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13화 (213/257)

213화.

제22장 너에게로

가장 먼저 들린 것은 파도 소리였다. 너무 잔잔하지도, 너무 거칠지도 않은. 딱 기분 좋게 울리는 파도 소리. 그다음으로는 촉각이 돌아왔다. 축축한 물기를 머금은 까슬거리는 모래의 감촉이 손에 와 닿았다.

아리스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날개는 사라진 상태였고, 다른 일행들과 함께 파도를 맞으며 바닷가에 쓰러져 있었다.

“여기는…….”

파울로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록산의 바닷가였다. 해변의 맞은편에는 노란 담장을 한 집이 있었다. 제인스터 일가의 집이었다.

황급히 일어나려다 현기증이 일어난 아리스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멍하니 그 집을 바라보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아파 바로 이전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퍼뜩 미레아의 마지막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다른 일행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율비네는 아직도 골이 울려서 인상을 쓰며 관자놀이께를 꾹꾹 눌렀다.

“다들 무사한가요? 마수는 어떻게 되었어요?”

율비네의 말에 쿤둘렌이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을 보면 마수는 이제 괜찮은가 봅니다.”

아리스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율비네를 지나치더니 쿤둘렌에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그곳에는 아리스를 포함해, 파울로, 율비네, 쿤둘렌, 라일라 다섯 사람이 모여 있었다. 라우노의 모습은 물론 윤설이나 세피로스, 그리고 미레아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세렌트가 떨어져 있었다. 아리스는 세렌트를 함부로 건들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것이 현실인가? 혹시 가상공간이나 다른 세계인 것이 아닐까?

아리스의 얼굴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덜 끝난 것처럼 보였다. 일부러 현실을 외면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라우노가 불러낸 마수들 앞이었는데 순식간에 눈앞의 세계가 바뀌었다. 게다가 미레아가 없다. 무언가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이쪽으로 넘어온 거면 미레아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일이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아리스의 얼굴에는 그런 혼란이 떠올라 있었다. 그의 눈은 여기저기를 훑으며 미레아를 찾고 있었다. 아리스의 반응에 쿤둘렌은 말을 조심스럽게 고르다 대답했다.

“보비네께서 깨어나 아리스 군의 조율자 권한은 없어졌습니다. 그 폭발로 영소의 중앙 제어실까지 함께 파괴되어 이제 이 세계는 조율자란 존재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고요.”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에요. 미레아는요? 미레아는 어디 갔죠?”

쿤둘렌은 침음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지금 이 반응은 뭔데요? 쿤둘렌, 미레아는 어디 있는 거예요?”

“아리스, 미레아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라일라가 아리스의 팔을 붙잡았다. 아리스가 그녀에게 시선을 맞춰 오자 라일라는 죄책감에 눈동자를 떨궜다. 그리고 간신히 단어를 쥐어짜 냈다.

“미레아는 없어…….”

“……없다니?”

“미레아는 자신의 특이점을 개방해서…… 마수들을 없앴어.”

“그래서?”

“특이점이 없는 존재는 영소들의 구심점이 없어져 죽기 마련이다.”

파울로의 말에 아리스가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거짓말이지?”

그는 파울로를 시작으로 율비네, 라일라, 쿤둘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두 눈물이라도 삼키는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아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일행들의 반응은 아리스가 바란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건 다…… 거짓말이잖아. 질 나쁜 농담이라고.”

“미안하다, 아리스.”

아리스는 그렇게 말하는 파울로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미안? 미안하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인데요! 지금 미레아가 죽……!”

말을 완성하기도 전에 아리스는 가슴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와 목을 턱 막은 느낌이었다. 그것을 다시 삼키기도 전에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니야…….”

지금까지 여러 일이 있어도 쉽게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꾹꾹 눌러 왔던 것이 한꺼번에 터진 듯 굵은 눈물은 멈추지 않고 아리스의 볼을 타고 흘러내려 턱 밑으로 뚝뚝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아니, 아니야……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걸 거야. 미레아는…… 항상 무리해도 그럭저럭 버텨 온 녀석이었고…….”

아리스가 두서없이 내뱉는 말에 파울로 역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니까 돌아올 거야.”

라일라는 아리스의 말을 쉽게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미레아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리스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했다. 눈물은 전염되어 라일라와 율비네도 조용히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파울로는 이를 악물고 손에 얼굴을 묻었으며 쿤둘렌은 그런 그들을 보듬어 주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다른 이들의 손을 다 뿌리쳤다.

“이 반응은 뭔데?! 내가 미레아는 돌아올 거라 그랬잖아!”

“미레아는 죽었어.”

파울로가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아리스!”

“믿을 수 없어!”

아리스의 거센 항의에 파울로는 이 이상 그를 납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아리스가 모랫바닥에 털썩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는 머나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들이 현실감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라우노와 생사를 걸고 싸웠고, 라슈온의 전 지역에서 몰려든 마수들은 자신을 탐냈었다.

그런데 이 바다는 더없이 평온했다. 바람도 딱 적당했고 파도가 높지도 않았다. 그가 록산의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이 세계의 존망 따위는 걱정거리가 못 된다는 듯 바다는 파도를 만들어 바닷물을 밀어냈다가 다시 부드럽게 뒤로 후퇴하는 것을 반복했다. 마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그리고…… 미레아 제인스터도 처음부터 없었던 듯…….

아리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바다는 점점 하늘을 닮아 가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아리스는 그 광경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세렌트를 주워 들었다. 미레아가 남긴 흔적은 그것밖에 없었다. 세렌트가 머뭇거리다 아리스에게 말을 걸어왔다.

― ……미안.

“…….”

아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렌트는 그 반응에 주눅 들었지만, 감히 자신이 아리스 앞에서 울거나 항변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페니드란 역시 아리스에게 함부로 말을 걸 수 없었다. 아리스에게서 밀려오는 슬픔이 너무나도 거대하여 어떤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행들 사이에서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라일라가 이를 악물고 끅끅거리자 옆에 있던 율비네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파울로는 울고 있는 일행들을 일으켜 세웠다.

“일단…… 돌아가자. 다들 꼴이 말이 아니야.”

파울로의 말에 일행들은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발을 옮겼다. 율비네는 상처투성이인 아리스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차가운 태도로 그 손을 쳐 내었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리스…….”

율비네의 부름에도 아리스는 꿈쩍하지 않았다.

“일어나십시오. 여기서 마냥 이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사나운 눈으로 율비네를 바라보자 그 기세에 그녀는 어깨를 떨었다. 아리스가 저런 얼굴로 자신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다들 알고 있었지?”

아리스의 말에 일행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반응에 아리스가 짧게 하, 하고 헛웃음을 들이켰다.

“나만 몰랐어? 나만 몰랐다고? 어떻게 다들 알고 있었으면서 미레아를 말리지 않았어?”

아리스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다른 일행들은 변명하고 싶었지만, 아리스의 기세가 워낙 사나워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의 화만 돋울 것 같았다. 아리스는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다른 쪽 손을 휘적거렸다.

“꺼져. 다들 꼴도 보기 싫어.”

그렇게 말한 아리스는 페니드란과 세렌트를 챙겨 들고 외따로 떨어져서 어디론가 터덜터덜 걸어갔다.

“저, 아리스…….”

율비네는 아리스를 뒤쫓아 갈까 망설였지만, 그것을 눈치챈 파울로가 율비네의 어깨를 잡고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혼자 두라는 의미였다. 사람들은 걱정 어린 시선으로 아리스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는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걸음걸이였다.

쿤둘렌은 아리스의 뒷모습을 한없이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저는 아공간으로 대피시켜 두었던 분들을 병원으로 옮기겠습니다.”

“도와드릴게요.”

라일라가 눈물을 훔치며 쿤둘렌을 따랐다. 아공간에 오래 있어 봤자 정신적, 육체적으로 좋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둘은 파울로에게 짧은 인사를 하고 서둘러 움직였다.

“저는…….”

율비네가 어색한 태도로 어디를 향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율비네와 아리스가 타고 왔던 비공정은 조금 전의 싸움으로 아마 완파된 상태로 조율자의 제어 모듈이 있던 대형 비공정 위에 나뒹굴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율비네를 거둔 것은 파울로였다.

“너는 델루카로 돌아가야 하지? 가장 빠른 교통편을 알아봐 줄 테니 일단 우리 집으로 갈래?”

율비네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파울로의 말대로 율비네와 아리스는 델루카로 돌아가 봐야 했다. 하지만 아리스가 저런 상태여서야…….

율비네는 파울로를 따라가면서도 연신 아리스가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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