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당신들은 제 생각 이상으로 쓸모없군요. 전부 제가 베어 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라우노는 용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신랄하게 말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보다 더욱 선명한 붉은 피에 미레아는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라우노가 길을 뚫어 준 덕분에 그들은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기분은 좋지 못했지만 말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일정한 방향으로 날아가던 특이점은 갑자기 밝은 빛을 내뿜더니 곧 허공에서 사라졌다.
“어떻게 된 거지?”
파울로가 사라진 특이점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라우노가 대답했다.
“특이점이 여신에게로 돌아간 것이니 이 근방에 서리 여신이 있단 소리입니다.”
그 말에 그들은 라우노를 견제해야 했기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서리 여신이 있는 곳에 도달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라우노와 함께 다니기엔 상당히 꺼림칙하였지만 그렇다고 혼자 두자니 그 역시 찝찝하여 파울로와 미레아는 그의 행동을 감시했다. 하지만 라우노는 괘념치 않아 보였다. 그것이 자신들을 무시한 결과라는 것쯤은 미레아도 알 수 있었다.
그때, 라일라가 미레아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이건 나밖에 할 수 없을 거야. 다녀올게.”
“무슨 생각이야?”
“라우노보다 먼저 서리 여신을 찾으려고.”
“뭐라고?”
“라우노의 말대로 특이점이 서리 여신에게 돌아간 것이라면 내가 그걸 추적할 수 있어. 그리고 상황을 봐서 라우노의 접근을 막아 그녀를 보호할 생각이야. 서리 여신이라면 분명 방도가 있을 거야. 누가 뭐라 그래도 지금 이 세계의 최고신은 그녀니까. 너희는 여기서 용이나 상대하면서 라우노의 발을 묶어 놓고 있어.”
그러더니 미레아가 말리기도 전에 쿤둘렌을 대동하고 빠른 속도로 복도를 따라 달렸다. 라우노는 그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들을 보내 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버러지 같은 것들이 제아무리 자신을 방해하려 해도 그것은 지금 문제 되지 않았다.
서리 여신을 상대방이 먼저 찾는다고 해서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먼저 서리 여신을 찾아낸다면 그가 할 수고를 덜어 주는 셈이었다. 라우노의 생각은 그러했다.
라일라와 쿤둘렌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다른 복도에서 대화 소리와 함께 빠르게 이쪽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라우노가 길게 잴 것도 없이 사복 검으로 공격하려 하자 파울로가 대기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라우노는 어쩐 일인지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미레아와 파울로는 벽을 엄폐물 삼아 몸을 숨기고 인기척이 그들의 앞쪽에 왔을 때 무기를 겨누었다. 상대방이 흡, 하고 숨을 잠시 멈추었다가 자신에게 무기를 겨눈 사람들을 보고 저도 모르게 당황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레아?!”
“아리스?”
아리스는 자신의 검인 페니드란을 들고 있었는데 한바탕하고 오는 길인지 온몸에 피와 정체를 모를 무언가가 잔뜩 묻어 있었다. 파울로도 무기를 겨눈 쪽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율비네도?”
“파울로?”
율비네도 창을 내리며 미레아와 파울로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여기에 어떻게 있는 건가요?”
“그게…….”
율비네의 질문에 파울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져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미레아는 자신의 검 끝이 아리스를 향한 것을 보고는 얼른 검을 거두려 하다가 다시 그의 목에 겨누었다.
“가짜라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편지 봉투의 인장은 산새.”
아리스의 말에 미레아는 바로 그 말뜻을 알아듣고 검을 내렸다. 아리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미레아를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뒤에 라우노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대번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라우노!”
그러면서 미레아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려 그랬다.
“잠깐, 있어 봐!”
미레아의 만류에 아리스가 검을 내리자 뒤쪽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그를 알아본 미레아의 눈이 점점 커졌다.
“세피로스…….”
여러 의미가 담긴 그 말은 반쯤은 울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미레아에게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면서 눈을 한번 힐끔거렸을 뿐이었다. 미레아는 그 사실에 제법 충격을 받았다. 세피로스는 라우노의 앞에 서서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보아하니 무대는 완성이 된 모양이군.”
세피로스의 말에 라우노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렇지. 배우들도 다 모였고. 그건 그렇고, 예상은 했지만 정말 귀신같은 타이밍에 나타났어, 세피로스. 내가 이들에게 접근하려는 것을 미리 알아차린 거야?”
“맞아. 네 생각은 뻔하니까. 나는 모두를 감시하며 준비가 다 되었으니 네가 움직일 날짜만 맞추면 되었지. 너는 극적인 연출을 좋아하잖아?”
“나 참.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네. 뭐, 나 역시 마수들을 풀어 너희를 감시했으니 우리 둘 다 상대방의 의도를 알고 있었던 셈이로군. 그건 비겼다고 치지.”
“그럼 누가 되었든.”
“그래, 뭐가 되었든.”
세피로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그의 얼굴에 깔려 있던 깊은 피로감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또렷한 목소리로 라우노에게 말했다.
“함께 결말을 짓자.”
라우노는 사복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세피로스의 용주가 밝게 빛나며 마법을 시전했다.
눈 부신 빛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제21장 조율자
아리스는 미레아의 모습이 자신이 드디어 미쳐서 보게 된 허상이 아닐까 했는데 상대방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 듯 재확인이라도 하려 그랬다.
“세상에, 정말로 너구나. 적어도 몇 년은 못 볼 줄 알았는데…….”
미레아가 아리스의 양어깨를 손으로 짚었지만, 아리스는 다른 쪽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었다.
“너는 왜 또 그렇게 너절한 모습이야?! 파울로 말고 다른 사람들은 없어?”
아리스가 피투성이인 미레아를 보고 기함했다. 미레아가 저런 꼬락서니인 것을 아리스가 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 것을 보니 미레아 본인이 맞는 듯도 싶었다.
“라일라와 쿤둘렌이 함께 왔어. 너야말로 세피로스 말고 율비네랑 둘이 온 거야?”
“뭐, 일단은. 라우노는 대체 왜 너와 함께 있던 거야? 너를 이렇게 만든 게 라우노 그 자식이야?”
“맞는 말이긴 한데 지금은…….”
서로 당사자 본인이 맞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도 반가워할 새는 없었다. 아리스는 라우노 듀랜트가 미레아와 동행했단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세피로스의 반응은 더욱더 가관이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굴었다.
“대체 세피로스와는 어떻게 만나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가 먼저 내게 연락했어.”
“뭐라고?”
“나를 일곱 별의 바다로 불러내었어.”
미레아는 자신에게는 연락 한 통 없다가 갑자기 아리스와 나타난 세피로스에게 배신감이 올라왔다.
“세피로스가 네게 연락했었다면 나에게도 알렸어야지! 내가 세피로스를 찾고 있단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왜 자신이 아니고 하필이면 아리스인지 알 수 없었다. 아리스가 세피로스에게 연락이 온 것을 자신에게 먼저 말하지도 않은 것 역시 미레아의 기분을 땅에 떨어지게 했다.
“그 일에 대한 불평불만은 시간이 날 때 충분히 들어 줄 테니까 지금은 저 빌어 처먹을 자식이나 어떡할지 생각해 봐.”
그리 말한 아리스는 라우노를 쏘아보았다.
“반쯤은 의도했지만 이렇게 한날한시에 모이게 된 것도 운명이겠지.”
라우노의 말에 세피로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얄궂군.”
“세피로스, 잠깐! 잠깐만! 나랑 이야기해요!”
하지만 세피로스는 자신에게 매달려 오는 미레아를 상대하지 않고 작게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세피로스……?”
미레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아리스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대신 설명해 주었다.
“리비엘로를 죽인 건 세피로스가 맞아. 본인에게 직접 들었어. 그보다는 지금 저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그 말에 미레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세피로스! 거짓말이지요?!”
미레아는 아리스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그를 무시하고 세피로스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거기서 비키세요!”
율비네가 돌연 둘을 덮쳐서 바닥에 내리눌렀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 사복 검이 지나쳤다. 세피로스는 가볍게 도약해 그것을 피하더니 마법을 시전해 공간을 왜곡하여 사복 검의 경로를 변경했다.
미레아와 다른 세 사람은 그들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싸움을 벌인 세피로스와 라우노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들은 대체 어느 편에 가세하여 싸워야 할지 헷갈렸다. 일행들은 세피로스와 라우노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용의 시체를 엄폐물 삼아 몸을 수그렸다.
“아아, 머리 아파! 기껏 만난 세피로스는 나를 무시나 하고!”
미레아가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짜증을 부리다 가슴의 통증을 느끼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미레아를 부축해 주어 얼른 자리에 앉혔다.
“젠장, 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아.”
“왜 그래? 어디가 안 좋아?”
아리스의 당혹감이 섞인 걱정 어린 말에 미레아는 창백한 얼굴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내며 말했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파울로가 그녀를 대신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미레아는 서리 여신의 특이점을 빼앗긴 이후 몸이 좀 힘들어졌어.”
미레아는 파울로를 흘겨보았다. 그래도 파울로는 특이점까지 타격을 받은 미레아가 세렌트와 혼의 연결이 끊긴다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뭐? 서리 여신의 특이점이 뭐야?”
미레아가 멈칫했다.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다음에 벽을 짚고 몸을 바로 세웠다.
“나중에 설명해 줄게.”
“미레아.”
“제발, 아리스.”
미레아가 애원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묻지 말아 줘. 그보다 더 급한 일투성이잖아?”
단호한 어투에 아리스가 멈칫한 사이 미레아는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그래, 급한 일투성이라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말에 아리스는 잠시 혼자 생각에 잠겼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다.
“다들 여기 온 목적이 뭐야?”
“뭐긴 뭐야. 우리는 세피로스를 찾으려 그랬지. 라우노가 끼어들어서 일이 이상하게 되었지만.”
파울로의 대답에 아리스가 되물었다.
“세피로스를 찾은 이후에는? 단순히 람의 복수를 목적으로 그를 찾은 것은 아닐 거잖아요.”
그 말에 미레아가 끼어들었다.
“정말로 세피로스가 리비를 죽인 게……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