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98화 (198/257)

198화.

“말했지? 나는 필요하다면 혀라도 깨물어 자살할 거야. 인질 따위가 되는 취미는 없어.”

“오, 그때야말로 이 세계의 변칙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미레아는 알툰이 지칭한 호칭으로 아리스를 이르는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그 와중에 파울로는 출발하기 전에 라케드가 그에게 은밀하게 했던 말을 복기했다.

‘만일, 서리 여신의 조각을 라우노에게 빼앗겼다면 그에게 덤벼들지 마. 라우노가 서리 여신의 특이점을 갖고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한 상태다. 그 특이점의 힘은 상상 이상이야. 너희가 위험해. 그러니 차라리 다른 곳에 써 버리게 둬. 서리 여신을 죽이려고 하든, 다른 꿍꿍이속이 있든, 대응은 그 이후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잖습니까. 우리의 목적은 라우노 그가 이 세계의 균형과 유지를 망가트리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닙니까.’

‘그때는 그때의 방법이 따로 있기 마련이다.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그래서 파울로는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라우노가 미레아에게 여신의 조각을 거두어 간 지금도 여전히 그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라우노를 견제할 뿐 달려들지는 않고 있었다.

게다가 라우노는 그들의 존재를 그다지 귀찮아하지도 않았다. 마치 거대한 존재의 앞에서 무력한 개미라도 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차라리 그쪽이 나았다. 적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가지요. 신성력 결계 덕분에 이제는 정말 이 힘을 유지하기 힘들어서요.”

라우노는 손에 들고 있는 빛 덩어리를 가두고 있던 자신의 마력을 해방했다. 그러자 눈이 부신 빛이 번뜩이더니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서리 여신의 특이점은 여신의 일부이기 때문에 여신이 조율 중인 이 세계의 법칙을 다시 조율 할 수 있지요. 그러니…….”

빛은 멀리 가지 않고 그들의 머리 위에서 사라졌다. 그 자리에 공간이 찢어진 것 같은 흔적이 남았다.

“이렇게. 제 접근이 금지된 성소라 해도 그 제약을 풀어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라우노는 당황하지 않고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특이점이 사라진 자리에서 공간을 왜곡했다.

“역시 다차원의 경계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 책으로 치면 어느 페이지 사이에 있는 것인지 찾지 못하여 애를 먹고 있었는데…….”

라우노는 이 상황에 취하기라도 한 듯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거렸다.

“당신들이 조사할 예정이었던 곳들 말입니다. 라케드가 왜 그런 곳들을 뽑아 주었는지 아시나요? 그것은 그 지점에 다차원의 경계와 연결된 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검은 신전은 차원의 경계에서 보비네가 은둔하고 있는 곳이었지만 서리 여신에게 바로 통하는 길은 아니었지요. 원래라면 그곳에는 제가 접근할 수 없었을 텐데 당신들 덕분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건 감사합니다. 일이 마무리되면 보비네를 완전히 죽이러 갈 수 있는 길을 알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의 말에 미레아와 일행들은 자신들의 실책을 자책하며 혀를 찼다.

작은 실금처럼 보이던 흔적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 변화에 공간이 울리고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벽을 따라 들려왔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워프 게이트가 다시 열렸다. 하지만 그들이 줄곧 봐 왔던 워프 게이트와는 명백하게 달랐다. 워프 게이트가 공간을 접어 문을 여는 마법이라면 이것은 공간을 갈라 문을 만든 것이었다.

“신전 이외에는 일곱 별의 바다도 있지만…… 그곳은 페이릭의 영소가 없으면 문을 찾을 수 없으니 저는 쓸 수 없는 곳이지요. 다른 곳들도 비슷비슷하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런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대편은 온통 암흑이었기 때문에 미레아와 다른 세 사람은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라우노는 예상했다는 듯 게이트 안으로 한쪽 발을 쑥 집어넣었다.

“공간이 안정화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우리가 통과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우리?”

파울로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 우리. 당신들도 함께 가는 겁니다.”

“우리를 굳이 데려가려는 저의가 뭐야. 우리는 당신을 방해하는 게 목적인데.”

파울로가 한껏 경계하며 묻자 라우노는 관자놀이께를 긁적거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말했잖아요. 관객은 많을수록 좋다고. 제 일을 훼방 놓을 생각인 건 잘 알겠습니다만, 어차피 그 인원으로는 크게 위협이 되지도 않고…… 아, 물론 신성력 결계가 아무것도 아니란 소리는 아닙니다. 정말 짜증 나네요, 그거. 이 문 반대편은 고밀도의 신성력으로 이루어져 있을 텐데 솔직히 짜증 부리지 않을 자신은 없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간만 잘 맞춘다면 지금쯤 세피로스도 가 있을 테니까요.”

세피로스가 있을 것이란 말에 일행들의 눈이 커졌다.

“세피로스가 있다고요? 당신이 가려는 곳에?”

미레아의 말에 라우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그를 적당히 상대해 줄 사람도 필요하거든요.”

그렇게 라우노가 앞장섰다. 남은 네 사람은 눈짓으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였다. 파울로는 잠시 고민하더니 라일라와 쿤둘렌을 지목했다.

“라일라와 쿤둘렌은 여기서 납치당한 여자들을 돌봐 주세요.”

파울로의 말에 둘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리마 대장과 미레아 군만 보낼 수는 없습니다.”

“맞아요!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저 위험한 곳에 둘만 보내겠어요? 우리도 같이 가요.”

라일라가 빠른 걸음으로 미레아의 옆에 섰다.

“라일라, 그래도…….”

라일라는 보란 듯이 미레아의 팔짱을 꼈다.

“게다가 여기나 저기나 대체 어디인지 모르는 와중에 따로 움직였다가 일을 그르치면 서로 도울 수도 없잖아요.”

쿤둘렌의 말에 파울로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다른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서로를 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은 미레아를 선두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미레아는 기회를 봐서 라우노의 뒤통수라도 후려갈길 생각이었다. 어차피 여기서 라우노만 보낸 뒤 손 놓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말이다. 거기에 세피로스가 있을 것이란 소리까지 들은 이상 사실 선택의 여지란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 결정을 게이트를 넘자마자 후회했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어떤 설비의 복도였는데 수많은 용의 미성숙 개체들이 통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라우노와 미레아의 일행들을 일제히 바라보더니 입을 쩍 벌리고 포효하였다.

“우리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맞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던 파울로가 구태여 다른 사람들의 입으로 확인을 받으려 했다. 라우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사복 검을 채찍처럼 한번 내려쳤다.

“세피로스는 뒤처지는 건지 이쪽이 아닌 다른 쪽 통로로 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네요.”

“세피로스는 어디 있는 건데요? 우리를 속였다거나 한 거면…….”

날이 선 미레아의 목소리에 라우노는 여상하게 대꾸했다.

“속이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워낙 미로 같은 곳이라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다니다 보면 마주치겠죠.”

“세피로스를 찾겠다는 우리의 목적 자체는 달성한 거네.”

파울로가 중얼거렸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만.”

쿤둘렌이 금방이라도 자신들의 목을 물어뜯으러 달려들 것처럼 한껏 공격 태세를 갖춘 용들을 보며 현재 상황을 상기시켜 주었다.

라우노는 사복 검을 휘둘러 가장 선두에 있던 용의 목을 베었다. 아직 비늘이 여려 속의 살점이 금방 뜯겨 나갔다. 피가 분수처럼 튀었고 용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잠깐!”

미레아가 그를 저지하려 그랬다.

“저 용들은 아직 아성체예요! 어린 애들이라고요!”

“그런데요?”

“저는 어린애들을 공격할 순 없어요!”

“정말…… 대책 없이 순진해 빠지다 못해 멍청하군요.”

라우노는 혀를 끌끌 차더니 사복 검으로 뒤에 있던 용을 공격하며 말을 이었다.

“이들은 우리를 여신의 방까지 갈 수 없도록 방해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방해물은 제거하는 게 맞지요.”

쿤둘렌이 마법으로 방호벽을 만들었다. 방호벽에 수 마리의 용들이 우르르 몰려와 몸으로 들이박았다. 하지만 방호벽은 견고하게 유지 중이었다.

잠시 숨 돌릴 시간이 생긴 틈에 라우노는 몸을 일으켰다.

“젠장, 신성력 때문에 구역질이 나서 집중을 못 하겠네.”

라우노가 흘러가는 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들은 미레아가 파울로의 옆구리를 푹 찌르며 속닥거렸다.

“라우노를 죽이고 세피로스를 찾으러 가는 건 무리이려나.”

그 말에 파울로는 라우노를 힐끔거렸다. 특이점의 힘을 이정표 삼아 개방한 덕에 그 힘을 잃었다 해도, 아직 서리 여신의 특이점이 라우노의 수중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함부로 라우노에게 달려들었다가는 라케드의 경고를 무시한 셈이 되었다. 엉겁결이지만 지금은 라우노와 행동을 같이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라우노가 같잖다는 어투로 말했다.

“저는 세피로스보다 먼저 여신의 방에 도착해야 합니다. 그것만은 알고 계세요.”

라우노는 불쾌하단 듯 용의 체액이 묻은 머리를 몇 번 털은 후 쿤둘렌의 방호벽을 지나쳐 앞으로 나섰다.

“특이점을 사용할 수 있다면 제가 굳이 힘을 쓰지 않아도 되니 참 좋을 텐데…… 이곳은 서리 여신의 영향력이 큰 곳이라 그런지 서리 여신의 특이점 역시 제게 협조를 해 주지 않는군요. 이곳에 접근할 수 있도록 풀어 준 역할밖에 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네요.”

라우노는 특이점을 놓았다. 특이점은 빛으로 된 나비처럼 포르르 날아올랐다. 라우노는 그것을 뒤쫓기 전에 그 경로에 있는 용들을 향해 수직으로 사복 검을 찔러 들어갔다. 에워싸고 있던 용들의 사방에서 칼날이 튀어나와 수십 마리의 용들을 순식간에 무력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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