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아리스는 자신의 권한 일부가 제한된 것을 느꼈다. 자신의 존재에 필적하는 누군가가 움직인 탓이었다.
“보비네……?”
아리스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건 분명 보비네였다. 보비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가사 상태였던 보비네가 어떻게 깨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와 동시에 아리스를 조율자로 만들었던 시스템 일부가 비활성화되었다. 조율자보다 상위 존재인 보비네의 출현에 세계의 권한이 그에게 옮겨 간 탓이었다. 아리스가 얻은 조율자의 지위는 고작 몇 십 분 만에 폐위되었다.
“안 돼!”
아리스는 당황했다. 아직 마수들은 건재했고 자신은 마수들과 싸워야 했다. 지금 조율자의 지위에서 폐위된다면 마수와 대항해 싸울 힘을 잃게 된다. 아리스는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맛 좋은 먹잇감을 보는 듯 훑어보고 있는 마수들을 바라보았다.
이대로는 당한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왜 하필 지금이야?! 지금 보비네가 부활하면 나는……!”
그가 조율자가 된 보람이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라면 보비네는 3,000년 전과 마찬가지로 마수에게 이길 수 없었다.
아리스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미레아가 그의 뒤에서 중얼거렸다.
“성공했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한 기분이 들어 아리스는 미레아를 돌아보았다.
“미레아?”
미레아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비네가 깨어났어. 너도 느꼈지?”
“느꼈어. 느꼈는데…… 너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
아리스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이 상황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데 미레아에게서 느껴지는 이 여유로움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미레아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윤설과 세피로스가 해냈어! 그 둘이 보비네를 부활시켰다고.”
“그렇다면 그 둘은 지금 어디 있는데?”
아리스의 질문에 미레아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실을 숨길 생각인 것은 아니었다.
“……그 대가로 죽었어.”
“죽었다니…… 너는 그 둘이 무슨 일을 할지 알고 있었는데 그냥 두었단 말이야? 무슨 생각이야?”
아리스는 재차 미레아를 다그쳤지만, 그녀는 그다지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튼, 그 둘의 죽음을 수포로 만들 수는 없지. 보비네의 힘으로 마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
“미레아.”
미레아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설명을 이어가는데 아리스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보비네는 이미 한 번 패한 전적이 있어. 그런데 그런 그가 마수를 한 번에 몰아낼 수 있다고……?”
아리스의 날카로운 지적에 미레아의 얼굴이 굳었다.
“네가 말한 작전은…… 그 이상의 뭔가가 있는 거지?”
미레아는 어깨를 늘어트리고 입을 달싹였다. 그 모습이 영 수상쩍어 아리스가 미레아의 손을 잡으려는데 순간 미레아는 아리스를 세게 밀쳤다. 둘의 몸이 떨어졌고 미레아의 등 뒤에 윤설이 그랬던 것처럼 곤충의 것과 같은 막상 날개가 돋아났다. 미레아는 그 날개를 이용해 포르르 날아오르며 얼떨떨한 얼굴을 하는 아리스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미레아?”
“뭐, 이런 거지.”
“미레아? 지금 무슨 상황인 거야?”
미레아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뱅뱅 꼬며 변명처럼 말했다.
“보비네의 힘만으로 마수를 몰아낸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미안해.”
“뭐?”
“보비네는 이 세계를 정비할 힘은 갖고 있지만 네 말대로 이미 한 번 마수에게 패한 전적이 있어. 마수를 몰아내는 것은 그의 힘으로는 부족할 거야. 그래서 나는 보비네를 돕기로 했어.”
“미레아?”
아리스는 미레아에게 날아가려 그랬다. 하지만 미레아가 더 빨랐다. 그녀가 손을 올리자 단단하고 투명한 벽이 아리스의 앞을 막았다. 아리스는 그 너머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조율자의 힘이 있는데도 말이다.
“미안해. 마수를 없애는 것은 보비네의 힘만이 아닌, 내 힘 역시 보탤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특이점을 개방하여 태초의 우주를 만든 힘을 방출하는 것이야. 물론 그렇게 하면 내 목숨은…… 하지만 어차피 내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어. 라우노에게 서리 여신의 특이점을 빼앗긴 상황에서 내게 남아 있는 선택지 자체는 별로 없었지.”
미레아의 말에 아리스는 얼어붙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고?”
“그래. 네게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미레아는 자신이 만들어 낸 막에 이마를 툭하고 가져다 대었다.
“이게 내 마지막 임무야. 아마 모든 일이 끝나면 이 세계는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너와 다른 일행들은 안전하게 록산으로 되돌려 보낼게.”
“미레아!”
“그리고 나는 너를 너무나도 많이 좋아해. 이 말 만큼은 꼭 전하고 싶었어. 그래서 네가 나를 위해 조율자의 자리에 올랐듯 나 역시 너를 위해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어.”
미레아의 목소리가 조금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사랑해, 아리스. 이것도 내 이기심이겠지만 그래도 사랑해. 내가 서리 여신의 조각이라서가 아니야. 이건 온전한 내 마음이야. 너는 항상 어딘가 불완전해 보였고, 항상 상처받은 얼굴을 했지만 그런 너를 보살펴 볼수록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어. 언제부터인지는 몰라. 어쩌면 이런 마음을 품게 된 것은 네가 우리 집 정원을 가꾸어 주던 그날부터였을지도 몰라. 어쩌면 네가 내게 웃어 주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과 확연히 다른 것을 느꼈을 때부터였는지도 모르지. 너는 처음 만난 그날부터 항상 내게 특별했어.”
“미레아 제인스터!”
“아리스, 나는 이 세상이 너무나도 좋아. 전에 말한 대로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많다 해도 상관없었어. 얼마 되지 않는 좋은 일들과 수많은 슬픈 일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 하지만 사람이란 것은 언제나 변화할 수 있는 거잖아.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해도 이 세상과 사람들은 얼마든지 좋은 쪽으로 나아갈 수 있어. 그러니까, 아리스. 나는 내가 사랑한 이 세계를 너 역시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없어도 말이야.”
“일단 이리 와! 네가 말하는 건 뭐든지 들어 줄 테니까 이것부터 풀어! 미레아, 제발!”
“그리고 정말 미안해. 내가 서리 여신의 조각이라 네가 내게 보인 호의는 순수한 너의 마음이 아니야.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너를 볼 낯이 없었어. 그러니 이제는 내게서 자유로워지도록 해.”
“미레아!”
아리스가 처절하게 외쳤지만, 미레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네가 하는 말 따위 하나도 이해되지 않으니까 와서 제대로 설명하란 말이야, 미레아 제인스터!”
어디선가 강풍이 불어 아리스를 떨어트려 놓았다. 하지만 아리스는 포기하지 않고 날갯짓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바람에 미레아의 붉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나부꼈다. 아리스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불꽃같다고 생각했던 그 붉은 머리카락이 지금은, 극의 끝을 알리는 붉은 휘장처럼 느껴졌다.
아리스는 강풍 때문에 계속 밀려나다 어딘지 모를 곳에 페니드란을 간신히 박아 넣는 데 성공했다. 한 손으로는 페니드란의 검 자루를 붙잡고 다른 손은 미레아에게 뻗었다.
“미레아, 제발!”
그때, 어디선가 짙은 쪽빛 털이 돋아난 거대한 손이 나타났다. 평소라면 입을 벌리고 눈을 비볐겠지만, 지금은 그 광경에 넋을 놓을 새가 없었다. 미레아는 자신의 작은 손을 그 위에 살짝 얹었다. 뜨거운 체온이 손을 타고 느껴지자 온몸에 전율이 일 것만 같았다.
“감사합니다, 보비네.”
너무나도 거대하여 손만 보였지만,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보내는 안타까움 역시 맞잡은 손을 통해 전해져 왔다.
“저는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다만 남겨진 사람들이 더 걱정이지만…….”
미레아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아리스의 처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미레아는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중얼거렸다.
“그들이라면 잘 살 거예요.”
파울로를 선두로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라일라와 율비네, 쿤둘렌의 모습이 보였다. 미레아는 그들에게 애써 손을 흔들어 주었다. 죽음이란 미지의 세계를 앞두고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아마 모두 많이 보고 싶겠지. 특히, 아리스 네가.
“잘 있어, 아리스. 그리고 미안해.”
미레아는 꿋꿋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귓가에 여전히 아리스의 외침이 울렸다.
“개화하라.”
미레아는 마지막까지 웃었다. 그리고 자신이 부여받은 역할을 담은 말을 덧붙였다.
“벼려진 칼날이여.”
엄청난 빛과 열기가 아리스와 다른 일행들을 덮쳤다. 하지만 미레아가 바란 대로 그들에게 타격은 없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큰 소리와 함께 빛과 돌풍이 온 세계를 휩쓸고 지나갔지만, 그것에 피해를 본 자는 없었다.
“미레아!”
아리스의 목소리는 폭음에 삼켜졌다. 미레아의 형상이 분열했다. 그와 동시에 두 눈을 찌르는 듯한 밝은 빛이 이 세계를 뒤덮었다. 그 빛에 노출된 마수들이 저 혼자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들의 핵이 산산조각 나면서 잿빛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는 조율자의 힘을 부여하고 이 세계의 영소를 제어하는 제어실이 폭발했다. 여기저기에 불이 옮겨붙었고 시스템은 빠르게 무너졌다. 아리스는 자신의 세 쌍의 날개들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검은 깃털이 그의 발아래로 나풀거리며 내렸다.
“안 돼…….”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미레아!”
빛이 사그라들었고 아리스는 그 여파로 한동안 시야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살펴 미레아를 찾으려 했다.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가 이내 바닥에 처박혔다. 바닥이 단단하지 않았는지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있는 곳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