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04화 (204/257)

204화.

“헉!”

조율자가 목을 감싸고 무릎을 굽혔다. 라우노가 이 세계의 권한 일부를 가져오려고 무리수를 두자 조율자에게도 타격이 갔던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갑자기 마력을 방출하면서 몸에 축적된 마력에 공백이 생긴 틈에 마법으로 그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리고 하늘에서 커다란 정육면체의 구조물을 여러 개 만들어 내더니 그대로 라우노에게 날렸다. 라우노의 양옆에서 두 개가 날아들어 그를 양쪽에서 찍어 눌렀다. 라우노가 급하게 자신의 마력을 끌어 올려 그것을 밀어내려 했지만, 힘에 부치는 듯싶었다.

아리스는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정육면체의 물질들을 이용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라우노가 정육면체 두 개를 가까스로 막아 내고 있는 동안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다른 물체들은 정육면체 모양에서 구체로 모양을 바꿨다.

아리스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구체 중 하나가 분열하더니 손바닥 크기의 화살촉 모양으로 다시 변했다. 그리고는 그의 손짓에 일제히 라우노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라우노는 화살촉들이 자신의 몸을 꿰뚫기 전에 두 개의 정육면체 구조물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강한 힘으로 라우노를 찍어 누르고 있다가 라우노가 없어지니 두 물체는 서로 쾅 소리를 내며 부닥쳤고 화살촉도 정육면체 모양의 구조물에 다닥다닥 박혔다.

라우노는 하늘로 솟구쳤다가 모습을 감추었다. 라우노의 마력에 노출되어 타격을 입은 것에서 간신히 회복한 조율자가 석장을 흔들어 고리들로 짤랑거리는 만들어 내자 라우노가 숨어 있던 아공간이 그를 뱉어 내었다.

라우노는 당황하지 않고 다시 사복 검을 휘둘러 조율자의 몸을 휘감으려 했다. 하지만 조율자의 몸에 닿기도 전에 아리스가 페니드란으로 사복 검의 진로를 방해했고 그 틈을 타고 조율자는 커다란 칼날을 만들더니 라우노에게 날려 댔다. 라우노는 다시 그것을 마법으로 막아 내었고 방호벽을 확장해 아리스를 밀어 버렸다.

아리스는 마력구를 여러 개 만들어 무작위로 뿌린 다음에 그것들을 폭발시켰다. 베는 것보단 효과가 좀 있었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그렇게 셋은 팽팽한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 * *

아리스, 조율자가 라우노를 상대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미레아는 좌불안석하며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떡하지.”

지금까지 수 없는 선택을 했지만, 이번처럼 답이 나오지 않은 적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아! 대체 나는 어떡해야 좋아?!”

미레아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애를 쓰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아리스는 이 세계의 종말을 가져오겠다 선언했다. 일전에 미레아에게 반 농담 삼아 말하던 그것과는 달리 이번에야말로 진심인 것 같았다. 하지만 미레아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도 없었고 아리스가 무슨 생각인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라우노부터 막고, 세피로스를 말리고, 아리스도 정신 차리라고 두들겨 팬 다음에 이 라슈온이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 영소의 흐름을 관장하고 있던 조율자를 원래의 위치로 되돌리는 것이 미레아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내가 서리 여신의 조각이라 아리스가 이 세계에 종말을 가져올 일은 없을 거라 그러지 않았어? 그런데 아리스도 세피로스도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나는 왜 여기 있는 거고?!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 진정해, 미레아.

세렌트의 말에도 미레아는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처음에는 세피로스를 설득해서 데려올 생각이었어! 그 이상은 생각하지도 않았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 꼴을 봐! 세피로스는 말이 안 통하고, 아리스까지 헛소리하지 않나, 거기에 라우노까지 난입하고! 조율자님은 내가 어떡해야 할지 알려 주지도 않았잖아!”

― 미레아, 미레아는 이 세계를 유지하고 싶은 거지?

“당연하지!”

미레아는 누가 뭐라 그래도 이 세상이 좋았다. 세상의 밝은 면은 물론 어두운 면까지도 좋았다. 비록 지금은 마수 때문에 파괴된 곳이 많다고는 하나 라슈온의 자연은 경이로웠고 생명력이 충만했다. 그 안에서 인간과 오빈, 용들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이 세계가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 아이들이 자라 또다시 대를 잇고, 의지끼리 서로 맞부딪히며 영소는 순환하고 세상은 흘러가며 끝없는 굴레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곳은 미레아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세계였다. 그것은 조율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리라. 이 세계에 품고 있는 사랑이 없다면 이런 일 따위는 제대로 할 수도 없었다.

― 그렇다면 미레아도 미레아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해.

세렌트의 말에 미레아가 두 눈을 끔벅거렸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

― 그래! 그러면 되잖아? 미레아에게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일이 있잖아. 그렇다면 망설이지 마.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

미레아는 세렌트가 해 준 말을 입안에서 곱씹었다. 그러면서 아직 결판이 나지 않은 세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아빠도 그렇고 조율자님도 그렇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랬어.”

그렇게 중얼거린 미레아는 세렌트에게 허락이라도 구하는 것처럼 물었다.

“그러니까 나는 무엇을 해도 아무 잘못 없는 거야. 그렇지?”

― 그럼, 그럼.

세렌트의 대답에 만족한 미레아가 양손으로 자신의 볼을 찰싹찰싹 때려 복잡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내보냈다. 그 순간 라우노의 목소리가 미레아의 귓가에 울렸다.

“잊지 마세요, 미레아 제인스터. 내가 당신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이유.”

그 말에 미레아는 멀리서 싸우고 있는 라우노를 노려보았다. 분명 세피로스를 적당히 상대해 달라는 소리를 했더랬지.

미레아는 못마땅함에 혀를 한번 쯧 찬 후 결심을 굳혔다.

“좋아, 그러면 나는…… 세피로스를 쫓아간다!”

그리고 세피로스가 지나간 방향을 향해 달렸다. 그러는 동안 미레아는 몇 번이고 불안한 눈으로 아리스를 돌아보았다.

‘괜찮겠지?’

손바닥에 난 땀을 옷에 문질러 닦으면서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설마 무슨 일이 있지는 않겠지……? 아리스니까.’

미레아는 출입구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결국 아리스에게 소리쳤다.

“아리스!”

라우노를 상대하면서 바쁜 와중에도 이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 보였다. 미레아는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죽지 마!”

아리스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 필요는 없었다. 그것으로 자신의 바람은 전했다고 판단한 미레아는 재빨리 비공정의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그 말로 아리스의 심경이 참으로 복잡해졌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 * *

미레아는 세피로스를 찾아 미로 같은 복도를 헤맸다. 어디를 가도 아성체 용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전부 세피로스가 한 짓이었다.

미레아는 율비네가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아 버리고 싶은 그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잘됐다고 생각하기에는 동정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다른 일행들과 마주쳤다. 파울로, 율비네와 라일라, 쿤둘렌이 서로 합류했는지 함께 있었다. 그들은 라일라와 쿤둘렌에게서 조율자에 관한 이야기를 막 들은 차라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미레아!”

파울로가 잽싸게 달려와서 미레아를 끌어안았다.

“네가 갑자기 없어져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 걱정스러운 말에 호응할 새가 없어서 미레아는 파울로의 품속에서 비집고 나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누구 세피로스 못 봤어?”

“세피로스? 너와 함께 없어져서 같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나를 포함해서 그 자리에 있던 넷이 조율자님을 통해 다른 곳으로 소환되는 바람에 함께 있었던 것은 맞아. 하지만 세피로스는 다시 이쪽으로 돌아갔어.”

“역시 조율자의 짓이었구나.”

파울로가 눈매를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아리스는?”

“조율자님과 함께 라우노를 상대하고 있고.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세피로스를 막아야 해.”

미레아는 일행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는 그러려고 온 거잖아?”

“그래, 맞아.”

“그럼 우리의 우선순위부터 처리하자고. 하나 변수가 있는데…… 아리스가 세피로스에게 가담했어.”

“뭐라고요?”

율비네가 꺾이는 목소리를 내었다.

“아니, 아리스가요? 잘못 안 게 아니고요?”

“아무래도 아까 했던 말이 진심이었나 봐요. 이 세계에 종말을 가져오겠다고 한 말…… 저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홧김에 한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진심인가 봐요. 그래서 세피로스를 도와 그가 라우노와 조율자님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을 만들었어요.”

상황을 설명하는 미레아의 얼굴 역시 어둡고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일단 라우노는 아리스가 상대하게 두고 저는 세피로스를 찾으러 왔어요.”

“이런…… 그럼 제가 아리스가 있는 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은 율비네의 말에 미레아가 만류했다.

“하지만 휘말리면 위험해요.”

“그래도 그렇지, 백익이라고요! 우리가 지금까지 라우노 듀랜트에게 얼마나 당했는지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아리스 혼자 상대하게 두라고요?”

“율비네, 내가 그 싸움을 보고 왔는데…… 그건 이미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어요. 이 세계의 법칙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라슈온의 조율자와 그런 법칙을 무시할 수 있는 데르카이드 둘이 싸우는데 우리 같은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요. 아리스에게 방해나 될 뿐이에요.”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미레아는 그들이 싸우는 방식을 보고는 애당초 그 싸움에 껴들 만한 의욕이 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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