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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206화 (206/257)

206화.

“저 자신도 지금까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어요.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게다가 저는 이 세계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겼어요. 이런 방법 이외에는 그 죗값을 청산할 만한 수단이 없는걸요.”

그 말에 아리스의 팔을 붙들고 있던 윤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리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자신과 미레아 덕분이었다. 윤설은 그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조각들을 만들 때 이런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아리스란 존재가 이 세계의 종말을 가져오고자 하는 마음을 풀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알툰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리스는 이 세계의 변칙. 그의 행동은 조율자의 생각과 의지대로 흘러갈 리 없었다. 그것을 전부 고려해서 계획을 세웠으나 윤설은 결국 자신의 실패를 눈앞에서 목격해야 했다.

자신의 잘못을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하였어도 윤설이 새로운 육신으로 낼 수 있는 힘이라고는 갓난아이 같은 정도뿐이었다. 마력으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지만 이제 막 만든 몸에 수천 년 동안 육신을 움직여 본 적이 없는 윤설은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그래, 그런 계획이었습니까?”

결계 밖에서 라우노가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설이 조율자의 지위에서 해방되면 당신이 조율자가 될 생각이었나요?”

아리스는 적대감 가득한 얼굴로 라우노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라우노는 한쪽 팔을 잃고도 사복검을 놓지 않았다. 출혈량이 많아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얬지만, 그는 지치지도 않고 사복검을 양날 검 형태로 바꿔 결계를 찔러 들어왔다. 검과 결계가 만나는 곳에서 마력끼리 반발이 일어나 여러 빛깔의 스파크가 튀었다.

“하,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요. 네까짓 게? 감히 네까짓 게?!”

“그래, 감히 나라 해도!”

아리스가 결계를 보강하며 라우노를 막아 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이런 식의 것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그 녀석이 이 세상이 멸망하는 것 따위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라우노는 아리스의 기세에 밀려 결계에서 튕겨 나갔다.

아리스가 결계 안에 윤설을 남겨 두고 뛰쳐나가 라우노의 목을 노리고 페니드란을 휘둘렀다. 라우노의 사복검이 그것을 막아 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군요. 이 세계를 구하고 싶었으면 윤설이 계속 조율자의 역할을 하는 쪽이 더 좋지 않은가요?”

“사실 지금까지는 세피로스의 계획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를 막을 자신이 없었어. 세피로스는 이 세계가 어떻게 되든 정말로 윤설을 조율자 자리에서 해방할 생각인 것 같으니 다른 대안이 없어. 나도 될 수 있으면 나 자신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단 말이야. 하지만 내게는 업보가 있지. 이유야 어찌 되었든 변명할 수 없는 죄가 있어. 난 이것에 대해 속죄를 해야 해. 게다가 신탁을 떼어 내려면 그런 방법밖에 없잖아. 나는 이제 신탁 따위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언제 올지도 모르는 종말을 기다리며 벌벌 떠느니,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얼른 신탁을 실행해 버리고 나는 조율자가 되어 너를 물리치고 영소의 흐름이나 관장하며 영원히 잠이나 잘 거다! 그편이 마음이 편하다고!”

그의 얼굴에는 조소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어리석군요. 당신이 그런 생각을 품게 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뭐라고?”

아리스가 더 깊게 물어보기도 전에 라우노가 자신이 밟고 있는 비공정의 외벽을 폭발시켰다.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아리스는 그것에 휘말려 파편에 얻어맞고 뒤로 굴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라우노를 눈으로 좇으니 그는 폭발로 파괴된 외벽 안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따라오세요! 당신에게 진실을 알려 주겠어요.”

그러면서 어두운 내부로 향했다. 윤설이 자신의 석장을 찾아 짚고는 아리스에게 말했다.

“나도 데려가! 라우노는 영소와 조율자의 지위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중앙 제어실에 접근할 생각이야! 그곳이 파괴되면 그때야말로 정말 끝이야! 사수해야 해!”

윤설은 라우노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이 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아리스가 진실을 알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스스로 조율자가 되겠다고 한 아리스를 막을 방법 역시 라우노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을 알려 주는 것밖에 없어 보였다. 그 과정에서 몇몇 사람들이 상처를 입게 되겠지만, 그보다는 아리스와 라우노를 막는 것이 더 시급했다.

아리스는 라우노가 만든 구멍과 윤설을 번갈아 가면서 보다가 혀를 쯧 찼다. 그는 윤설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아 들고 구멍 안으로 훌쩍 뛰어들었다.

* * *

사방이 어두워지자 사람들이 재빨리 손전등을 켜 들었다. 그러자 세피로스가 있던 중앙 제어실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세피로스는 밝아진 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세피로스, 지금 무슨 짓을 했어요?!”

미레아가 잔뜩 경계한 태도로 그렇게 물었지만 세피로스는 고요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기다려. 그가 올 거야.”

“누가 온다는…….”

미레아의 뒷말은 쿤둘렌의 떨리는 목소리에 묻혔다.

“이럴 수가…….”

“왜요? 무슨 일이에요?”

파울로의 물음에 쿤둘렌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항상 침착하던 그의 눈동자는 당혹감으로 가득 들어차 위아래로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석을 꺼내 마력을 주입하려다 연거푸 실패하고는 현실을 인정했다.

“제가 지금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어두워서 빛을 만들어 내려 그랬는데 마법 술식이 전혀 반응하지 않아요.”

쿤둘렌의 말에 일행들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대답한 것은 세피로스였다.

“당연한 거야. 지금은 이전처럼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할 거다. 이 세계의 법칙이라고 할 만한 게 사라졌으니 그것을 기초로 만들어 낸 술식들은 통하지 않게 되었지. 지금 마법을 사용 할 수 있는 것은 술식을 몸 안에서 변형시키는 것이 가능한 용이라던가 아니면…….”

세피로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장이 폭발음과 함께 무너졌다. 먼지 연기 사이로 하얀 날개가 보였다. 세피로스는 느릿하게 날개의 주인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 세계의 법칙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처음부터 마력을 자신의 의지대로 쓸 수 있는 데르카이드뿐일 거다.”

라우노가 자신의 마력으로 자유자재로 모양을 변형시키며 조종하는 사복 검을 채찍 형태로 만들어 땅을 찰싹거리는 소리가 나게 한 번 내리쳤다.

그의 왼팔은 어깨 아래부터 없었는데 절단부가 지혈되지 않아 선혈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라우노는 말도 없이 다짜고짜 그들이 있는 공간 전체가 휘말리도록 사복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것을 본 세피로스가 마법으로 사방을 보호막으로 막았다. 기습이 먹히질 않자 라우노는 방해꾼을 먼저 없앨 생각으로 세피로스를 공격했다.

“아리스를 기다리는 거야?”

세피로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라우노는 세피로스의 의중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녀석은 지금 뒤따라오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당신들이 나를 막는 것과 내가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 중, 뭐가 더 빠를지 한번 볼까?”

라우노가 나타난 곳에서 뒤늦게 아리스가 날아들었다. 아리스는 얼른 상황을 파악하더니 라우노의 사복 검을 피하고 있는 다른 일행들에게 방어막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가 품에 안고 있던 윤설을 건넸다.

“조율자님!”

쿤둘렌이 얼른 그녀를 받아 들자 윤설이 색색거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세피로스가 시스템에서 나를 분리하는 바람에 내 권한이 없어졌어. 나를 다시 조율자로 승인하려면 이 시스템에 접근 가능한 사람이 필요한데 지금은 세피로스 말고 그 권한을 가진 사람이 없어!”

“그럼 어떡하죠?”

파울로의 말에 대답은 아리스에게 들려왔다.

“괜찮아.”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리스는 담담한 어투로 한 번 더 말했다.

“괜찮아. 나만 믿어.”

그러면서 몸을 일으키자 윤설이 아리스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아리스가 내려다보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윤설의 손을 뗐다.

“전 괜찮아요.”

그러면서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미레아는 아리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고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무슨 짓을 할 거야?”

“내가 해야 할 일. 나밖에 할 수 없는 일.”

그는 미레아의 손을 잡아 올리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이내 입술을 살짝 떼도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아리스의 숨결이 손등을 간지럽혔다. 미레아가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에 아리스가 얼굴을 바꿔 사나운 눈으로 라우노를 노려보았다. 세피로스와 싸움을 벌이고 있던 라우노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하하, 아리스! 당신에겐 알려 줄 것이 있어서 이곳으로 불러들였어요.”

“당신이 하는 말에는 관심 없어.”

“아니요!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요? 미레아 제인스터에 관한 일이니까요.”

그 말에 아리스의 뒤에서 미레아가 외쳤다.

“말하지 마!”

아리스가 의아한 얼굴로 미레아를 돌아보자 그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절박하게 말했다.

“저 사람 말 듣지 마!”

하지만 미레아의 목소리는 라우노가 웃는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들어 보세요, 아리스!”

“안 돼!”

라우노는 깔깔 웃으면서 세피로스에게 공격을 가했다. 세피로스 역시 라우노의 말에 눈을 찡그리며 이를 갈았다.

“라우노, 지금 와서 그 얘기는 하지 마!”

“지금이니까 하는 겁니다. 그도 알 권리가 있잖아요?”

“당신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미레아, 너는 알고 있어?”

아리스의 질문에 미레아가 눈물이 고인 채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리스, 당신이 선택한 그 고귀한 희생을 하게 만든 원인은 미레아 제인스터이지 않습니까?”

미레아는 퍼뜩 놀라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너 역시 무언가를 할 생각이지?!”

불안했다. 아리스가 자신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라도 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심장이 불안함에 쿵쿵 뛰었고 그 박동에 몸까지 떨려왔다.

세피로스가 사복 검을 저 멀리 날려 버리고 라우노의 목을 움켜쥐고 땅에 처박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라우노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미레아 제인스터에게 품은 마음이 전부 만들어진 것이란 하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뭐?”

“듣지 마!”

미레아가 처절하게 외쳤고 윤설은 눈을 질끈 감아 고개를 돌렸다. 그 반응에 라우노는 더 신나서 말을 이었다.

“미레아 제인스터란 인간은 조율자가 당신에게 보낸 장치란 말입니다!”

“입 다물어.”

세피로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라우노는 컥컥거리면서도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완벽하게 당신의 취향에 부합하는 인간을 만들어 내서 소중한 사람이 되도록 하고, 그녀가 속한 이 세계를 사랑하도록 서리 여신이라 부르는 존재에게 설계되었다는 뜻이지요. 아리스 당신이 그녀에게 품은 마음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요. 처음부터 그리 정했으니까요! 서리 여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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