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97화 (197/257)

197화.

“라우노가 워낙 감쪽같이 없어졌지만, 예르게네 덕분에 워프를 추적하는 시간이 단축되었어. 우리끼리였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거야. 잘 버텨 주었어.”

쿤둘렌이 그들의 앞에서 언제든지 방어 마법을 펼 수 있도록 마석이 박힌 건틀릿을 낀 양 주먹을 서로 쿵쿵거리며 때렸다.

“나 말고 저 여자들! 저 여자들 먼저 구해!”

미레아가 파울로에게 매달렸다. 파울로와 라일라는 얼떨떨한 얼굴로 미레아를 바라보다 그녀가 가리킨 관 구조물들로 시선을 옮겼다. 그들은 관 안에 미레아 또래의 여자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는 것을 보고 흠칫했다.

“부탁이야! 나는 괜찮으니까 저 사람들 먼저……! 어서!”

“저 사람들이 누군데?”

“나와 같은 서리 여신의 조각이야.”

그렇기에 미레아는 더 절박했다.

“나는 튼튼하니까 상관없어도 저 사람들 잘못하면 다 죽을지 몰라! 라우노가 특이점을 빼내면 분명히 높은 확률로 죽어!”

그 튼튼하다는 분이 지금 다 죽어 가면서도 다른 이들을 먼저 걱정하고 있었다. 파울로는 또 그 대책 없음에 작게 신음했다. 게다가 구하라 해도 저 많은 인원을 고작 네 명이 대피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아, 신성력 결계는 아직도 짜증스럽네요. 제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하지만 불쾌하군요.”

라우노는 인상을 쓰며 코와 입을 막고 있었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말했다.

“손님들이 늘었군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서너 명 정도 늘어난다 해도 기왕 이렇게 된 거 관객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 말입니다.”

라우노가 어깨를 으쓱였다. 미레아는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으며 파울로를 퍽 밀쳤다.

“빨리! 시간 없단 말이야!”

하지만 파울로는 쉽게 밀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미레아가 제일 중요했고 다른 여자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여자들을 대피시킨 다음엔 어떡하실 생각이지요? 어차피 저는 추적 마법에 능합니다.”

“내가 남아서 실컷 방해해 주지.”

“너를 버리고 갈 수 없어.”

파울로의 말에 미레아가 눈을 홉뜨며 그에게 사납게 말했다.

“나는 또 나 혼자만 살아남을 생각 따윈 없어! 만약 내가 저 여자들을 한 명이라도 구해 내지 못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내 무언가가 꺾일 거야! 그러니까 파울로, 나를 도와줘!”

미레아의 애원 섞인 말에 파울로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미레아와 관들을 번갈아 가며 보다가 작게 욕설을 내뱉고는 미레아를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쿤둘렌에게 지시를 내렸다.

“쿤둘렌! 아공간을 만들어 주세요!”

파울로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호스들 사이를 훌쩍 뛰어다니며 가장 가까이 있는 관에 도달했다.

“어딜!”

라우노가 사복 검을 휘두르자 라일라가 신성력의 농도를 높였다. 그러자 라우노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라우노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라일라를 노려보자 그녀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내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여 그것을 맞받아쳐 주었다.

“미레아, 일단 이거 마셔.”

라우노가 잠시 무력화된 사이 라일라가 건넨 것은 라라미드의 특제 회복 드링크였다.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는 순간 어느 정도 힘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라라미드의 설명대로 수명을 당겨쓰는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미레아는 그것을 한입에 털어 넣고는 입가를 소매로 훔쳤다.

“당신 상대는 나야!”

드링크 덕에 어느 정도 회복한 미레아가 세렌트를 뽑아 들며 비틀거리는 라우노에게 달려들었지만, 인형 중 하나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인형은 마수의 영소가 없으니 신성력 결계에 영향받지 않은 덕분이었다.

미레아가 그들을 상대하는 사이, 라일라는 신성력 결계를 조절했고 쿤둘렌은 파울로와 라우노 사이에 아공간을 만들어 내어 공간을 분리했다. 그러는 동안 파울로는 가장 가까운 관에 도달해서 유리로 된 관의 뚜껑 사이로 보인 글로리아의 얼굴을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미레아가 왜 그렇게까지 이들에 집착한 것인지 알 것도 같았다.

한번 얼굴을 텄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거지…….

파울로는 관 주변에서 뚜껑을 열 만한 장치나 도구 같은 것을 찾지 못해서 대검으로 유리를 내리치려 했다. 마법을 안정시키고 온 쿤둘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벽에서 조작 콘솔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는 뭐가 되었든 지금 상황보단 나아지겠지 싶어 그것을 일단 누르고 보았다.

그러자 운이 좋게도 공기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다른 관 뚜껑이 일제히 열렸다. 관 뚜껑이 열렸어도 글로리아나 다른 여자들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파울로는 얼른 관에서 글로리아를 빼내어 자신의 어깨 위에 얹혔다.

“이 사람들을 우리 둘이 전부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는 없어요! 손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고요!”

“그렇다면 아공간으로 옮겨 놓지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공간에 있는 동안은 다소의 부작용이 있을 수는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 같군요.”

쿤둘렌은 파울로가 사람 둘을 옮기는 사이 한 번에 넷을 짊어지고는 손수 자신이 만들어 낸 아공간 안으로 그녀들을 던져 넣었다.

미레아는 인형 둘과 검을 맞대고 있었다. 인형들은 마법을 부려 미레아를 공격했지만, 그녀가 그것을 세렌트로 쳐 내자 마력이 흩어지면서 파훼되었다.

미레아는 뒤쪽을 힐끔거리면서 중간중간 대피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인형 중 하나의 목을 베어 낸 순간이었다.

“꺄악!”

라일라의 비명에 돌아보니 어느새 라우노가 그녀의 목을 잡고 있었다. 인형을 상대하느라고 한눈을 판 사이 라우노가 움직인 것이었다.

“당신들이 착각하고 있는데…… 신성력 결계는 불쾌할 뿐이지 내 힘을 완전히 억제하지는 못해요.”

그는 자못 불쾌한 얼굴로 신성력 결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마도 기구를 손에 힘을 줘서 부숴 버렸다. 그리고 라일라의 목을 잡은 반대편 손에도 힘이 들어가자 라일라가 고통에 찬 기침을 내뱉었다.

“하지 마!”

미레아가 애원하듯 말했다. 대피해야 하는 여자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고 파울로나 쿤둘렌이 그들을 포기하고 여기까지 달려오기에는 거리가 상당했다. 미레아는 어쩔 수 없이 세렌트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하지 말라고! 차라리 내게서 원하는 것을 가져가!”

“미레아!”

라일라가 책문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미레아의 눈은 단호했다. 미레아의 선택이 만족스러웠는지 라우노는 라일라의 목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바닥에 풀썩 떨어진 라일라의 목에는 검푸른 손자국이 올라오고 있었다. 라우노가 다가오자 미레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착한 아이로군요. 당신이 허락한 것입니다.”

“미레아! 그러지 마!”

“미레아!”

라일라와 파울로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지만, 미레아는 자신에게 내려질 상황을 대비해서 심호흡했다.

라우노는 아까 했던 대로 미레아의 미간을 엄지로 꾹 눌렀다. 라우노의 손끝에서 시작된 붉은 색의 스파크는 순식간에 미레아의 전신을 덮었다. 그와 동시에 미레아는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다. 스파크가 거칠게 튀며 타닥거리면서 영소끼리 반발하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파울로와 쿤둘렌이 달려와 공격하려 했지만, 그들은 미레아와 라우노의 손이 맞닿은 곳에서부터 일어나는 힘의 파장에 밀려 몸이 훅하고 나가떨어졌다.

미레아는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 중 어딘가가 찢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비명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정신을 완전히 잃고 싶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데 어느 순간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 미레아, 너 이러다가 진짜로 죽어! 네게 특이점이 빠진 만큼 내 영소를 너와 공유하도록 흐름을 바꿨어. 당장은 괜찮겠지만 내가 없으면 너는 지금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우리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바닥에 떨어진 세렌트가 다급한 목소리로 미레아에게 경고했다.

“고, 고마워…… 세렌트…….”

미레아는 차가운 바닥에 관자놀이를 붙이고 입을 뻐끔거렸다. 라우노는 미레아의 미간을 누르고 있던 손을 거두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미레아 제인스터. 이만한 특이점을 분리해도 아직 살아 있다니. 뭐, 당신의 영소는 최대한 건들지 않으려 노력했으니 어느 정도 버티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미레아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라우노의 말에서 상황을 유추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여자들은…… 죽었어?”

“제게는 정말 안타깝게도 당신의 동료들이 전부 아공간으로 처넣어 버렸습니다. 뭐, 그래도 당신이 가장 큰 조각이 된 덕분에 특이점의 힘도 훨씬 강해져서 다른 특이점은 필요 없을 것 같네요.”

미레아는 전신이 뜯긴 것처럼 얼얼했지만 기운을 짜내서 몸을 일으켰다. 그 과정 중에 미끄러져 다시 바닥에 머리를 박는 짓을 여러 번 하면서도 세렌트를 지팡이 삼아 후들거리는 두 발로 간신히 일어섰다. 다른 일행들이 달려와 그녀의 몸을 부축해 주었다.

“아직도 일어나는 겁니까?”

미레아는 숨을 헐떡거리며 라우노를 노려보았다. 그의 손에는 빛나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 힘을 라우노의 마력으로 가두고 있는지 빛을 둘러싼 빛무리처럼 라우노의 마력이 뿜어 대는 붉은 스파크가 그것의 주변에서 반짝거렸다. 라우노는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과연 서리 여신의 특이점이군요. 그 일부의 힘이라고는 하지만 단순히 억누르고 있는 것도 제법 힘드네요.”

“그 빌어먹을 것으로 무슨 일을 할지 모르겠지만 그만둬.”

“저라면 그런 식으로 제게 말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이 힘의 제약을 풀어 버리면 이 세계의 절반이 날아갈 텐데 좀 더 공손히 말해야지요. 그리고 제가 이 고생까지 했는데 그렇게 호락호락 돌려줄 리 없잖습니까.”

미레아는 자꾸만 흐려지는 정신을 볼을 두르려 깨웠다. 라우노는 선심이라도 쓴다는 태도로 말했다.

“어차피 당신은 지금 제게 큰 위협도 되지 못하니 살아남은 자의 특권을 드리지요.”

“특권?”

“당신을 살려 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미레아의 반항기 어린 말에 라우노가 싱글거리며 웃었다.

“당신은 일종의 인질이지요. 분명히 제 계획을 막으려고 그들이 움직일 테니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