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망설임 없이 자신의 급소를 노린 미레아에게 세피로스는 싱긋 웃어 보았다.
“네가 이전 같았으면 나를 벨 수 없다고 고민했을 텐데, 훌륭해. 싸움은 그렇게 하는 거다.”
세피로스는 미레아에게 여전히 중요한 사람이었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또 다른 소중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쪽이 더 괴로웠다. 미레아는 더 싸우고 싶었지만 조금 전의 공격이 마지막이었다. 세렌트가 경고한 30초의 시간을 다 쓴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기우뚱했다.
“젠장…… 겨우 이 정도로…….”
미레아는 가물가물 감기려는 눈을 부릅뜨며 탄식했다. 하지만 미레아의 노력이 허사인 것은 아니었다.
“잘했습니다, 미레아.”
뒤에서 율비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레아의 뒤쪽인 세피로스의 사각 지역에서 전력을 가다듬은 파울로와 율비네가 튀어나왔다. 그들 역시 망설임 없이 세피로스를 공격했다. 미레아의 예상대로 마력이 거의 바닥난 세피로스는 그들의 빠른 공격을 막아 낼 만한 마법을 충분히 구사할 수 없었다. 얇아진 방어막이 부서졌고 세피로스의 복부를 율비네의 창이 꿰뚫었다.
그 순간 파울로가 세피로스를 걷어차자 그의 몸이 뒤쪽으로 꺾였다. 바닥에 쓰러지는 세피로스는 머리를 부딪쳐 눈을 찡그렸고 그런 그의 목 바로 옆에 파울로의 대검이 꽂혔다. 파울로는 하늘을 보고 대자로 누워 있는 세피로스의 몸 위에 반쯤 올라탄 채 숨을 골랐다.
“이제, 포기해…….”
창에 꿰뚫린 복부에서는 피가 울컥울컥 나오고 있었지만 세피로스의 얼굴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포기한 건 아니지만…… 조금 전 마법들을 무리하게 여러 군데에 펼치려 했더니 마력 고갈이 일어나기 직전이라 일어날 기운은 없다. 부상이 심하기도 하고.”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쿨럭거리면서 기침을 했다. 몸을 들썩일 때마다 복부와 입을 통해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나를 쓰러트려도 아리스 녀석 생각은 아직 변하지 않았어.”
율비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미레아가 절뚝거리며 세피로스 곁으로 걸어왔다.
“세피로스.”
세피로스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은 미레아가 그를 불렀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세피로스…….”
세피로스가 미레아에게 푹 꺼진 눈으로 말했다.
“너희는 너무 물러. 기회가 생겼으면 나를 죽였어야지.”
“하지만 세피로스.”
미레아가 말을 이으려 했지만 세피로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너는 잘못하지 않았어. 그저…… 나와 생각이 달랐던 것뿐이야.”
“그래도!”
“혹시 내가 틀렸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건가? 내 선택에 후회는 없어.”
“아니, 그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에요. 세피로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나는…….”
“나도 네게 미안한 구석이 있지만, 사과는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도 하지 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윤설이 자신을 품에 안고 있는 쿤둘렌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를 그의 곁으로 데려다 다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물기가 조금 어려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온갖 감정에 벗어나 초탈하던 그녀에게 육신이 주어지면서 감정마저 다시 깃든 것이었다.
쿤둘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윤설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세피로스는 윤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제법 뜻밖의 일이라 조금 놀랐다. 윤설이 세피로스의 머리맡에 꿇어앉고는 그의 머리가 자신의 무릎을 베도록 자세를 잡았다.
“……설?”
윤설이 어딘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세피로스, 그만해. 이제…… 그만하자.”
“난, 당신을 자유롭게 해 줄 거야.”
“알아. 알고 있어.”
설이 피와 체액이 엉겨 붙어 지저분해진 세피로스의 은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빗었다. 그러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바라지 않았어. 지금도 그래.”
“설, 당신은 괜찮다고 하지만 남겨진 나는 그렇지 못했어.”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차라리 당신이 페이릭과 나, 이렇게 셋이 함께 동결에 들어가자 그랬을 때 그 말을 들었으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을까?”
“그때 일은 생각하지 마.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야. 그런 식으로 도망치려 하면 안 됐었어.”
윤설은 괴로운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페이릭이 그렇게 된 것은 전부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거기에 당시의 나는 네가 받을 상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어. 그래서 내 멋대로 선택했던 거야.”
그리고는 라우노와 싸우고 있는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나나 페이릭 같은 사람이 나오는 일은 없어야 해.”
* * *
라우노는 세피로스가 쓰러진 것을 보며 쾌활하게 웃었다.
“저들이 한때는 가장 믿었던 자를 베어 내다니, 일이 참 재미있게 돌아가지 않나요?”
그 말에 아리스 역시 눈동자를 굴려 세피로스의 상황을 힐끔 보고는 혀를 찼다.
“세피로스가 쓰러졌다 해도 나는 아직 건재한걸. 내 계획을 수정할 생각은 없어.”
“과연 그럴까요?”
라우노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하자 아리스는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공격하는 것을 멈추었다. 몸을 훌쩍 뒤로 물린 아리스는 라우노의 의중을 가늠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반응이 라우노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이 공간에 서리 여신의 신성력이 없어진 지금은 이런 것도 가능하답니다.”
라우노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힘을 개방했다. 그러자 주변의 공간들이 갈라지면서 안에서 마수들이 튀어나왔다. 신성력으로 보호받지 못하니 마수들이 이 공간을 침범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수가 꽤 많았다. 아리스는 주변에 꽉 들어찬 마수들을 아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자, 형제들이여.”
라우노가 사복 검을 들어 아리스를 지목했다.
“식사 시간입니다.”
아리스는 다급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외쳤다.
“젠장, 다들 거기서 피해!”
그렇지 않아도 세피로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라우노가 힘을 개방하자마자 공기의 흐름이 불길하다는 것을 느낀 차였다.
“세피로스, 일어나요.”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꼴이 웃겼지만, 파울로는 세피로스를 쿤둘렌의 어깨 위에 들쳐 메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윤설은 자신이 안아 들었다. 세피로스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난 두고 가…… 난 너희를 죽이려고 했잖아. 내 생각은 아직 변하지 않았어.”
“지금은 그냥 입이나 다물어요. 어차피 이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미레아는 율비네가 부축했다.
“이런, 이쪽은 이제 전력이라고 할 만한 게……!”
율비네가 공간을 꽉 채운 마수들을 보고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아리스는 사납게 웃었다.
“페니드란!”
― 알고 있어! 난 준비됐다고!
아리스의 부름에 페니드란이 윙윙거리며 울리는 소리를 내었다. 라우노는 뒤늦게 아리스가 페니드란을 이용해 마수들을 봉인한 것을 상기했다. 하지만 아리스가 노리는 것은 일전처럼 단순히 마수를 봉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리스가 마력을 방출하자 다른 일행들을 먹잇감으로 인식했던 마수들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라우노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마수들은 지금 라우노의 명령보다 아리스의 마력에 현혹되어 그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아리스가 페니드란을 휘두르자 그의 주변에 있던 공기가 수천, 수만 갈래로 갈라지며 칼날처럼 마수들을 난자하며 지나갔다. 마수들이 재가 되어 바스스 흩어졌다.
아리스가 눈을 희번덕 뜨며 손을 까닥거렸다.
“어디 더 해 봐.”
“과연, 마력량도 나와 맞먹는데 그놈의 마검이 있으니 거슬려 죽겠네요.”
라우노는 사복 검을 아리스에게 휘둘렀다. 하지만 그 역시 힘에 겨워 보였다. 지금까지 출혈량이 너무 많았다.
승부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정말로 순식간에 일어났다.
아리스가 사복 검의 움직임이 잠시 굼떠진 틈을 타 파고들었고 라우노의 복부를 깊게 찔렀다. 그는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손에서 사복 검을 떨어트리고 추락했다. 한 번에 심장을 꿰뚫지는 못했지만, 굵은 정맥을 끊은 탓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라우노가 숨이 끊어지기 전 포기하지 않고 반격을 준비하던 그때였다. 쿤둘렌의 부축을 받고 있던 세피로스가 공간 전이를 하여 라우노의 뒤쪽으로 이동하더니 숨겨 두었던 단검으로 라우노의 목을 그었다.
털썩.
땅에 떨어진 라우노는 땅에 누워 거친 숨을 내뱉었다. 즉사는 아니었지만, 그의 수명은 몇 분…… 아니, 몇 초 남지 않았다.
“세피로스.”
아리스가 당황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라우노의 숨을 완전히 끊어 놓기 위해 그의 옆으로 내려앉았고 아리스가 그의 뒤를 따랐다. 라우노가 새하얀 얼굴을 세피로스에게 돌렸다. 그의 두 눈동자에 비친 세피로스의 얼굴은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라우노는 순간 자신을 니콜라우스라고 부를 때 보였던 그런 따스한 태도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런 생각을 한 것에 대한 자기혐오가 몸을 훑고 지나갔다.
만약 죽는다면 자신의 숨통을 끊는 사람은 세피로스이지 않을까, 라우노는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그때 세피로스는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지금은 궁금증이 풀리기는 했으나 후련하지는 않았다.
그래, 고작 해 봐야 그런 얼굴이란 말이지.
라우노는 어떻게 해서든 세피로스의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네…… 당신의 승리입니다.”
그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아리스가 페니드란을 양손으로 잡고 들어 올렸다. 라우노는 반쯤 체념한 얼굴로 그를 보았지만, 입술에는 비틀린 웃음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라우노의 몸에 붉은 스파크가 일더니 그들이 있는 공간 전체로 확산하였다. 땅과 하늘에 수많은 붉은 별이 뜬 것 같은 광경이었다.
라우노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으려 했던 아리스는 그 폭발적인 영소와 마력의 흐름에 인상을 썼다. 바람이 거세게 일었고 라우노의 몸은 빛에 삼켜져 사라졌다. 그 직전에 라우노는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세피로스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 혼란 속에서도 세피로스는 라우노를 응시하고 있었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지만, 라우노의 바람과는 달리 세피로스는 미간만 살짝 좁혔을 뿐이었다. 라우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끝까지 마음에 안 들어…….”
여운이 남는 죽음 따위는 그에게 필요 없었다. 그저 이것으로 라우노의 삶은 끝인 것이다. 한때 백익 니콜라우스라 불리던 영웅의 최후는 타락한 이름에 걸맞게 비루한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