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01화 (201/257)

201화.

“너희가 나를 먼저 발견하여 보호하고자 했던 계획은 현명한 선택이었단다. 나는 저 안에서 밖의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거든.”

“네? 어째서인가요? 상황이 안 좋으면…… 손을 쓸 수 있으시잖아요.”

라일라의 의문에 조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 알고 있니? 나는 내가 있던 저 공간 밖으로 스스로 나올 수 없었단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고작해야 문지기 역할을 하던 어린 용들을 보내는 것이었지.”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그 말 그대로란다. 내가 있던 공간에서 나오는 문을 여는 자물쇠는 밖에서 안으로 열리게끔만 작동하게 되어 있었단다.”

“그건 꼭…….”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낀 라일라가 뒷말을 삼키자 조율자가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단다. 나는 나 스스로 나올 수 없는 저 공간에 감금되어 있었던 것이란다.”

“하지만 저희가 알기로는 당신이 자발적으로 이 일을 맡았다고…….”

“그 말도 맞단다. 내가 원했지.”

조율자가 허공에서 둥실둥실하며 한 바퀴를 뱅그르르 돌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에 감긴 리본이 나풀거리며 원을 그렸다.

“하지만 나를 조율자로 만든 자들은 나를 의심했단다. 내가 마음을 바꿔 조율자의 의무를 저버릴까 봐. 그래서 내 의지대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방에 가두어 둔 거야. 내가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했던 걸까. 그리고 밖에서 열 수 있게 만들어 둔 것은 내가 이 자리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이 있을 때 나를 끌어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남겨 두었던 것이지.”

조율자의 말에 쿤둘렌과 라일라는 참담한 심정이 되어 말문이 막혔다. 처음에는 윤설의 자발적인 지원이었다 할지라도 결국 그녀를 억지로 이 자리에 앉힌 것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강제로 조율자의 자리에 올려놓고 가두어 두었으면서 그녀의 변절이 두려워 언제든지 갈아 치울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상냥한 아이들아. 너희가 어떤 기분인지는 알겠다만 그렇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단다. 이것은 나의 동의하에 일어난 일이니 나는 괜찮단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의 나 역시 이 일에 확신이 없었거든.”

조율자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고맙구나. 아무리 내가 자원했다 하나 3,000년 만에 저 지긋지긋한 공간에서 나올 수 있어 솔직히 기쁘단다.”

그 말에 라일라와 쿤둘렌은 여러모로 복잡한 얼굴을 했다. 조율자는 허공에서 가볍게 기지개를 쭉 켰다.

“그렇다고 조율자의 의무를 저버릴 생각은 없지만.”

조율자는 나긋나긋해 보였던 표정을 바꾸고 몸을 돌렸다.

“저 둘을 이 이상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그러면서 석장을 흔들자 매달려 있던 금속 고리들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소리가 잦아든다 싶더니 조율자의 모습이 쿤둘렌과 라일라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 * *

눈을 한 번 깜박였을 뿐이었는데, 미레아는 발아래도, 양옆도, 하늘도 온통 하얀 공간 위에 있었다. 어리둥절해진 그녀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세피로스와 라우노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파울로와 율비네와 함께 몸을 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공간이 바뀌었다. 그것도 혼자 이 공간에 떨어진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었고 오직 공간만 있었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정체불명의 상황이 전개되면 경계심을 품기 마련인데 신기하게도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미레아가 조율자와 눈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안녕, 나의 조각.”

미레아의 눈앞에 조율자가 와 있었다. 미레아는 반사적으로 주춤거리면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미레아는 그녀를 결코 몰라볼 수 없었다. 저 여인은 분명 서리 여신이었다. 그녀는 초록빛으로 빛나는 얇은 막상(膜狀)의 날개를 나풀거리며 허공에 떠 있었는데 미레아를 보고 싱긋 웃었다.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잠시 시간을 쪼갰어. 이곳은 내가 만든 아공간이야. 이곳에서의 몇 시간은 저 밖에서의 1초와 비슷하지.”

미레아는 조율자가 나타난 순간부터 자신의 일부가 서리 여신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율자의 존재는 척추를 타고 흐르는 경외감에 몸이 감전된 듯 꼼짝할 수 없었지만 반대로 더없이 익숙하고 친근한 기분이 들었다.

“서리 여신… 님…….”

미레아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르자 조율자는 손을 옆으로 내저었다.

“다들 나를 그렇게 부르네. 그냥 조율자라고 부르렴.”

“조율자요?”

“나는 신처럼 전지전능하지 않고 라슈온의 영소를 조율하는 사람에 불과하니까. 여신이란 호칭은 내게 너무나도 과분하구나. 듣기 민망하기도 하고.”

미레아는 양 눈을 비볐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꿈이라든가 헛것이라든가 하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조율자가 고개를 양옆으로 까닥일 때마다 긴 흑갈색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정확한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라일라와 쿤둘렌이 당신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나 보군요. 사실 제가 당신의 조각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렇게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렴.”

그러면서 살포시 웃었다.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일단 나는 너희에게는 감사하고 있단다. 3,000년 동안 한곳에만 갇혀 있다 보니 슬슬 바깥공기가 그리워지려던 차였거든.”

“갇혀 있어요……?”

“조율자의 방은 밖에서 여는 것은 가능해도 안에서 여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조율자는 라일라와 쿤둘렌에게도 해 주었던 설명을 미레아에게도 해 주었다. 미레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조율자를 바라보다 새파랗게 질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나도 비인도적인 처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조율자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혼란스럽니?”

“당연하지요!”

조율자의 물음에 미레아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조율자님은 그런 상황에서 3,000년이나 버텼다고요?”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할 만했단다. 육신의 제약을 벗어나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잊게 되거든. 가령 초콜릿 케이크의 맛 같은 것 말이란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그게 무슨 맛인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그립지도 않아.”

조율자는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애쓰는 것 같은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이 세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욕구만큼은 진심이란다. 나는 소위 말하는…… 음… 너희가 데르카이드들이 폭주를 일으킬 때 쓰던 표현이 있었는데…….”

“의지에 먹힌다는 소리 말인가요?”

“그래, 그것. 알려 줘서 고맙구나. 어쨌든 지금의 나는 데르카이드가 의지에 먹히는 것과 비슷한 상태란다. 내 안에는 육신을 갖고 있었을 당시의 마지막 염만 남았지. 하지만 데르카이드들이 그럴 때처럼 괴롭지는 않단다.”

그나마 괴롭지는 않다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복잡 미묘한 심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이 일을 계속하실 건가요? 세피로스는 당신을 해방하겠다고 하는 것 같아요.”

“세피로스의 계획은 알고 있었어.”

“알고 계셨다고요?”

“다만 조금 늦게 눈치챘지. 나의 작은 아이가 희생될 때쯤에야 알아차렸으니…….”

조율자가 말하는 작은 아이라 함은 리비엘로를 뜻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미레아의 기분이 조금 침울해졌다.

“네 말대로 세피로스는 나를 이 자리에서 해방하려고 하지.”

“그러면 이 세계, 라슈온은요? 당신이 없으면 마수 소굴이 될 거예요. 세피로스는 그것을 알고 있는데도 조율자를 없애겠다고 그런 것인가요?”

“아마 그것까지 원하지는 않을 거란다.”

“그럼 어떡할 생각인 거죠?”

“내 대리를 세우겠지.”

조율자의 대답에 미레아는 당황했다.

“네?! 그게 누구인데요?”

“…….”

지금까지 미레아가 궁금해하던 것들은 술술 대답해 주었으면서 이번 질문에는 침묵했다. 미레아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조율자가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보이자 미레아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제가 당신의 조각이었던 것 아닌가요? 그런데 상황이 왜 이렇게 되었죠?”

미레아는 아리스가 세계의 종말을 가져오겠다는 선언을 막 들은 차였다. 그 직후 아리스에게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채근했지만, 아리스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미레아가 이곳으로 불려 온 시점은 답답함에 아리스에게 언성을 높이기 직전이었다.

“조율자님, 아무래도 당신의 판단이 틀렸어요. 무슨 의도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아리스가 이 세계의 종말을 가져오겠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중이란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아리스를 막을 자신이 없어요!”

미레아의 두서없는 말에 조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는 제 역할을 다 했단다.”

“제 역할은 아리스를 감화시켜 이 세계의 종말을 막는 것 아니었나요?”

미레아의 말을 들으며 조율자가 손등 위에 자신의 턱을 괴였다. 그녀는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상태로 편하게 몸을 늘어트렸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구나.”

“그렇지만 아리스는 이미 생각을 굳힌 것 같은걸요?”

미레아의 말에 조율자는 빙그레 웃었다.

“이 세계의 변칙이라고 불리는 만큼 내게 있어서도 그의 행동은 예측 불가야. 흑익을 이 공간에 불러올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내 발아래 있는 존재가 아니라서 너만 부를 수 있었단다.”

미레아는 그 말에 미간을 찡그렸다.

“제게 원하시는 게 뭐지요?”

“뭐겠니.”

조율자의 말에 미레아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아리스도 그렇지만 세피로스와 라우노를 말릴 만한 힘이 없는 것 같아요.”

“미레아 제인스터.”

조율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넌 곧 죽어.”

그 말에 미레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던 것을 확인받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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