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다른 곳에 패거리들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상대해야 할 적은 다섯. 하지만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아리스는 이들과 싸워도 되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 이들을 깨어 낸 것을 보니 당신도 다급했나 보지?”
세피로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용들은 그르렁거리면서 세 사람을 견제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기세였다.
“아직 어린놈들이라 각인 효과 때문에 설에게 충성할 거야. 행동 방식이 상당히 간단하지. 말로 설득할 만한 상태가 아니다.”
세피로스의 설명에 아리스가 되물었다.
“서리 여신에게 충성하는 개체라면 우리를 들여보내 줄 수도 있잖아요.”
“저 어린것들은 이 성소를 지키기 위해 존재해. 설의 명령만 있다면 우리가 성소에 들어가려 한다면 그게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제거할 거다.”
“저 녀석들, 죽일 건가요?”
“그래야 한다면.”
아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검을 고쳐 잡았다.
“그렇다면 내가 상대하는 동안 당신은 율비네와 함께 안으로 들어갈 문을 찾아요.”
세피로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와 동시에 용들이 셋에게 달려들었다. 아리스는 율비네에게 세피로스를 보호하며 견제를 부탁했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파고들 틈을 찾았다. 아리스는 저 용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자신답지 않게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미레아 녀석에게 옮았나 보다.
용 중 하나가 마법을 전개했다. 용들이 쓰는 마법을 상대하는 것은 아리스에게 상당히 거추장스러웠다. 인간이나 오빈이 술식을 전개하면 자신의 마력으로 그 술식을 파훼하면 되는데 용들은 체내에서 술식이 완성되어 버려서 외부에서 술식을 파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리스와 율비네는 마법으로 이루어진 공격을 하나하나 피하며 적당히 공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용들의 무기는 마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압도적인 신체 능력으로 밀어붙이는 공격이 들어왔다. 마법과 체술을 결합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리스의 특기이기도 했다. 아리스는 날개를 꺼내 공중으로 훌쩍 날아올라 공중전을 펼쳤다. 용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리스 역시 자신의 근력을 강화해서 용들의 공격을 쳐 내었다. 그리고 공간을 베어 내듯 페니드란을 휘둘렀다.
“멈춰!”
아리스의 외침에 검기가 지나간 자리에 그물 같은 구조물이 생겼다. 아리스에게 덤벼들던 용 중 하나가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것을 들이박았다. 그러자 움직임이 둔해지더니 이내 거대한 바위로 변한 것처럼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땅으로 떨어졌다. 죽은 것은 아니었으나 한동안 풀리지 않을 것이었다.
“한 놈 보냈고!”
아리스가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다른 용에게 달려들었다. 세피로스도 용 중에 어린 축에 속했지만 지금 그들에게 덤벼드는 것들은 아리스가 봐도 애송이 같았다. 결정적으로 별다른 침입자 없이 이 안에서만 지냈다 보니 실전 경험이 적은 것이 티가 났다.
아리스는 두 마리의 공격이 동시에 날아드는 것을 가뿐히 피한 후 페니드란으로 다시 석화 마법을 불러내었다. 그렇게 세 마리를 무력화시키고 나니 세피로스와 함께 출입문을 열려고 애를 쓰던 율비네 쪽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아리스, 찾았습니다!”
양쪽으로 열리는 출입문을 세피로스가 용의 모습으로 현신해 힘으로 열고 있었다. 세피로스가 문을 연 순간, 율비네는 당황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으아아, 거짓말!”
문 안쪽에는 아성체 용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오히려 세피로스는 동요하지 않고 광범위 마법을 사용할 준비를 했다.
“세피로스, 잠깐!”
아리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엄청난 열기가 율비네를 덮쳤다. 율비네는 세피로스의 등 뒤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지만 전해져 오는 열기에 잘못하면 몸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세피로스의 마법이 지나간 자리에 새카맣게 숯처럼 변한 아성체 용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그들은 미처 방어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당해 버렸다.
“세피로스…… 당신 정말…….”
동족이고 뭐고 다 버려 버렸구나.
아리스는 눈 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에 정신이 아연했다. 살이 타는 냄새는 역했다. 율비네마저 두 눈을 질끈 감고 시선을 돌렸다.
아리스라고 해서 이런 방법을 쓸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직 어린 용들을 베어 내는 게 꺼림칙했고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았기 때문에 일부러 힘을 더 들이면서까지 최대한 다치지 않게 무력화하는 방법을 썼던 것이었다.
그런 노력이 수포가 되자 아리스는 지금 자신이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건지 회의감이 들었다. 세피로스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다음 세대 용들을 이끄는 장로인 라케드가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괘념치 않아 했다. 그저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가지.”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아리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세피로스는 별난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대답했다.
“적어도 네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지.”
아리스는 이를 악물고 페니드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저도 모르게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세피로스는 아성체 용들의 시체를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율비네는 아리스의 눈치를 보다가 그가 결국은 세피로스를 쫓아 움직이자 아리스의 뒤를 따랐다.
* * *
결론부터 말해서, 미레아는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세렌트로 몸의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려 라우노에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라우노가 만들어 낸 인형을 연달아 상대하는 데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노력한 끝에 바닥에는 인형의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미레아가 아직 남아 있는 두 명의 인형을 상대하는 동안 라우노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틈틈이 라우노에게 유효한 타격을 몇 번 먹였으나 그마저도 치명적이진 않았다.
마력 고갈이 일어나기 직전인 미레아는 피를 토해 냈다. 끌어올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끌어와서 마력을 쓴 덕에 세렌트는 그저 평범한 검으로 전락해 버렸다. 하지만 미레아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가를 쓱 닦고 허리를 다시 꼿꼿하게 펴고 검을 고쳐 잡았다.
“아직도 일어나는 건가요?”
라우노가 감탄하듯 말하자 미레아는 입가에 고여 있는 피를 퉤 뱉어 내고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별수 없잖아요.”
“당신 그러다 죽어요.”
라우노가 동정처럼 한 말에 미레아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것쯤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상관없어. 난 언제나 죽을 각오로 살았으니까.”
“그래 봤자 개죽음일 텐데요?”
“그것도 상관없어. 적어도 죽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요.”
“역시 이해할 수 없군요.”
라우노가 사복검을 휘두르는 것을 미레아는 바닥에 널브러진 인형 군단의 시체 중 하나를 방패 삼아 피했다. 미레아는 빠르게 움직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넘어졌다.
“젠장!”
미레아는 바닥에 누워 라우노가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라우노가 자신에게 손을 뻗는 것을 몸을 간신히 움직여 피하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 자신의 관자놀이에 겨누었다.
“움직이지 마!”
미레아의 행동에 라우노가 멈칫했다.
“내가 죽으면 일이 귀찮아진다 그랬지?! 그럼 움직이지 마! 자살할 거야!”
“소용없는 짓입니다.”
라우노가 준비 동작도 없이 마법을 전개했다. 마법으로 방아쇠의 움직임을 막고 미레아에게 다가가 권총을 발로 걷어차자 권총은 미레아의 손에서 벗어나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빌어먹을…….”
결국, 그나마 멀쩡한 인형에게 붙잡혀 팔이 뒤로 꺾여 완전히 무력화된 미레아가 눈만큼은 형형한 기색으로 치떴다.
― 미안해, 미레아. 내게 마력이 더 남아 있었으면……!
간신히 자신의 의사를 옮길 만큼의 마력만 남아 있던 세렌트의 말에 미레아는 이제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 라우노가 미레아의 눈높이에 맞춰 꿇어앉았다.
“미레아 제인스터. 저는 이미 몇 번이고 당신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 아시나요?”
“그러지 못할 이유라도 있었겠지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레아의 말에 라우노가 작게 웃었다.
“당신은 아무렇게나 죽으면 안 돼요. 하나뿐인 당신의 목숨으로 그렇게 아까운 짓을 할 수는 없지요.”
“그게 무슨 의미인데요?”
“당신의 죽음은 극적으로 연출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극적……?”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도록 말이지요.”
“아까부터 당신이 하는 소리의 절반도 이해할 수 없어.”
“그래야 흑익이 당신의 죽음으로 절망감을 느끼고 의지에 먹히지 않겠습니까. 이번에야말로 슬픔이란 의지에 완전히 잠식되어 이 세계가 어찌 되든 신경 쓰지 않고 파멸만 남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뭐……?”
미레아가 멀거니 라우노를 올려다보자 그는 상당히 즐겁다는 얼굴을 하였다.
“웃기지 마! 아리스는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짓 따윈 하지 않아!”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만 저는 제 예상이 맞아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거든요. 당신은 그에게 있어서 아주 소중한 사람이니 말입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눈앞에서 자결한 것으로 이미 한차례 의지에 먹혔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당신이 그의 눈앞에서 살해당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요?”
서리 여신은 미레아를 자신의 조각으로 만들면서 아리스가 이 세계에 종말을 가져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 하지만 지금 라우노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려 들고 있었다. 미레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리스가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일부러 지금까지 당신을 살려 두었지만 이젠 상황이 다르지요.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으니 이 이상 당신의 편의를 봐줄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지금 당신이 없다면 다음 대상은 서리 여신의 다른 조각들인 저 여인들이 될 테니까요. 그건 원하지 않잖아요?”
그리고 그녀의 미간을 엄지로 꾹 내리눌렀다. 미레아가 머리를 털어 그것을 치우려 하자 반대편 손으로 미레아의 턱을 잡아 움직임을 막았다. 미레아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 이건 정말로 위험했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아닌, 더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거부반응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외쳤다.
“하, 하지 마!”
당연한 소리겠지만 라우노는 그 말을 무시하고 다시 미레아의 미간을 엄지로 꾹 누르더니 싱긋 웃었다.
“그저 조각을 잘라 내는 것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영혼이 어떤 타격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뭐,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신께 기도라도 해 보세요.”
“안 돼!”
그때였다. 공간을 찢으면서 동시에 세 사람이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덩치가 커다란 사람이 미레아의 앞을 막아서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바닥에 딱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어른 주먹만 한 그것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팽이처럼 돌기 시작했다.
라우노는 입을 막고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라일라가 석 달 동안 연구해서 완성한 휴대용 간이 신성력 결계였다.
그러는 사이 다른 둘은 미레아의 몸을 옥죄고 있던 인형을 걷어차서 그녀에게서 떨어트려 놓았다. 양손이 풀려난 미레아가 비틀거리자 파울로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 지탱해 주었다. 미레아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라일라, 파울로…….”
“미레아, 괜찮아?”
라일라 역시 얼굴이 잔뜩 울상이었다. 파울로는 습관적으로 미레아의 이마에 딱밤을 먹이려다 여기저기가 엉망진창인 상태를 확인하고는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