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라우노에게 서리 여신의 특이점을 빼앗겼고, 그는 그 특이점을 써 버렸다. 이제는 돌려받을 수 없었다. 세렌트와 영소를 공유하는 동안 목숨은 붙여 놓았지만, 평생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나마 내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게 해 줘요.”
그 뒤로 미레아와 다른 일행들의 설전이 오가는 것이 멈췄다. 미레아의 고집은 쉽게 꺾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조각이었던 아이야,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니?”
“당연하지요.”
다들 미레아를 다시 말리려 그랬으나 설이 손을 들어 그들의 말을 막았다. 미레아의 결연한 눈을 보며 윤설이 싱긋 웃고는 역할을 정해 주었다.
“앞서 설명했듯, 보비네를 깨우는 것은 세피로스와 나의 특이점으로 가능해. 그리고 아리스가 조율자의 능력으로 라슈온의 마수들을 이 자리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막으면 되겠지. 그러면 미레아 제인스터. 네 특이점으로는 마수를 베어 내렴. 네 특이점은 손상되었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네 힘으로 이 세계의 모든 마수를 베어 낼 수 없다고 해도 우리가 깨운 보비네의 힘을 지원받으면 가능할 거야. 우리가 보비네를 네게 보낼게. 그렇다면 그와 함께 싸워다오.”
그 말에 지금껏 잠잠히 있던 예르게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비네의 힘만 되찾는다면 우리가 나서겠다. 그대를 도와 이 땅에서 마수를 몰아낼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다.〕
그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예르게네를 바라보았다.
〔마수를 모으는 것은 할 수 없지만, 그 밖의 것들은 보비네의 힘만 회복된다면…… 가능하다.〕
그 말에 사람들이 반색했다가 다시 어두운 표정으로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미레아의 두 눈은 오늘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쳤다.
“난 괜찮아.”
그래도 사람들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든 말든 미레아는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다만 걱정인 건…… 아리스가 받아들이냐는 건데…….”
그러더니 비장한 얼굴로 쭉 기지개를 켰다.
“뭐, 내가 한번 설득해 보지.”
“정말 그걸로 되겠어?”
“괜찮아, 괜찮아. 이 세계는 무사할 거야.”
“그거 말고.”
파울로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미레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이걸로 카디 언니에게 진 빚은 갚을 수 있게 되었어.”
미레아는 다소 후련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카디 언니뿐만이 아니야. 시오와 리비엘로, 이 세계와 나를 위해 싸워 왔던 모든 사람에게 빚졌던 이 목숨을 이런 곳에 쓸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기뻐. 진심이야.”
라일라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리비엘로와 시오를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미레아까지 잃게 되는 것은 그녀의 정신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미레아는 이 이상 사람들이 자신을 붙잡기 전에 바로 일어났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저는 특이점을 쓰는 방법을 몰라요.”
미레아의 말에 윤설은 그녀의 손을 잡아 미레아의 가슴 위로 올렸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미레아와 윤설 두 사람에게 전해졌다.
“네 특이점은 내 특이점과 분리되면서 강제 활성화된 상태란다. 이 기운을 따라가면 네 의지대로 쓸 수 있단다. 그리고 네게는 마검이 있잖니. 그 아이의 힘을 빌리려무나. 길잡이가 되어 줄 거야.”
미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끌어내는 것이 더 수월하도록 내가 시동어를 정해 줄게. 잘 들으렴. 우리의 시동어는 ‘개화하라’야. 시동어를 말하고 네가 쓰고 싶은 힘의 방향을 정하면 된단다.”
윤설의 설명에 미레아는 그녀의 손을 꽉 마주 잡았다. 설 역시 힘을 살짝 주어 그 손을 맞잡아 준 후 바로 놓았다.
“자, 저는 준비 되었어요.”
“나 역시 마찬가지야.”
미레아와 세피로스의 말에 윤설은 얼른 예르게네에게 말했다.
“예르게네. 바람과 여행자의 길잡이이신 당신은 언제든지 어디로든 갈 수 있지요. 상황이 매우 급합니다. 어서 저와 세피로스를 보비네에게.”
예르게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너무 늦지 않기를 바라.”
예르게네가 윤설과 세피로스의 손을 맞잡자 그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아리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리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미레아가 낑낑거리면서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미레아, 위험해! 오지 마!”
아리스의 만류에도 미레아는 마수들을 피해 그에게 다가갔다. 마수들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어서 다행이었다. 미레아는 그 틈을 놓칠 수 없었다. 마침내 아리스의 옆자리까지 도착하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자 아리스가 얼른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위험하다니까 왜 온 거야?”
아리스의 물음에 미레아는 다급한 목소리로 용건을 내뱉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아리스, 마수들을 불러 모으자. 최대한 많이.”
“뭐어?”
갑작스러운 말에 아리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미레아는 숨을 색색 몰아쉬면서도 빠르게 용건을 말했다.
“전에 네가 클라인에서 했던 것처럼 마수를 불러 모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마수를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이야?”
“마수를 한데 모아서 전부 죽일 거야.”
미레아의 말에 아리스는 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마수를 한데 모은다 쳐. 그렇지만 나는 그 수많은 마수를 전멸시킬 수 있는 그만한 힘이 남아있지 않아. 마수를 모으는 게 고작이라고.”
그 말에 미레아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거라면 윤설이 도와줄 거야.”
“어떻게?”
“방법이 있어. 자세한 건 네가 마수를 전부 모은 다음 설명해 줄게. 지금은 시간이 없어! 늦기 전에 어서!”
“하지만…….”
아리스가 계속 주저하자 미레아가 미간을 찡그렸다.
“나 못 믿어?”
그 기세가 어찌나 단호한지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미레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리스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부탁이야. 아무것도 묻지 말고 이번 한 번만 내 말대로 해 줘. 제발!”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작은 신음을 흘렸다. 미레아는 연신 그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네가 마수만 한데 모아 놓으면 다 잘 풀릴 거야. 윤설이 그랬어.”
“……좋아.”
아리스가 희미하게 웃더니 미레아의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았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한번 해 보자.”
아리스는 반대편 손으로 페니드란을 빼 들고 마력을 모았다. 첫 번째는 비록 의식이 제대로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두 번째로 행하는 것은 그보다 수월했다. 거기에 아직 영소 조율 시스템의 기능 일부는 자신과 공유되고 있었다. 이 세계를 샅샅이 뒤져 마수들을 전부 찾아내는 것쯤은 가능했다.
페니드란이 엄청난 양의 마력을 방출하자 마수들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라우노가 미처 불러들이지 못한 마수들까지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행성의 반대편에서 이곳까지 장거리 워프 게이트를 사용하여 이동한 개체도 있었다. 아리스는 일부러 그런 마수들에게 자신의 위치로 이동 좌표를 내어 주었다. 사방이 새하얗게 마수로 덮였다.
마수들은 고개를 들어 아리스와 미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스가 미리 보호막을 쳐 준 덕분에 그것들은 두서없이 덤벼들지 않았다.
“자, 이제 되었어.”
아리스는 미레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네가 말한 그 방법은…….”
아리스가 문장을 완성하기도 전에 그의 심장이 쿵 하고 아래로 내동댕이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느낌에 가슴을 움켜쥐고 거친 숨을 헐떡거리면서 불안한 눈으로 빼곡하게 모여든 마수들을 훑었다.
마수들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리스는 등줄기를 훑으며 지나가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대체 이 기분은……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 *
예르게네의 인도에 세피로스와 윤설이 도착한 곳은 웅크리고 잠든 보비네의 바로 앞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천천히 뛰는 심장 소리에 윤설은 자신의 정신이 제법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윤설은 한없이 거대한 그 몸을 올려다보았다. 워낙 컸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머리인지도 가늠되지 않았다. 그녀는 보비네의 빽빽한 털 위에 작은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보비네, 당신에게는 항상 죄스러운 마음뿐 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저와 다른 인류를 용서해 주길 바랍니다.”
그녀의 마음이 닿았을까. 보비네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공기가 무겁게 울리고 대지가 진동했다.
세피로스가 윤설의 손을 꽉 쥐었다. 부상이 큰 그의 수명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윤설은 세피로스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두렵니?”
세피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윤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이 이처럼 평온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그래. 나 역시 마찬가지야.”
둘은 함께 잠들어 있는 보비네를 올려다보았다.
페이릭, 드디어 네 곁으로 갈 수 있게 되었어. 나는 이제 더없이 자유로워.
윤설은 자신의 가슴께에 한 손을 올리고 속삭였다.
“나의 마지막 빛을 개화한다.”
윤설의 몸에서 강인하고 한 치의 어둠도 허락하지 않는 빛이 쏟아졌다.
“찬란한 우주여.”
윤설에게서 시작된 거대한 빛은 보비네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 직후 세피로스 역시 속삭였다.
“개화하라…… 견고한 신념이여.”
세피로스의 특이점이 해방되자 보비네의 심장이 한 번 쿵, 강하게 수축하며 전 세계가 울렸다. 윤설의 몸과 세피로스의 몸은 빛의 파편이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둘은 끝까지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금 그 누구보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행복을 느꼈다.
보비네의 몸이 떨려 왔고 그것은 커다란 폭발음이 되어 온 세계에 자신의 부활을 알렸다. 라슈온의 모든 존재가 보비네의 존재를 느꼈다.
이 땅의 원신인 보비네는 대지 위에 올라섰고 폐에 공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그의 눈은 온 은하수가 폭발한 것처럼 빛났다.
보비네의 옆으로 거대한 네발짐승이 나란히 섰다. 보비네의 두 번째 뿔인 알툰이었다. 그가 높은 목소리로 울자 라슈온의 원신이던 자들이 함께 일어났다. 산의 흙과 바위에서는 산신이, 강물에서는 수신이, 바람 속에서는 풍신이, 그리고 보비네의 숨결이 닿는 곳 구석구석 잊혔던 신수들이…… 그 수가 족히 이 땅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
3,000년 동안 이어진 긴 침묵을 깨고 라슈온의 신들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