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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210화 (210/257)

210화.

윤설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손끝을 덜덜 떨면서 파울로의 품 안에서 벗어나 석장을 짚고 비틀거리며 세피로스에게 다가갔다. 세피로스는 자신 역시 피투성이였으면서 윤설에게 달려가듯 다가가 부축했다. 윤설은 세피로스의 팔에 안기면서 그와 시선을 맞췄다.

“세피로스, 그때는 나와 함께 도망가자 그래서 미안해.”

윤설은 마수를 피해 페이릭, 세피로스와 함께 동결에 들어가자고 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야기에 세피로스의 눈이 흔들렸다. 윤설은 이제 망설임이라고는 전혀 없는 단단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은 나와 함께…… 싸워 줄래?”

이 이야기를 하기까지 무려 3,000년이나 걸렸다. 윤설은 이번에야말로 후회 없는 선택을 하고 싶었다. 설령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말이다.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간절한 것이 있었다.

“네가 있으면 난 어느 것도 두렵지 않아.”

윤설의 눈에는 망설임이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세피로스는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습네, 설. 나는 당신을 잃을까봐 모든 것이 두려웠는데 말이지.”

하지만 조소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초라함만 느껴졌을 뿐이다. 세피로스가 윤설을 끌어안으며 몸을 기대어 왔다. 윤설은 그 무게가 좀 버거웠는지 무릎을 꿇었고 자연스럽게 세피로스 역시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되었다. 윤설이 세피로스의 등 뒤로 팔을 둘러 안아 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이상 설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지. 내가 저지른 것들을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당신과 함께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줘.”

그 말에 세피로스의 등을 쓰다듬어 주던 윤설이 웃었다.

“그래, 함께 가자.”

세피로스는 미레아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미안했다, 미레아. 너도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미레아가 달려와 세피로스를 끌어안았다.

“세피로스가 미워요. 정말로 미워. 세피는 리비를 죽였고, 우리를 배신했어요. 하지만…… 그래도 아직 당신을 사랑해요. 나도 이 감정을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고맙다.”

세피로스는 미레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설에게 물었다.

“그래서, 계획이 뭐야?”

윤설은 한번 침을 꿀떡 삼키고 말을 이었다.

“나는 이 땅에서 마수를 몰아내고 원신(原神)인 보비네를 깨우러 갈 거란다.”

그 말에 사람들이 눈을 깜박였다. 보비네는 아직 가사 상태였다. 비록 심장이 뛰고 숨을 쉬고는 있지만 본래의 힘이 돌아오지 않아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없는 보비네는 3,000년 동안 그런 상태였다.

그런데 보비네를 깨우겠다니.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억지로 깨어난 보비네가 무리한 활동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로 원신의 죽음이었다.

“그게 가능한가요?”

쿤둘렌이 불안한 목소리로 묻자 윤설은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의 특이점을 이용하면 가능할 거야.”

“특이점을 이용한다고요?”

라일라가 이해가 안 간다는 태도로 물었다.

“특이점은 태초의 우주를 만들어 낸 힘이 응축되어 있지. 그 힘을 이용한다면 보비네를 회복시키고 깨우는 것도 가능해.”

“그 방법을 왜 3,000년 전에는 쓰지 않았던 건가요?”

“그야…… 그 당시의 보비네는 존재가 소멸하지 않는 것만 해도 거의 기적에 가까웠으니까. 아무리 특이점을 사용한다 해도 일개 인간, 오빈, 용들이 가진 특이점 하나로는 보비네의 힘을 감당할 수 없었지. 때문에, 그의 상처를 메꾸려면 수많은 자의 생명을 담보로 해야 했거든. 하지만 그것은 보비네가 지키려고 했던 이 땅의 것들이니 그 방법을 쓰는 것은 주객전도였지.”

윤설은 세피로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단다. 보비네는 3,000년 동안 어느 정도 힘을 회복을 할 수 있었어. 너희가 만났던 알툰과 예르게네가 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덕이지. 그리고 3,000년 전의 마수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의 진화를 이뤄 낸 것들이었거든. 페이릭이 아공간으로 봉인하면서 대부분의 개체는 사망했기에 봉인이 풀리고 나서 다시 나타난 개체들은 진화 정도가 제법 낮았지. 지금 있는 진화 정도라면, 할 만하다고 생각한단다.”

윤설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리고 3,000년 전의 내 힘은 평범한 영혼을 지닌 채 그저 영소를 조율하는 인간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달라. 비록 만들어진 신이라고 불리나 현재는 나 역시 신위에 오른 자. 이 세계의 것들이 나를 서리 여신이라 부름으로써 나는 진정한 신이 될 수 있었어. 그러니 지금의 내가 지닌 특이점은 신의 것과 맞먹지. 비록 보비네의 특이점이 지닌 힘만큼은 아니라 해도 그의 의식을 되돌리는 데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야. 하지만 아직은 부족해. 보비네의 의식을 돌아오게 할 수는 있어도 완전한 힘을 되찾기에는 내 특이점만으로는 무리일 거야. 그러니 나 말고 다른 사람의 특이점도 이용해야 할 것 같구나.”

그 말에 세피로스의 목울대가 울렸다. 특이점이 소멸한 개인에게 남은 앞날은 오직 죽음이었다. 윤설의 말대로 이 계획에 동참한다면 그녀와 함께 죽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와 함께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란다. 적어도 새로운 조율자가 탄생하는 것보다는 죽음을 통해 자유로운 영소의 흐름에 함께 뒤섞이는 것이 인도적인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단다.”

“……이렇게까지 설명한 것을 보아하니 당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보비네를 깨울 생각인 거지?”

“나를 조율자로 만들지 않겠다면 그 방법밖에 없지 않겠느냐. 나는 나 이외의 누군가가 조율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니. 흑익이 조율자가 되는 게 마뜩잖은 것 역시 마찬가지란다.”

윤설은 간간이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폭발음이 들리는 방향을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나는 세피로스 네 뜻대로 저 아이를 희생시킬 수 없단다. 흑익의 의사는 둘째 치고 우선 내가 원하지 않아. 나는 그 아이에게 빚이 있는데 이런 일까지 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단다.”

윤설이 고개를 들어 모두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의 마지막 임무를 하러 갈 것이란다. 배웅은 굳이 필요 없구나. 그렇지요, 예르게네? 당신들이 바란 대로 되어서 정말 잘됐지 않습니까.”

윤설이 시선을 둔 곳에 금색 털을 지닌 오빈족 여인이 서 있었다. 아까 미레아의 일행들과 함께 있던 바람과 여행자의 길잡이인 여신 예르게네였다. 예르게네는 미레아가 이쪽으로 끌려오고 다른 일행들이 그녀의 도움으로 좌표를 추적하여 넘어올 때부터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전투 능력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나 여행자와 바람의 신이었으며, 이 세계의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다른 일행들은 상황이 매우 급하여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예르게네는 지금까지의 일들을 전부 보고 있었다.

윤설이 예르게네를 보고 미소 지었고 예르게네도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걸로 이 세계와 당신들에게 진 빚은 책임지고 청산하겠습니다.”

〔그대들에게 감사한다.〕

“저에게 감사하지 마세요. 그저 마땅한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윤설은 세피로스의 손을 맞잡았다.

“자, 한 가지는 해결책을 찾았고…….”

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썩 개운하지 않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두 사람에게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윤설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네가 말한 대로 이제는 마수를 어떡할지 함께 고민해 보자꾸나.”

“페이릭이 썼던 방법을 또 쓸 수는 없는 건가요?”

“이미 한번 페이릭의 아공간에서 나온 것들이야. 저들도 같은 수법에 두 번은 당하지 않을 거란다.”

“그럼…….”

파울로가 머뭇거리면서 의견을 꺼냈다.

“아리스 녀석이 마수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 가능했잖습니까? 이미 한 번 그리했으니…… 게다가 조율자라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마수들을 하나하나 찾아낼 수 있지 않아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아리스를 시켜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마수를 한곳에 모아 두고 일망타진하는 건…… 어떤가요?”

파울로의 말에 라일라가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아리스는 마수를 모은 것만으로도 마력을 제법 잡아먹었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렇게 모인 마수를 한 번에 쓸어 버릴 힘이 남아 있을까요? 그게 가능했다면 윤설 당신이 진작에 그렇게 했겠지요.”

윤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말한 그 방법은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단다. 첫째, 흑익이 마수를 불러 모으고 결계에 가두는 것만으로도 힘을 다 써야 할 것이야. 자신의 특이점을 이용하고도 마수들을 아공간에 봉인한 것이 고작이었던 페이릭이 그러했듯 말이다. 둘째, 흑익이 그리한다 쳐도 그만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힘은…….”

“그건 제가 하겠어요. 제 특이점을 이용해서요.”

깊게 고민하지 않고 냉큼 대답하는 미레아를 사람들이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 돼! 지금 네가 하는 말의 의미가 뭔지는 알고 있는 거야?”

파울로가 미레아의 팔을 붙들어 맸다. 미레아는 그것을 뿌리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난 곧 죽어!”

미레아의 말에 파울로는 물론 다른 일행들도 일순 술렁였다.

“라우노에게 서리 여신의 특이점을 빼앗기면서 나를 구성하고 있던 특이점이 불완전해졌어. 지금은 세렌트의 영소를 공유하고 있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지만 얼마 못 가. 그렇게 되면 난 죽을 거야.”

“뭐……?”

파울로가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실제로 제대로 와닿지 않는지 다소 어리둥절한 분위기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내 유언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줘.”

“미레아, 이건 또 무슨 말입니까?”

율비네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묻자 라일라가 미레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건 아직 모르는 거잖아, 미레아!”

“아니, 내 수명은 이제 곧이야. 확실해.”

“미레아!”

“미레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레아는 그들을 모두 제지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어떡해? 방법이 있다잖아! 아리스가 조율자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잖아! 난 어차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잖아! 목숨은 지금 같은 순간에 쓰라고 있는 거야!”

그 말에 파울로가 벌컥 화를 내었다.

“너 바보야? 아리스가 조율자가 되는 것을 막겠다고 네 목숨을 버리면 다들 퍽이나 좋아하겠다!”

미레아는 혼란스러워하는 일행들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그러더니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제 목숨은…… 얼마 남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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