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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207화 (207/257)

207화.

미레아는 차마 아리스를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아리스만 얼떨떨한 얼굴로 세피로스와 조율자를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미레아에게 시선을 향했다.

“미레아, 너는 저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

“…….”

“저게 무슨 소리냐고.”

“미안해.”

“왜 사과를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어.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 왜 사과를 하는 건데?”

그렇게 다그쳐 봤자 미레아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구구절절 설명할 여유도 없을뿐더러 자신의 입으로 진실을 말할 용기도 없었다.

“한마디로 당신은 농락당했다는 소리지요. 서리 여신이란 존재와 미레아 제인스터에게.”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미레아가 반발하자 세피로스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라우노는 마법으로 사복 검이 자신의 손안에 날아들게 하고 세피로스의 팔을 베었다. 세피로스가 라우노의 목을 놓고 뒤로 몸을 훌쩍 물려 피했으나 완전히 피하지는 못한 바람에 그의 팔에 깊은 자상이 남았다.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아. 그러니까 라우노의 말에 따르면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게 전부 서리 여신의 의도였다는…… 그런 소리야?”

미레아는 자신의 입으로 그것을 긍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재차 물었다.

“이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해 내게 너를 보냈다는 것이 사실이야?”

“맞아, 내가 그랬어.”

쿤둘렌의 품에 안겨 있던 윤설이 대신 대답했다. 아리스가 다소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윤설은 단호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내가 설계한 것이란다. 선하고 쉽게 꺾이지 않을 강인한 영소들을 모아 내 조각들을 만들어 냈지. 그리고 너와 얽히도록 인연을 만들었단다. 그 결과 너는 미레아 제인스터를 만나게 되었고, 미레아의 올곧은 마음에 감화되기를 기대했지. 맞아, 네가 미레아에게 품은 그 마음은 전부 내가 그렇게 되도록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란다, 아이야.”

아리스는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들었고 미레아의 두 눈이 흔들렸다.

“이런 말을 갑자기 해서 네가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이해해. 하지만 이 사실을 알려 줌으로써 네 결정을 돌릴 수 있다면 어쩔 수 없었구나.”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미레아를 좋아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소리인가요? 그게 다 거짓이니까?”

아리스의 말에 미레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하지만 윤설의 말이 옳았다. 숨기고 싶었지만 언젠가는 아리스도 알아야 하는 내용이었고, 이렇게 된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그런 의미는 아니란다, 흑익. 다만, 내가 만들어 낸 그러한 감정 때문에 네가 조율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면 그만둬 주길 바라는구나. 내 업보는 내가 지고 가겠다. 다시 내게 권한을 돌리면…….”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리스, 지금껏 서리 여신을 대신할 조율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까?”

윤설과의 대화를 끊고 율비네가 묻는 말에 미레아를 포함한 다른 일행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래.”

아리스가 힘겹게 털어놓자 미레아가 아리스의 앞을 막아서더니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제정신이야?!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알고 네가 나서?! 애초에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네가 그런 기분이 된 건 다 거짓……!”

하지만 아리스는 시선을 미레아에게 두지 않고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나는 서리 여신, 당신의 세계에 끝을 고하고 저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어요. 네, 당신의 세계는 비로소 종말을 맞이하는 겁니다.”

“아리스, 미쳤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미레아와 율비네가 아우성치었지만, 그는 조용히 페니드란을 들고 라우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미레아가 그의 옷깃을 붙잡으려 했지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세피로스에 의해 행동이 저지되었다.

그사이 아리스는 사복 검을 들고 그들을 관망 중인 라우노에게 다가갔다. 그는 세피로스가 여기저기 쳐 둔 방어막 때문에 시스템을 파괴하지 못하고 잠시 틈이 생긴 사이 바닥난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라우노에게 페니드란을 겨누자 지금껏 이상할 정도로 잠잠했던 그의 마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 아리스, 정말 할 거야?

아리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말을 들었다 해도 나밖에 없잖아.”

― 하지만…….

“페니드란, 그러니 지금은 네 힘을 빌려줘.”

아리스는 라우노에게 달려들었다. 라우노가 무엇을 꾸미든 간에 그 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같은 데르카이드인 자신밖에 없었다. 라우노가 거대한 불덩어리를 만들어 아리스에게 날렸고 아리스는 페니드란으로 그것을 베어 내어 흩트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 싸움에 감히 끼지 못했다. 미레아는 멍한 얼굴로 아리스의 싸움을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세피로스에게 따져 물었다.

“세피로스! 세피로스는 알고 있었지요?! 아리스가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서리 여신의 조각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고도 아리스를 말리지 않은 것도! 아리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그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했고, 바랐다.”

미레아는 이제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아니, 아니지! 아리스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잖아요! 자기가 진짜 무얼 원하는지 제대로 보지 못한단 말이야! 그런데 옆에서 부추기기만 하고! 나를 막지 마! 나라도 아리스를 말릴 거야!”

그리고는 세렌트를 고쳐 잡았다.

“세렌트, 너는 지금 마법 쓸 수 있어?”

지금 상황에서 데르카이드가 마법을 쓸 수 있다면 그 데르카이드가 만든 마검 역시 마법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미레아가 세렌트에게 속삭였다. 그녀의 마검은 재빨리 대답했다.

― 응. 마력을 조금 회복한 덕도 있고 지금 이 상황에서도 나는 마법을 쓸 수 있어. 아리스에게서 기인한 마검이니까.

“그럼 내 마력을 끌어다 써도 되니까 도와줘.”

― 하지만 미레아. 지금 네 몸 상태는 말이 아니라고! 내가 미레아의 마력을 끌어다 쓰면 이번에야말로 죽을 수도 있어!

“라우노가 제 뜻대로 해도 우린 죽어.”

미레아의 말에 세렌트가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라우노가 제멋대로 구는 것을 막고, 세피로스가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실행하는 것도 막고! 무엇보다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에 동참 중인 아리스를 두들겨 패서라도 말릴 거야!”

세피로스의 용주가 호박색으로 밝게 빛났다.

“미레아, 나는 너라고 해서 봐줄 생각은 없다.”

“잘됐네요. 나도 똑같은 마음이니까.”

하지만 노련한 용과 인간의 싸움이었다. 어느 쪽이 불리한지는 안 봐도 뻔했다.

“아아, 나도 모르겠다.”

파울로가 미레아의 옆에 나란히 섰다.

“파울로, 굳이 이 싸움에 동참하지 않아도 괜찮아.”

미레아의 만류에 파울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말려도 듣지 않고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너는 더 무리하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아리스를 뜯어말릴 생각인데 좀 끼워 주세요.”

율비네가 자신의 창끝을 바닥에 쿵 찍으며 불만 가득한 얼굴로 라우노와 싸움 중인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쿤둘렌, 조율자님을 부탁합니다.”

파울로의 말에 마법을 쓰지 못하는 쿤둘렌은 그것이 자신의 최선이라는 것에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세피로스가 한숨을 쉬며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안타까움조차 없었다. 그저 귀찮은 것을 보는 시선이었다. 셋은 준비 동작도 없이 순식간에 세 방향으로 흩어져 세피로스를 공격했다.

시작은 미레아의 선공이었다. 미레아가 세피로스가 만들어 낸 술식 몇 개를 세렌트로 무력화시키는 사이 파울로가 세피로스의 배후를 노리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몸을 휙 꺾어 파울로의 대검을 맨손으로 막아 보았다.

미레아와 파울로는 침착하게 다음 동작을 준비했고 잠시 틈을 노리며 배회하던 율비네가 벽에 있는 구조물을 밟고 올라가 세피로스의 머리 위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그 역시 손쉽게 피하며 미레아와 파울로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몇 년이나 보았지?”

미레아가 순간 멈칫했지만, 파울로는 그 말에 현혹되지 않았다.

“인제 와서 미레아의 대부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대략 20년이던가. 그만큼 너희에 대한 것은 전부 알고 있다는 소리다. 공격 패턴이라든가.”

미레아에게는 수많은 검술을 배우며 터득한 기술이 있었다. 아리스가 된통 당했듯 온갖 패턴을 섞어 예측할 수 없는 공격을 만들어 내는 미레아였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그녀의 검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사소한 습관까지 알고 있었다.

세피로스의 공격에 파울로가 먼저 벽에 등을 부닥치며 처박혔고 그 위에 미레아가 엎어졌다. 세피로스는 율비네의 창을 피하고는 바로 그녀의 코앞에서 마법을 전개했다.

“그리고 자네는 공격이 너무 정직하지.”

“율비네!”

미레아가 기침하며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다급하게 세렌트를 던져 세피로스가 율비네를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 낸 술식을 파훼했다. 율비네가 몸을 뒤로 물리자 세피로스는 여기저기에 동시다발적인 마법을 전개했다.

세렌트가 저 혼자 허공을 가로지르며 미레아의 손으로 돌아왔다.

“세렌트, 내 몸을 강화해!”

― 뭐? 지금까지 네가 너무 무리한 덕분에 쓸 수 있는 마력이 미약해서 오래는 못 갈 거야. 그리고 이 이상 마력을 쓰면 마력 고갈이 일어나서 네 몸과 영혼에도 타격이……!

“미안해. 하지만 부탁해. 잠깐이라도 좋아. 세피로스를 막을 때까지만 제발……! 세피로스도 마력을 많이 썼기 때문에 곧 한계란 말이야. 내게 조금만 힘을 빌려준다면 아직 승산이 있어!”

자신의 애원에 세렌트가 고민하는 것이 미레아에게 느껴졌다.

― 30초.

세렌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경고했다.

― 30초 그 이상은 안 돼.

“충분해.”

미레아가 지면을 박차고 세피로스가 행한 술식 중 가장 가까운 것을 향해 달려들었다. 미레아의 근육이 내는 힘과 반사 신경이 한계까지 끌어 올려진 덕분에 번개처럼 빠른 이동이 가능했다.

미레아는 그것을 곧장 벤 다음에 다음 술식을 향해 도약했다. 술식을 파훼하자마자 벽을 비스듬하게 딛고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술식을 파훼하면서 부지런히 다음 움직임을 준비했다.

그렇게 25초 만에 세피로스가 만들어 낸 모든 술식을 파훼하자 입가에 뜨뜻미지근한 것이 와 닿았다. 거추장스러워서 혀를 날름거려 훔치자 피 맛이 났다. 무리해서 그런지 코피가 흐른 것이었다.

미레아는 마지막 남은 5초를 세피로스를 공격하는 데 썼다. 세피로스가 자신의 몸 주변에 방어막을 쳤지만, 미레아가 세렌트를 찔러 넣는 것이 더 빨랐다. 하지만 시간이 충분하진 못하여 세피로스의 목을 완전히 베지는 못하고 얕은 자상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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