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라우노가 죽으면서 내뿜은 마력들이 하늘 위에서 번쩍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아리스는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경악에 가득한 얼굴을 했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마수가 라우노의 부름에 응답하여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저 자식, 죽기 전에 마수들을 불러 모았어!”
세피로스가 혀를 쯧 찼다. 윤설 역시 상황을 파악하고는 얼굴을 굳혔다.
“이 땅의 모든 마수가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구나.”
“일단 피해!”
아리스가 비틀거리는 세피로스를 번쩍 들쳐 메고 달아났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에게 외쳤다.
“내가 마수들을 막을게요. 파울로는 여기서 탈출할 방법을 찾아보세요. 어서!”
“하지만 아리스 너는?!”
아리스는 대답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에 미레아는 덜컹거리는 심정으로 물었다.
“너! 설마 아직도 조율자가 될 생각이야?!”
아리스는 대답 없이 빠르게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아리스, 안 돼!”
미레아의 외침에도 아리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부축 중인 세피로스와 함께 그들이 지금까지 지키고 있던 중앙 제어실의 영소 제어 콘솔에 접근하여 그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허공에 다음과 같은 글씨가 나타났다. 아리스는 읽을 수 없었지만 세피로스는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새로운 조율자의 등록을 승인하시겠습니까?」
세피로스는 아리스와 눈을 맞췄다. 현재 조율자의 등록을 허락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은 세피로스밖에 없었다.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피로스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글자를 훑었다.
“네.”
그러자 중앙 제어실의 불이 다시 돌아왔다. 아리스는 영소의 흐름이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날개가 폭발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영소의 격한 흐름이 그를 덮쳤다.
“아리스, 너…….”
미레아가 이를 꽉 물었다. 아리스는 서리 여신의 세상에게 끝을 고하고는 자신이 새로운 조율자가 되었다.
결국, 그렇게 되고 만 것이었다.
* * *
아리스는 새로운 상황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마수들은 영소가 풍부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성미 급한 몇몇은 벌써 입을 쩍 벌리고 아리스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조율자가 되었다 해도 아리스의 외향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그의 등 뒤에는 한 쌍이 아닌 세 쌍의 검은 날개가 있었다. 그야말로 신이 강림한 것 같은 존재감이었다. 그는 날개를 활짝 펴고 마수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지금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수를 전부 베어 내는 일도.
― 아리스, 너 정말 괜찮아……?
불안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페니드란의 검 손잡이를 고쳐 쥐며 아리스가 공격 자세를 취하였다.
“괜찮아.”
새로운 조율자는 세계의 권한을 끌어다 쓰는 것이 아직은 어색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은 마수가 아닌 자신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튀어나온 마수를 페니드란으로 베어 내고는 수많은 마력구를 만들어 내 마수들이 모여 있는 한가운데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폭발이 산발적으로 일어나 마수들을 터트렸다. 아리스는 상당히 무기질적인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전 같으면 세계의 통제권을 일부나마 자신에게 돌리는 것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느꼈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마수를 없애는 것이 아리스의 목적이라는 것뿐, 자신의 감정은 중요치 않았다.
세피로스는 그런 아리스를 바라보며 비틀거리다 기어이 피를 토했다. 죄책감은 없었다.
그가 휘청여 쓰러지려는 것을 누군가가 받더니 달리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의식이 점멸하는 것을 느끼며 세피로스는 눈을 감았다.
* * *
쿤둘렌과 파울로는 다른 사람들을 그들이 있던 중앙 제어실의 반대편으로 피난시켰다. 중앙 제어실은 라우노가 만들어 낸 구멍으로 인해 천장 한쪽이 완전히 무너졌고 그쪽을 통해 마수가 들어오려 했다. 하지만 미레아는 율비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봤다.
“어서요, 미레아! 여기 있다가는 아리스에게 방해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냐, 아리스를 말려야 해. 내가 남을게요! 내가 남아서……!”
“지금 싸움은커녕 움직일 힘도 없으면서 저기 남아 있으면 마수 먹이밖에 더 되겠습니까?!”
율비네는 이를 으득 갈았다. 자신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리스가 새로운 조율자가 되는 것은 율비네 역시 탐탁지 않았다. 그런 일은 한사코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아리스를 뜯어말리자니 한발 늦은 것은 둘째 치고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율비네나 파울로가 감당할 수 없는 범위의 싸움이었다. 미레아는 율비네의 말에서 무언가를 떠올렸다.
“마수의 먹이…… 마수의 먹이라…….”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미레아가 세렌트에게 말을 걸었다.
“세렌트 너…….”
― 안 돼.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 무엇이 되었든 지금은 안 돼. 미레아는 지금 무언가를 할 만한 몸 상태가 아니란 말이야!
“아, 세렌트!”
인내심이 바닥난 미레아가 벌컥 화를 내었다.
“이대로 끝내면 무의미해! 근본적인 문제점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잖아. 안 된단 말이야!”
미레아의 말에 세렌트와의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한 율비네가 물었다.
“근본적인 문제점이라니요?”
“이게 다 무엇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해요? 마수 때문이잖아요? 마수 때문에 고대 인류가 위협당했고, 이 세계로 건너왔지만,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지요. 거기에 페이릭의 희생으로 마수가 아공간에 봉인되었지만 결국 뿔이 꺾인 보비네를 대신하여 서리 여신이란 존재를 만들었고요. 하지만 마수들은 결국 방법을 찾아내서 데르카이드란 존재를 만들었고, 100년 전에는 마수 대전이 일어났으며 그게 지금까지 쭉 이어져 오는 거잖아요.”
미레아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라우노와 아리스가 태어난 것도 마수 때문, 그들이 고통받은 것도 결국 마수 때문! 마수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 비극은 끝없이 이어질 거예요. 3,000년 전부터 그리했듯 말이지요!”
“그래서 마수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쿤둘렌이 묻자 그의 어깨에 들쳐 메어 있던 세피로스가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마수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었다면…… 진작에 해결했을 거야. 텔라인이 100년 동안 그 고생을 하지 않았겠지. 설과 페이릭도 실패했는데 우리로서는…….”
미레아는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하하, 너는 포기할 생각이 없구나.”
세피로스가 질렸다는 어투로 말하자 미레아는 자신의 다리로 달리기 위해 끙끙거리며 대꾸했다.
“당연하잖아요? 여기서 포기해 봤자 뭐가 돼요? 방법이 없으면 만들면 되는 것이고 실패를 두려워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시도라도 해야 최소한 후회는 남지 않잖아요.”
“방법이라…….”
파울로의 품 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윤설이 미레아의 말을 곱씹었다. 윤설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육체적으로 한계에 달한 미레아, 그저 평범한 인간인 율비네, 어떤 일이 있다 해도 모두를 지탱해 주는 파울로,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쿤둘렌과 라일라 그리고…… 윤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친 세피로스. 그런 세피로스를 차마 버리지 못하는 일행들.
“당신들은 동료지?”
윤설의 말에 그들은 새삼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저기서 싸우고 있는 흑익도 너희의 동료지? 그것도 아주 소중한.”
“당연하지요.”
미레아의 단언에 세피로스를 제외한 일행들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제안할 것이 있단다. 마수는 몰라도 최소한 새로운 조율자의 탄생을 막는 방법이란다.”
윤설의 말에 미레아가 화색을 띄웠다.
“그런 방법이 있으면 진작에 말씀하지 않고……!”
하지만 윤설은 차갑게 식은 얼굴을 했다. 그녀는 조율자일 때와 같이 무기질적인 얼굴로 미레아에게 말했다.
“기뻐하기엔 일러. 내가 말하는 방법은 나와 함께 죽어 달라는 소리와 같은 거니까.”
그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윤설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하겠니?”
그때, 쿤둘렌이 둘러메고 있던 세피로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일단 자세한 이야기라도 들어 보지. 설, 그 방법이란 게 무엇이야?”
설은 말하기를 주저했다. 아직 세피로스를 완전히 믿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쿤둘렌의 어깨 위에서 내려오더니 비틀거리며 설에게 다가갔다.
“설, 죽으려는 거야?”
“그래야 한다면.”
“어째서……? 지금은 이제 조율자가 아닌데?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해방했는데…….”
“세피로스, 네 말대로 나는 지금 더없이 자유로워. 비록 이런 몸이긴 하지만.”
운신조차 힘든 가녀린 몸을 파울로에게 맡긴 윤설이 쓴웃음을 지었다.
“조율자의 상태였을 때는 죽음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나는 이제 비로소 죽을 수 있는 몸이 되었어.”
그 말에 세피로스는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을 했다. 300년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을 사는 동안 세피로스는 자신보다 수명이 짧은 자들을 많이 보냈었다. 수많은 죽음을 보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피로스는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은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생명체들이 가진 권리였다. 하지만 조율자였던 윤설은 어떠했던가. 그 자리는 사는 것도, 죽은 것도 제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윤설은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내 의도야 어쨌든 간에 당신은 그런 자유를 간신히 얻은 것이로구나. 내가 당신에게 그토록 주고 싶었던 자유를.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세피로스 역시 설에게 대답할 수 있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나는 어때? 나는 당신이라면 함께 죽어 줄 수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