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05화 (205/257)

205화.

미레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쿤둘렌이 말했다.

“그게 세피로스를 막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로군요?”

“맞아요.”

미레아의 긍정에 사람들은 수긍한 듯싶었다.

“세피로스는 적어도 서리 여신…… 그러니까 조율자님이 줄곧 갇혀 있던 조율자의 방이 있는 곳으로 간 것은 아닐 겁니다. 조율자님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조율자의 일에 부적합하다는 판단이 있을 때 사람들이 그녀를 끌어내릴 것이라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스스로는 그 지위를 포기하지 못하도록 가두어 뒀다 했으니 아마도 조율자의 지위를 해방할 수 있는 수단은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지요. 사실 해방이라는 표현이 옳은지 모르겠군요. 따지고 보면 폐위지요. 뭐, 어쨌든 지금은 그곳이 어디인지 찾아내야 하는군요.”

쿤둘렌의 말에 라일라가 조금 생각하다 말했다.

“이 비공정의 가장 정중앙인 심층부에 해당하는 곳 아닐까요? 보통은 그렇잖아요. 가장 안전한 곳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있기 마련이지요.”

“거기가 어디인데?”

미레아의 다급한 말에 라일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조율자의 방을 찾으려고 영소의 흐름을 추적했었는데 그 반대 방법을 쓰면 되겠지. 영소가 어디에서부터 흘러오는지 역추적을 하면 될 거야. 아무래도 영소의 흐름을 조율하기 전에 영소들을 모아야 하니까 그런 기관이 하나쯤은 있을 것 같아.”

“좋아, 움직이자.”

파울로가 손뼉을 짝 소리가 나게 마주쳤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려고 하는데 율비네가 우뚝 멈춰 섰다.

“저…… 사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얼요?”

“서리 여신을 해방한다는 것이…… 그러니까 조율자의 지위에서 내려온다는 것이 그녀에게 더 행복한 일 아닐까요? 조율자는 벌써 3,000년 동안 이 일을 해 왔습니다. 심지어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방에 갇혀서요. 그런데 이건……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조율자는 평범한 인간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짓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절대로 견딜 수 없는 일이에요. 세피로스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이잖습니까.”

그러자 미레아가 율비네를 견제라도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아리스에 이어서 율비네도 세피로스의 생각에 동참할 계획인 것은 아니지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말로 이게 최선인가 싶어서요…… 그런 부분에서 세피로스의 선택이 이해 가기도 하고…….”

그 말에 사람들의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으면서 저마다 생각하는 바가 있는지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이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침묵을 깬 것은 미레아였다.

“희생을 강요하는 것도 좋지는 않지만 반대로 타인이 멋대로 누군가의 행복을 강요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그러자 파울로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조율자의 희생을 당하게 여기는 것은 미레아가 단순한 냉정하고 이기적인 마음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보기에는 위태로워 보여도 그것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지지해 주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흡사 미레아의 상황과 겹쳐 보였다. 미레아는 누군가를 위한 일이라면 몸을 혹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안위 따위를 걱정하며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미레아에게 있어서 훨씬 더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조율자에게 투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런 발언을 하는 것이었다.

“미레아는 이 상황이 괜찮습니까?”

율비네의 물음에 미레아는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솔직히 말하자면 괜찮지 않아요. 세피로스가 무슨 생각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조율자의 지위를 해제하면 이 세계가 붕괴할 텐데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내지도 못했고…….”

“그러고 보니 세피로스가 아리스에게 이상한 소리를 하였습니다.”

“이상한 소리라고요?”

“종말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종말은 아니라는 소리를 해 댔는데 저는 그게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아리스의 태도가 좀 변했습니다.”

“종말이 우리가 생각하는 형태가 아닐 거라는 소리예요?”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리스에게 물어봐도 대답을 해 주질 않았어요.”

미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우노와 세피로스와는 별개로 아리스 역시 무언가를 벌일 생각인 것 같군요.”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모르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라…….”

“일단 처음 계획처럼 세피로스를 찾아보지요. 라일라, 영소를 추적해 줄래?”

“아, 응! 이쪽이야!”

라일라가 앞장서자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가는 길 중간중간 세피로스의 소행으로 보이는 어린 용들의 시체가 있는 것을 보아 맞게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영소의 농도가 짙어지는 것이 보아하니 가까웠다.

그들은 커다란 문 앞에 도달했다. 용들의 시체가 켜켜이 쌓여 있어서 문틈에 껴 있는 통에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그들은 시체를 치우고 문을 밀어 열었다. 어찌나 무거운지 쿤둘렌이 마법을 써서 힘을 강화하고서야 겨우 완전히 열렸다.

인공적인 조명으로 환하게 밝힌 방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해도 고밀도의 영소에서 내뿜는 빛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 한가운데에 고고하던 은발에 붉은 피를 덕지덕지 묻힌 세피로스가 서 있었다. 세피로스는 인기척에 그들을 돌아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늦었어.”

“세피로스!”

미레아와 다른 이들이 덤벼들기도 전에 그들이 있는 방의 불이 일제히 꺼졌다. 영소가 내뿜던 빛마저.

* * *

그때는 아리스가 막 라우노의 왼팔을 날려 버린 차였다. 라우노는 피가 솟구치는 절단면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승기가 아리스와 조율자의 손에 떨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율자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그때였다.

“이런…….”

라우노와 대치 중인 아리스를 보조하던 조율자의 얼굴에 짙은 낭패감이 서렸다. 그녀의 날개가 빛무리처럼 서서히 흩어졌다. 갑자기 조율자의 지원이 끊기자 아리스가 의아함에 돌아봤다가 날개를 잃은 조율자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목격했다.

“조율자님!”

아리스가 황급히 그녀에게 날아가 작은 몸을 낚아챘다. 조율자가 자신의 몸에 두르고 있던 신성력이 서서히 옅어졌다. 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신성력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놓친 석장이 먼저 바닥에 도달해 땡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아리스는 일단 보호 결계를 치고 조율자를 라우노에게서 지키며 땅에 내려앉았다.

“괜찮습니까?”

조율자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세피로스가…… 세피로스가 나를 폐위시켰어. 그 애들이 세피로스를 막는 데 실패했어.”

조율자는 아니, 조율자였던 윤설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영소의 흐름이 멈췄어…… 이제는 내 뜻대로 흐르지 않아. 난 이제 조율자가 아니야. 나는 그냥… 평범한 인간이야.”

지금까지 초월자와 같은 위압감을 풍기던 그녀의 눈에 나약함이 깃들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이대로는 안 돼.”

조율자는, 아니, 조금 전까지 조율자의 지위에 있던 윤설은 자신의 연약한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라우노가 조소했다.

“하하하! 뭐야? 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내가 원한 대로 되었는걸? 영소의 흐름을 멈추다니, 세피로스는 정말 어리석은 선택을 했구나!”

하지만 아리스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덤덤하기까지 한 어투로 윤설을 달랬다.

“조율자님, 괜찮아요. 잠시 흐름이 멈추었을 뿐이에요. 조율자의 지위가 돌아오면 다시 흐를 거예요. 라슈온은 괜찮을 겁니다.”

그 말에 두서없이 흔들리던 윤설의 눈동자가 아리스를 향했다. 그녀는 아리스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그의 팔을 붙들었다.

“너.”

윤설의 눈에는 불이 붙은 것 같았지만 그것은 분노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내가 너를 믿을 수밖에 없다고는 하나 네가 어리석은 실수를 하는 것까지 보고만 있을 생각인 건 아니란다.”

서리 여신은 아리스의 앞날을 예지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리스의 운명이 서리 여신이라는 존재에게 구속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네가 이 라슈온을 유지하리라 생각했다.”

“네, 맞아요.”

“맞아. 나는 그랬기 때문에 너를 믿었던 것이야. 너는 최악이 아닌 차악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방법은 내가 허락 못 해.”

“어째서죠?”

“나와 같은 자가 또 나오는 것을 막고 싶었으니까! 그런데도 흑익, 너는…… 정말로 내 세계의 종말을 고할 생각이니?”

아리스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안 돼…… 너, 네가 하려는 짓의 무게를 알고는 있는 거야?”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아리스가 이런 생각이란 것쯤은 그가 세피로스에게 가담했을 때 이미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윤설은 아리스에게 말했듯 그를 막을 힘이 없었다. 최악을 피하고자 차악을 선택해야 할 수 있다는 상황이 오더라도 윤설은 자신과 아리스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았었다.

때문에 자신이 제어를 할 수 있는 세피로스의 계획을 막아 아리스의 행동을 막을 생각이었고 그 연장선으로 미레아를 보낸 것이었다. 윤설은 자신 이외의 누군가가 이런 희생을 하는 것 따위는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늦어 버렸다. 미레아는 세피로스를 막지 못하였다.

“어째서죠? 당신은 이미 이 사태를 예견하지 않았던가요?”

“이러한 결과를 예견했지만 나는 그것을 막고자 했어! 네가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단 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그런 일들을 벌인 것인데……! 그 자리는 인간들이 견딜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네 정신을 좀먹고 말아!”

“그건 조율자님도 마찬가지잖아요.”

“나는 괜찮아! 나를,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진 페이릭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라. 너라고 해서……!”

“조율자님. 아니, 윤설. 당신이 페이릭을 생각하며 견뎠듯 저 역시 어떠한 상황에서도 견디게 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있어요.”

아리스는 황궁의 지하 감옥에서 있었던 6일 동안 확신할 수 있었다. 미레아를 생각하면 힘든 순간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그렇다. 미레아만 생각하면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것이 조율자라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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