. 다른 때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는 별빛이 라슈온으로 쏟아졌다. 모든 곳에서 생명의 흐름은 활기찼고 깨끗했다.

서리 여신과 마수라는 존재가 없어진 라슈온은 영소의 흐름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아리스는 보비네의 의지 아래에서는 자신의 힘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예측이 가지 않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딴 것이 아니었다.

아리스가 흔들의자 위에서 몸을 수그리고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비통에 빠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 * *

해가 떴다. 보비네가 부활하고 처음 뜨는 새로운 해였다. 어디선가 커다란 짐승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3,000년 동안 라슈온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성스러운 보비네의 권속들이 내는 소리였다.

그들은 보비네의 부활과 마수들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며 떠오르는 해를 보고 기쁨의 노랫소리를 보내고 있었다.

산과 하늘, 바다에서 보내는 축복의 소리는 차가운 아침 공기를 타고 온 세계를 울렸다. 바다에서 커다란 짐승이 수면 위로 뛰어올라 다시 물 위로 떨어지면서 큰 파도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5년 전 록산을 두려움에 떨게 한 마수는 아니었다. 록산의 바다에도 성스러운 존재가 깃든 것이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눈을 질끈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그는 차라리 영영 해가 뜨지 않길 바랐다. 미레아가 없는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시간이 가는 것이 무서웠다. 아리스는 그에게 남은 긴 세월 동안 미레아 제인스터라는 존재가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미레아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 세계를 아리스 역시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리스는 아직 그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미레아가 있어 준 덕분에 이 세계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었지, 미레아가 없는 세상마저 사랑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밖에는 이른 시간부터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먼바다에서는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아리스는 귀를 막아도 비집고 들어오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피로가 쌓인 눈매를 매만졌다.

저 밖의 사람들은 이토록 생명력이 넘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데 왜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네가 아닌 걸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차라리 시체라도 눈앞에 있었다면 더 현실감이 있었을까. 아니면 나는 더 참혹할 정도로 무너져 내렸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새로운 인기척이 있었다. 파울로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아리스를 마주했다. 하룻밤 사이 파울로의 얼굴 역시 수척해져 있었다.

그의 뒤로 율비네와 라일라가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셋은 아리스와 달리 적어도 따듯한 몸에 몸을 담그기는 한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라일라는 아직도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아리스가 거무죽죽한 눈으로 파울로를 바라보자 그는 작게 혀를 찼다. 살아 있는 사람 꼴이 아니었다. 지금 누군가를 상대할 기력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아리스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율비네 역시 아리스의 처참한 모습에 걱정이 밀려와 안절부절못했다.

“아리스, 좀 쉬셨습…….”

율비네는 말을 하다 입을 다물었다. 아리스는 빈말로도 쉰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제보다 더 피폐한 모습이었다. 아리스는 마라피네스가 죽었을 때도 이 정도로 무너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지금까지 아리스와 많은 일을 함께한 율비네였지만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파울로는 품속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 불쑥 내밀었다.

“밤사이…… 미레아가 내 앞으로 미리 써 두었던 유언장을 봤는데…… 이거, 네가 봐 주었으면 해서.”

파울로가 내민 것은 편지 봉투였다. 아리스는 기계적으로 그것을 건네받고는 봉투를 멀거니 보았다. 봉투의 겉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깨끗한 상태였지만 실링 왁스로 밀봉되어 있던 것이 한번 개봉된 흔적이 있었다. 파울로가 가져온 것이니 그가 열어 봤을 것이다.

아리스가 눈동자만 굴려서 파울로를 힐끔 바라보았다가 다시 편지 봉투로 시선을 돌렸다.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 것인지도 표시되어 있지 않아서 아리스는 자신이 봐도 되는지 싶었지만, 파울로는 빨리 열어 보라는 것 같은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글자를 읽을 기운도 정신도 없었지만 아리스는 조금 마지못해 봉투를 열었다.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은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이었다. 그가 그것을 펴 보았다. 종이에는 정갈하지만 시원하게 뻗은 필체로 문장 하나만 덜렁 적혀 있었다.

[누가 되었든 아리스에게 내 정원의 사진을 계절마다 찍어서 보내 줄 것.]

누가 적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글자의 의미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지금 그리운 이의 필체인 것을 알아보고 심장이 두근거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천히 내용을 읽은 아리스는 그 문장을 보고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레아의 유언장에 껴 있었어. 수신인이 적히지 않은 건…… 정말로 그게 누가 되었든 상관이 없었기 때문일 거로 생각해.”

아리스는 흔들의자에 몸을 늘어트리고 편지지의 내용을 계속 읽어 내렸다.

‘아리스에게…….’

저가 없을 때 뒤에 남겨질 상대방을 위하여 이런 내용을 글자로 옮겼을 때 무슨 심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래도 미레아는 아리스를 생각하고 이런 유언장을 남겼다. 그것은 기쁘다기보단 슬펐고 야속했다. 아리스는 뜨거워지는 눈을 손으로 가리고 편지지를 소중하게 품에 품었다.

“약속…… 지키라고 해 놓고는…….”

어지간한 일도 의연하게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던 눈물이 잠시 참아온 것을 다 쏟아 내기라도 하듯 또다시 터져 나왔다.

“나는 약속을 지켰는데 정작 네가 없으면 어쩌라는 말이야…….”

아리스는 미레아의 유언을 읽고 또 읽다가 눈물이 종이 위에 떨어져 잉크가 번지려고 하자 다시 자신의 가슴께 위에 올려놓고 지그시 눌렀다.

지금까지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댐이 터진 것처럼 거대한 해일이 되어 아리스를 덮쳐 왔다. 미레아가 미친 듯이 그리웠다.

자신은 이제 가을을 맞이한 이 정원 한가운데에 있는데 어째서 미레아는 없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몸을 수그리고 앉아 꽃을 매만지고 있다가 자신을 돌아보며 방긋 웃던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정원이 그의 슬픔 속으로 가라앉았다. 주인을 잃은 정원은 꽃잎 하나하나 이파리 하나하나 전부 슬픔이 매달려 있었다. 만약 지금 이 슬픔을 전부 표현한다면 이 정원으로 부족할 것이다. 그의 비통한 심정은 하나의 거대한 숲처럼 그의 마음에 빡빡하게 자리 잡았다.

“다 의미가 없어. 이런 것. 네가 없는 이 세상에서 대체 어떻게 살라는 거야? 잔인하잖아…….”

미레아는 시신 하나 남길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녀의 죽음이 와닿지 않았다.

네 계획을 미리 알았다면 나는 너를 막을 수 있었을까.

아리스는 부질없는 가정을 하며 자신의 선택을 자책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눈치챘더라면, 그래서 너를 말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더라면……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내가 네 선택을 예측할 수 있었다면…… 예측만 할 수 있었어도…….

예측……?

눈물을 떨구던 아리스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예측?

무언가가 떠오르려 그랬다. 마음속에서 이 상황에 대한 다른 대안이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생각해 내야 했다.

예측…… 예측이라…… 예측이라면…… 혹시…….

지금 이 상황에서 그에게 가장 도움을 줄 수 있는 이. 필시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고 그들에게 알리려고 했으나 결국 죽음이란 도구로 입이 틀어막혀 버린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를 뒤집어 하나라도 더 메시지를 남기려고 했던…… 그렇게까지 했던 그녀가 겨우 세피로스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메시지 하나만 남겼을까?

아리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리비엘로는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신분 때문에 가깝게 지내는 것은 반발감을 느끼게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생각한 리비엘로라는 사람의 능력을 결단코 평가절하하지 않았다.

아리스는 처음에는 리비엘로를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미레아가 그녀를 믿었기 때문에 리비엘로를 믿었다. 리비엘로는 항상 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만큼 명석했다.

리비엘로가 제 죽음을 본 것은 분명했으나 그녀가 본 것이 그것 하나일 리 없었다. 그런 리비엘로가 죽어 가면서 모두를 배신하고 자신을 죽인 사람의 이름 하나만 남겼다? 그럴 리 없었다. 리비엘로라면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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