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설…….”
세피로스의 얼굴은 미묘하게 변했다. 그리움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다른 감정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하지만 조율자는 세피로스와 라우노를 번갈아 보고는 어떠한 감정도 실리지 않은 기계적인 어조로 말했다.
“시스템 조율자의 권한으로 너희를 조율 모듈에서 강제 추방시켰어.”
조율자는 그러더니 세피로스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오랜만이구나, 세피로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네게 실망을 많이 했단다.”
약간의 질색 섞인 말이었지만 세피로스는 실망하지 않은 듯싶었다. 오히려 눈에 띄게 기쁜 어조로 대답했다.
“혼날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어.”
“세피로스, 나는 네가 어떠한 핑계를 대든 네가 저지른 일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단다.”
“상관없어. 나를 마음껏 원망해도 좋아.”
“그런 자기만족적인 일에 나를 이용하는 거니?”
“이용한 게 아니야. 나는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나를 위한 일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로구나?”
조율자의 눈이 잠잠하게 잠겼다.
“나는 네가 알던 윤설과 별개의 존재라 해도?”
그 말에 세피로스가 멈칫했다.
“네가 알던 윤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어. 조율자가 된 순간 나는 네가 알던 윤설과 별개의 인물이 되었단다.”
“그래도 나는…….”
세피로스는 무어라 말을 더 이어 나가려 그랬지만 라우노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쪽을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내 목적은 당신을 죽이는 거지.”
그러면서 사복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조율자는 석장을 휘둘러 그것을 손쉽게 무력화시켰다.
“백익, 아무리 네가 데르카이드라 조율자와 비슷한 능력을 지녔다 해도 이 시스템에 가장 간섭하기 쉬운 것은 바로 나란다.”
조율자는 다시 석장을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게 흔들었다. 공간이 왜곡을 일으키며 거대한 중력이 라우노를 덮쳤다. 라우노는 압사 직전에 마법으로 고중력을 풀어 버렸다.
“당신이 이 세계의 법칙에 간섭하기 쉽다 해도 한 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어.”
조율자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손가락을 딱 튕기자 라우노에게 다른 식의 힘이 행사되었다. 공간이 서걱 베였지만 라우노는 다시 자신의 주변 공간을 일그러트리며 그것을 피했다.
“첫째, 생명의 의지가 갖는 독립성에 의해 내 의지와 육체에 직접적인 간섭은 하지 못해.”
그의 말대로 마법이란 것은 타인의 육체에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쿤둘렌이 마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신체를 강화하는 것처럼 타인의 육체를 강화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자신의 육체를 공간 전이하는 것처럼 타인을 공간 전이할 수 없었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가 각각 독립된 객체로서 타인의 의지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 힘이 있기 때문이었다.
“둘째!”
라우노가 공간 전이로 조율자의 등 뒤에서 나타나며 사복 검을 휘둘러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당신은 이런 전투 경험이 없어!”
사복 검이 조율자의 몸통을 조이며 날카로운 칼날이 그녀를 난도질할 기세로 좁혀 들어갔다. 하지만 조율자는 그것을 너무나도 쉽게 풀어 버리며 공간으로 훌쩍 날아올라 피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당신이 이 세계에 간섭하기 위해 현신한 육체는 지금 더없이 나약하기 짝이 없지!”
라우노가 하하거리며 웃자 조율자는 콧등을 찡그렸다.
“그러니 그렇게 도망만 다녀 봐!”
하지만 그런 것을 보고만 있을 세피로스가 아니었다.
“라우노!”
용으로 변한 세피로스가 라우노에게 달려들었다. 조율자와 라우노, 세피로스가 뒤엉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라우노는 조율자와 세피로스를 죽일 기세로 공격을 퍼부었고 세피로스는 조율자를 보호하였지만, 조율자는 세피로스의 계획이 영 탐탁지 않은지 라우노와 세피로스 둘 모두에게 제약을 걸려 그랬다.
라우노와는 달리 세피로스는 조율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조율자가 이 세계에 속한 영소를 다룰 수 있다는 소리는 용인 세피로스의 영소도 조율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세피로스가 생각보다 맥을 못 추는 것을 보고만 있던 아리스는 미레아를 돌아보았다.
“나는 세피로스를 도와야겠어. 서리 여신이 세피로스의 힘에 제약을 걸고 있는 이상 그 혼자만은 버틸 수 없을 거야. 난 데르카이드이니 라우노와 서리 여신과 붙을 만한 건 나야.”
“지금 세피로스를 돕겠다고 그랬어? 하지만 세피로스는……!”
“세피로스는 이 시스템에서 서리 여신을 해방하길 원하지.”
아리스가 페니드란을 손으로 8자 궤도로 돌리며 몸을 풀었다.
“그리고 너희는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그랬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너는 아까 이 세계의 종말을 가져오겠다고 그랬잖아. 그러지 마!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걱정하지 마, 미레아.”
미레아의 질책에 아리스가 싱긋 웃었다.
“나는 둘 다 해결할 생각이니까.”
“뭐? 잠깐, 아리스! 잠깐만!”
하지만 아리스는 미레아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검은 날개를 펼치더니 빠르게 날아갔다. 세 사람이 접전을 벌이고 있는 곳으로 날아간 아리스는 세피로스부터 찾았다.
“세피로스 님!”
아리스의 부름에 공중에서 라우노를 상대하던 세피로스가 그를 조율자가 상대하도록 맡기고는 아리스의 곁으로 물러났다.
“당신은 물러나 있으세요. 라우노는 제가 어떻게든 하겠어요.”
“무슨 생각이지?”
“당신은 해야 할 일이 있지요? 아까 세피로스 님께서 제게 하셨던 말대로 일을 진행하도록 하지요.”
세피로스는 아리스의 의중을 가늠하는 듯 눈매를 좁혔다.
“저는 당신의 계획 이후에 새로운 세계를 책임지겠어요. 당신이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던가요?”
“너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겠나?”
아리스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결정했어요. 이 시스템의 한계를 생각하면 그 수밖에 없잖아요.”
그의 얼굴에 불안감이 일순간 스쳐 지나갔지만, 그것은 정말 찰나의 것이었다.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고 아리스는 검을 고쳐 잡았다.
“그러니까 제 마음이 바뀌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요.”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역시 이 방법밖에 없었다. 윤설은 물론이고 그 어느 사람도 희생하지 않고 이 세계를 지킬 방법 말이다. 그리고 아리스는 ‘그 어느 사람’에 자신을 포함하지 않았다. 아리스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가 라슈온에 끼친 영향에 대한 속죄라면 속죄였다.
세피로스는 아리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이 아까 안쪽으로 들어갔던 출입문으로 향했다.
“세피로스!”
세피로스는 조율자의 부름에도 답하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이 구역을 이탈했다.
“도망가는 건가요?”
라우노가 세피로스를 향해 사복 검을 휘둘렀지만, 아리스가 페니드란으로 쳐 내었다. 라우노가 사복 검의 경로를 바꿔 페니드란을 휘감았다. 그리고 힘을 줘서 사복 검을 다시 팽팽하게 당기자 페니드란의 검신이 끼긱거리면서 금속끼리 마찰하는 소리를 내었다.
― 아야, 아야야! 아파!
마검이 아닌 일반 검이었다면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죽는 소리를 내어도 페니드란은 굳건하게 그 힘을 감내했다.
라우노가 검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자 아리스는 그대로 끌려갔다. 하지만 라우노가 자신을 제멋대로 내팽개치는 것을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라우노가 자신을 잡아당긴 힘의 관성을 이용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아리스는 양손으론 페니드란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아 라우노가 몸을 빼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발에 묵직한 무게를 실어 걷어차 주었다. 반격을 당하자 라우노의 얼굴에 불쾌감이 서렸다.
아리스가 끼어들자 한자리에서 고고하게 얇은 유리 같은 자신의 날개를 팔랑거리고 있던 조율자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흑익, 지금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너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
조율자의 얼굴에 어딘가 그리운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이었다는 듯 이내 무기질적인 눈으로 돌아왔다.
“너를 더 알아 가고 싶었는데.”
아리스는 자신이 메다꽂은 라우노가 머리를 털며 일어나는 것을 보고 조율자의 말을 막았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상황을 해결할 것이니까요.”
하지만 조율자는 라우노를 상대하기에 앞서 석장을 들어 아리스를 겨누었다.
“무슨 생각이니. 결국, 세피로스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니? 만약 그렇다면 내가 너를 막아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세피로스와 비슷한 계획이기는 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 달라요, 라슈온의 조율자.”
그 말에 조율자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너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이로구나. 세피로스의 계획은 알고 있었다 해도 네가 자발적으로 이런 상황을 만들 줄은 몰랐단다. 네가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란 신탁을 내리긴 했지만, 너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란 막연한 믿음이 있었거든. 그러기 위한 안전장치도 있었고.”
“그렇습니까. 시간만 있다면 그에 대해서 제 억울함 좀 들어 주셨으면 싶지만, 지금은 여건이 되지 않네요.”
“대신 한 가지 알려 주마.”
아리스가 조율자에게 눈을 맞춰 오자 조율자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라우노와 세피로스에게 하는 것과는 달리 너를 막을 힘이 없단다.”
그 말은 아리스가 무슨 일을 벌여도 조율자는 그에게 손을 댈 수도 없고 영향력을 끼칠 수도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조율자는 해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나는 너를 그저 믿고 싶구나. 네가 최악이 아닌 차악이라도 된다면 네게 의지할 수밖에 없단다. 네 계획이 무엇이든 말이다. 내가 너를 믿는 것을 실망하게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조율자.”
짧게 대답한 아리스는 바로 라우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저자를 함께 해치우도록 하지요.”
“그 말에는 동의한단다.”
라우노는 대형 마법을 준비했다. 하지만 술식이 나오는 순간 조율자가 석장을 한번 휘두르기만 하면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렇게 틈이 생기면 아리스의 공격이 들어갔다. 라우노가 조금씩 악에 받치는가 싶더니 갑자기 마력을 뿜어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