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00화 (200/257)

200화.

굳이 한 번 더 확인하려 드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젖어 있었다. 아리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내가 물었을 때 긍정했다니까.”

미레아가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사이 파울로가 말했다.

“우리는 세피로스가 이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시스템을 무너트리는 것을 막을 생각이었어. 최대한 온건하게 대화로.”

라케드 역시 온건한 방법이 있다면 세피로스를 설득해서 데려오라 그랬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세피로스가 먼저 싸움을 걸어오지만 않으면 다행인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내게 내려진 서리 여신의 신탁을 해결하러 왔어요.”

아리스는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이어 말했다.

“그리고 어떤 형식으로든 저는 이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생각입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농담처럼 억울하지라도 않게 정말 세계를 멸망시켜 버리겠다고 말했던 것과는 분위기도 달랐고 무게도 달랐다.

다들 그가 이런 말을 내뱉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덕분에 그 말에 경계심을 품기는커녕 황당한 기분이 앞서 들었다. 사람들이 제각각 경악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아리스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선언했다.

“그러니 경우에 따라선 당신들의 목적에 제가 방해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게 내려진 신탁을 해결하려면…… 역시 그런 방법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 * *

세피로스와 라우노가 서로 전투를 하는 사이 조용히 일행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라일라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에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괜찮습니다. 우리가 위험한 범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니에요.”

동행한 쿤둘렌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자 라일라는 다시 벌떡 일어나 기판을 두드렸다. 그들은 지금 서리 여신이 있는 곳을 찾는 중이었다.

라우노가 세피로스에게 신경이 팔린 사이 그보다 먼저 찾아내어 서리 여신을 보호할 작정이었지만 그게 과연 먹힐지는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서리 여신이 살해당하는 꼴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과거 인류들이 사용하던 이 비공정은 그 기술의 명맥이 끊어졌다고는 하나 기본적인 프로세서는 지금 사용하는 기술과 비슷했다. 덕분에 라일라는 벽을 뜯어내고 그 안쪽으로 지나던 전선을 자신의 마도 기구로 우회하도록 설정했다.

“역시 이 신호들은 한곳으로 향하고 있어요. 그곳에 서리 여신이 있지 않을까요?”

“신화와 전설 속의 존재가 이렇게까지 인공적인 구조물에 둘러싸여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쿤둘렌의 말에 라일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미레아의 말에 따르면 서리 여신은 만들어진 신이라 그랬던가요. 여러모로 이해가 가는 상황이기는 해요. 이 세계를 조율한다는 것은 아직도 그 방식을 모르겠지만.”

쿤둘렌과 라일라는 벽을 짚고 신호를 따라갔다. 어느 정도 달리자 라일라가 들고 있던 신호 계측기의 숫자가 뱅뱅 돌더니 바늘이 멈춰 섰다.

“여기예요. 여기인데…….”

라일라는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이 도달한 곳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어떠한 공간이 있지도 않았고 다른 장치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달려온 복도만 쭉 이어졌을 뿐이다.

그때 반짝이는 빛무리가 잠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라일라와 쿤둘렌이 그것이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자 다시 빛이 나타나서 깜박거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것을 본 쿤둘렌이 그 현상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는지 말했다.

“잠깐 물러나 보세요. 방금 이 현상은 조금 전에 어디론가로 사라졌던 서리 여신의 특이점이 만들어 낸 것 같군요. 이곳이 다차원의 경계라면 서리 여신이 있는 곳 역시 공간이 이쪽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마법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시도는 해 보도록 하지요.”

쿤둘렌이 마석을 활성화하여 몇몇 마법 술식을 전개했다. 그것들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공간에 간섭하더니 이내 그들이 있는 공간이 바스러지듯 허물어졌다. 라일라는 그곳에서 발생하는 빛에 눈을 찡그렸다.

“이게 맞는 건가요?”

라일라의 말에 쿤둘렌이 확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간의 경계를 잠시 허물었습니다만……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정확하게 저도 모르겠습니다.”

허물어진 공간에서 새어 나오는 빛은 점점 잦아들더니 느닷없이 하얀 다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쿤둘렌과 라일라가 깜짝 놀라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자 다리의 주인은 땅을 어색하게 밟더니 이번에는 양팔이 나와 공간의 경계부를 턱 짚어 무게 중심을 그쪽으로 쏠리게 했다.

팔에 힘을 주면서 영차 거리는 기합 소리가 반대편에서 들리는 듯도 싶었다. 그리고 그 반동을 이용해 이번에는 상체가 튀어나왔다. 여자였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쿤둘렌과 라일라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이런.”

젊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 말투는 살짝 나긋나긋한 듯하면서도 권태로움이 묻어 있었다.

“결국, 너희는 나를 찾아내 버렸구나.”

짤랑.

여인이 있는 곳에서 작은 금속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거야.”

짤랑, 짤랑.

여인의 움직임에 맞춰서 금속음이 연달아 울렸다. 그 소리의 정체는 곧 알 수 있었다. 여인이 공간 안쪽에서 석장을 꺼내더니 그것을 짚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석장을 쥔 팔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 몸을 지탱하는 것이 힘든 듯싶었다.

“판도…… 판도라?”

라일라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여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런. 그 이야기는 구전되지도 못한 모양이구나. 음…… 그런 게 있단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야.”

여인의 모습이 완연히 드러났다. 그녀는 서리 여신의 성화처럼 성스럽게 생기지도 않았고 광채가 나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하고 피로감이 짙은 눈매를 한 젊은 여인일 뿐이었다. 가벼운 천이 겹겹이 재단되어 나풀거리는 옷차림에 발은 장식용인 커다란 리본을 발목에 매었을 뿐 맨발이었다.

라일라와 쿤둘렌이 입을 헤 벌리고 서 있자 여인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반가워. 나는 너희들이 서리 여신이라 부르는 이 세계의 조율자야.”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숱이 풍성한 머리카락이 사르륵 흩어졌다.

“너희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게 말한 여인은 두 눈을 감고 가슴 깊게 숨을 쉬었다. 길게 숨을 토해 내더니 다시 눈을 반짝 뜨고는 다리를 쭉 폈다. 그다음은 허리와 팔을 쭉쭉 기지개를 켜더니 마지막으로 목을 뚝뚝 꺾었다. 라일라는 그녀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며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레아의 말을 전해 들었을 때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서리 여신이 진짜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놀랐니?”

여인의 말에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기에 하나도 늙지 않고…… 분명 3,000년이란 시간 동안 살아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그 말에 여인이 작게 웃었다.

“네 말대로 육신이 온전했다면 지금쯤 완전히 늙은 할머니가 되어 잔뜩 쪼그라들었을 테지만 난 육신의 제약을 받지 않는단다. 내 원래 육체는 내가 조율자가 되던 그날 이미 소멸하여 버렸지. 내 정신체를 시스템에 옮겨 일종의 인공지능 컴퓨터를 만든 셈이었거든. ……이렇게 말해 봤자 너희에게는 이해가 잘 가지 않겠구나.”

실제로 라일라와 쿤둘렌은 여인의 설명 중에 생소한 용어가 등장하자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인은 석장을 짚은 쪽 반대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것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이 육체는 임시로 만들었어. 오래는 못 가.”

그런 것치고는 정말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약간 비대칭적인 얼굴이나 피부 위에 있는 작은 점들처럼 미적으로는 불완전한 특징이 있는 실존하는 사람의 외형이었다.

“참고로 내 살아생전 모습이란다. 남아 있는 유전자 정보를 토대로 세운 육체이지. 그래도 새 육신이라 조금 어색하구나. 애초에 육신을 움직이는 것은 3,000년 만이기도 하고.”

그때 저 멀리서 또 폭발음이 들렸다. 라일라가 깜짝 놀라 또 움찔거리자 여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저 녀석들…… 쓸데없는 짓거리를…….”

“여신이시여.”

쿤둘렌의 부름에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따듯한 갈색 눈동자가 쿤둘렌을 응시했다.

“너희가 나를 숭배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들으니 기분이 조금 이상하구나. 음…… 내 원래 이름은 윤설이었지만 그러지 말고 조율자라고 불러 주렴. 나는 신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이 세계에 속한 인간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러더니 석상을 짚고 조금 힘겹게 발을 움직였다. 그녀는 몸을 운신하는 것이 버거운지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려니 힘들구나. 잠시만.”

조율자가 석장으로 바닥을 콩콩 내리치자 그녀의 등 뒤에서 빛이 나더니 곤충의 날개 같은 것이 돋아났다. 그녀는 그 날개로 포르르 날아올랐다. 물리적인 원리보다는 마력으로 날아오른 것이었다. 연한 녹색의 마력을 빛내고 있는 그 날개가 포르르 떨릴 때마다 조율자의 머리카락과 긴 리본 장식이 함께 너울지는 것이 마치 전설 속에서 등장하는 요정을 연상케 했다.

“그래, 한결 낫구나. 하려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니?”

조율자의 말에 쿤둘렌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조율자님, 저희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자 왔습니다.”

“라우노, 그 아이를 막겠다는 소리니?”

쿤둘렌과 라일라는 본론으로 치고 들어오는 조율자의 화법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조율자는 위기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어투로 말했다.

“그 아이는 예전부터 나를 죽이고 싶어 했어.”

조율자는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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