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그 마검의 영소를 공유하고 있는 동안은 괜찮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야. 내 특이점을 잃은 너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마검의 마력이 다함과 동시에 죽을 거야.”
“……알고 있어요.”
“그리고 네 죽음은 이 세계의 변칙에게 크나큰 심경의 변화를 가져올 거야.”
“무슨 말씀이지요?”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로 이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소리지. 여기서 내가 말하는 종말은 단순한 내 세계의 종말이 아니야. 라우노가 그리는 종말과 같은 형태겠지. 하지만 너라면 그것을 막을 수 있을 거야.”
미레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는 그를 말릴 자신이 없어요. 어차피 지금은 당신의 특이점도 없고…….”
“오, 미레아 제인스터.”
조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 특이점이 없어도 너는 미레아 제인스터란다. 그리고 내가 네게 기대하는 것은 그저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지. 네게는 그럴 만한 힘이 있거든.”
“하지만 아리스와 라우노는…….”
미레아는 아직도 라우노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리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었다.
“백익의 힘은 확실히 대단하기는 하나 너희는 흑익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어. 심지어 흑익 본인조차도. 그러니 좀 더 그를 믿어 보렴. 그가 네 죽음으로 절망하지 않도록 도와주렴.”
미레아는 눈을 감고 천천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죽음을 준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그랬다. 죽음은 언제나 곁에 있었으며 미레아의 일상 속에서 함께 숨을 쉬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써둔 유서도 안전한 곳에 보관하지 않던가.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아리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예상이 가지 않았다.
“저……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미레아는 쭈뼛거리며 물었다.
“말하렴.”
“아리스에게 왜 그런 신탁을 내리신 건가요?”
그 말에 조율자는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그 신탁은 내가 그에게 진 빚이지. 그건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그러더니 조금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나는 그가 이용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그런 신탁을 내린 거란다.”
조율자의 말에 미레아는 아리송한 얼굴이 되었다.
“그에게 신탁을 내린 까닭은 앞으로 일어날 그의 행동을 예상했기 때문이 아니었단다. 그의 주변 환경을 예측했기 때문에 그런 신탁을 내릴 수 있었지. 흑익 그 아이는 강대한 힘을 타고났지. 그는 정말로 이 세계에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는 힘을 갖고 있어. 그런 그가 그 힘을 탐내는 다른 이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시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거든. 실제로 그런 결말을 예견하기도 했단다. 그가 이용당하다 비참해지는 모습을 말이지. 적어도 그가 타인에게 이용당해 이 세계를 부정하는 일만은 막았어야 했어. 하여 신탁을 내린 결과 내가 의도한 조건은 충족했으니 이제부터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지켜봐야겠지. 그래도 나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아리스는……!”
미레아는 아랫입술을 한 번 질끈 깨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이 감정을 뭐라 정의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당사자가 아닌데 나서는 것도 맞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아리스의 곁에서 지켜본 바가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그 신탁만으로도 힘들어했어요.”
“알고 있단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어. 아리스에게 그 신탁이 내리면서 사람들은 아리스를 이용하는 쪽보다는 배척하는 쪽을 택했고, 세피로스를 움직이게 할 수 있었으며 라우노의 견제를 샀지. 처음부터 흑익 그 아이에게 그렇게 되어야 하는 운명 같은 것은 없었단다. 난 그러한 것들을 예지하여 신탁을 내린 것이 아니야. 내 신탁이 그렇게 만든 것이란다. 그 덕에…… 아리스 그 아이는 이 세상을 미워하게 되었지.”
조율자는 애틋한 눈으로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너를 보냈단다. 그에게 있어서 한 줄기의 빛이 되어 줄.”
“따지고 보면 저는 아리스와 함께한 시간이 길지도 않아요. 고작 요 몇 달인데…… 그전까지 세상은 아리스에게 너무 가혹했어요. 그리고 저는 그에게 있어서 엄연히 만들어진 감정이잖아요?”
미레아는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는 것이 이제 지긋지긋했다.
“이젠 제게 당신의 특이점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래, 네게 있던 특이점은 라우노가 이 공간에 접근하는데 다 써 버렸지.”
“당신의 특이점이 없다면 아리스에게 저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요?”
지금까지 허공에 나른한 자세로 꼼짝하지 않던 조율자는 날개를 파닥여 미레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미레아의 볼을 감쌌다. 아까부터 조금 흥분해 있던 터라 발갛게 홍조가 올라온 따듯한 볼을 손으로 쓸면서 조율자는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흑익에게 직접 물어보렴.”
그 말이 미레아에게는 잔인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조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미레아는 견디지 못하고 화제를 바꾸었다.
“세피로스는 역시 당신을 이 지위에서 해방하려는 것이 목적이겠지요?”
“맞아.”
미레아의 볼에서 손을 거둔 조율자는 눈을 살짝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역시 내가 잘못한 걸까.”
“무엇을 말이에요?”
“사실 나는 한 번 도망치려 그랬었거든.”
지금까지 무기질적인 느낌이 들던 조율자의 얼굴에 드디어 인간미라는 것이 조금 깃들었다.
“싸움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동결로 도망치자고 페이릭과 세피로스에게 말했었어.”
미레아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톡톡 건들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나쁜 제안인가요? 제 생각이지만 지치면 잠시 도피해도 괜찮다고 보거든요.”
그 말에 조율자가 작게 웃었다.
“나는 약했지만, 그 사람은 아니었단다. 난 싸움에서 잠시 벗어나 눈을 뜨면 평화로운 세계를 맞이하고 싶었는데 페이릭은 더 싸우길 바랐어.”
조율자의 눈이 잠겨 들었다.
“그래서 페이릭이 결국 무리를 하게 만들었어. 3,000년 전에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기 위해 자신의 특이점을 개방해서 아공간에 마수들을 몰아넣었지. 나 때문이야. 페이릭은 나에게 평화로운 세계를 주고 싶었기 때문에 결국 그런 선택을 한 것이란다.”
“그것도 조율자님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잘못이 아니라 해도 내가 초래한 결과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단다. 페이릭은 나를 위해 그리했으니.”
그 말에 미레아는 머리를 긁적였다. 조율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잘못이란 건 없는 선택이라 여겼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한 선택에 책임을 지기로 했단다. 보비네가 깨어날 때까지 이 세계의 조율자가 된 것이지.”
조율자는 쓰게 웃었다.
“그것이 세피로스 그 아이에게는 퍽이나 충격이었나 보더구나.”
갑자기 부모 같던 윤설과 페이릭을 동시에 잃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세피로스는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 애는 정신이 대여섯 살인 상태에서 성장 촉진제를 맞으며 강제적으로 육체를 강화해 왔단다. 그 과정은 제법 고통스러웠지. 그 역시 내 잘못이야. 내가 막지 못했으니.”
조율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래서인지 세피로스는 항상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더구나. 그때 이후로 어린 상태에서 전혀 성장할 생각을 하지 않아.”
“하지만 세피로스는…….”
미레아가 본 세피로스는 다소 속을 알 수 없었지만 언제나 흔들림이 없었고 선택에 후회란 것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가리켜 조율자는 어리다고 말하니 몹시 어색하게 느껴졌다.
“자, 이제 가자꾸나. 세피로스와 라우노를 막아야지.”
“잠깐만요, 조율자님! 저는 아직 무얼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라요! 당신에게 듣고 싶은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은데……!”
“앞으로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그게 정답이란다, 나의 조각아.”
미레아는 케이드에게 그 비슷한 말을 들은 것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그 이상 생각을 이어 가기 전에 또다시 풍경이 바뀌었다.
* * *
조율자와 미레아가 나타난 곳은 전혀 다른 곳이었으며 그 둘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리 여신을 중심으로 한창 싸움 중이던 세피로스와 라우노가 있었고 둘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근방에서 몸을 은신하고 있던 미레아와 아리스가 있었다.
함께 있던 파울로와 율비네, 그리고 조율자와 함께 있었던 쿤둘렌과 라일라 역시 이곳으로 초대받지는 못한 것 같았다.
미레아와 아리스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세피로스와 라우노는 크게 당황하지 않고 잠시 행동을 멈췄다. 조율자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막아선 상태였다.
“안녕, 아이들아. 사실 내 소개가 필요할까 싶기는 한데 내가 바로 너희들이 서리 여신이라 부르는 라슈온의 조율자란다.”
갑자기 등장한 조율자의 자기소개에 아리스는 자신의 무기를 떨어트릴 뻔했다. 그 자리에 나타난 조율자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다.
가사 상태에 빠져 있던 보비네의 숨결 속에서조차 느껴 보지 못한, 실제로 살아 있는 절대적인 존재. 그녀의 시선은 마치 심연 속에서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으며 그녀의 숨결은 생명으로 꽉 들어찬 대기를 움직이게끔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아리스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비공정을 세워 둔 곳 근처인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야외인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늘은 밤도 아닌데 우주처럼 새카맣고 반짝이는 별들이 무리 지어서 떠 있었다.
“라우노와 세피로스는 당연하겠지만, 우리는 대체 왜 함께 소환된 거지?”
미레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아리스에게 속닥거렸다.
“글쎄,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너는 서리 여신의 조각이고 나는 데르카이드이니 그런 것이 아닐까.”
서리 여신의 조각이란 소리에 미레아가 움찔거렸지만, 아리스는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미레아와 아리스가 잔뜩 긴장하여 세렌트와 페니드란을 꺼내 드는 것과는 달리 라우노는 잠시 사복 검을 거두더니 핫, 하고 짧게 웃었다.
“드디어 여신께서 납시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