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그 말을 들으니 세피로스 님이 저를 이곳에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일이 이렇게 될 줄 당신은 다 알고 있었지요? 제가…….”
미레아 제인스터를 사랑하는 만큼 라슈온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고.
“저는 미레아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어요.”
비록 그 대상이 이 자리에는 없지만 절절한 사랑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그 말은 저는 이제 이 라슈온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소리지요.”
아리스의 표정은 무거웠지만 어쩐지 개운한 목소리였다. 세피로스는 그런 아리스를 조금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세피로스는 아직 아리스에게 구체적인 계획은 이야기하지도 않았지만, 아리스는 벌써 결론을 내린 듯 보였다. 그리고 얼굴을 보아하니 세피로스가 한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는 듯싶었다.
“좋다. 그렇다면 흑익, 나는 네가 신탁대로 이 세계의 종말을 불러오는 것을 원한다. 그렇게 되면 네게 내려진 신탁이 실행되면서 오히려 너는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의 종말로부터 말이지.”
그 말에 율비네가 펄쩍 뛰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율비네를 진정시키며 아리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 제게 말했던 말을 종합해 보면, 당신이 말한 이 세계의 종말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저는 그 방법을 모르는걸요. 제가 종말을 불러오는 것이 당신이 생각한 그 범위에서 일어나는 게 확실한 건가요?”
“글쎄…… 사실 난 그것까지는 알 수 없어. 그건 오로지 네게 달린 것이거든.”
세피로스의 말대로 아리스는 하하 웃어 주었다.
“당신은 처음부터 어떤 방식이 되었든 저를 희생시키실 생각이었지요?”
그 말에 율비네가 깜짝 놀라 아리스와 세피로스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아리스, 설마 세피로스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생각인가요?! 희생이라니, 무슨 뜻이에요?”
“진정해, 율비네. 난 세피로스에게 일방적으로 이용당하지는 않을 거야. 결정은 내가 해.”
아리스는 언제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자신이 스스로 정했다.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 해도 최소한 자신이 내린 결정대로 움직였다. 그는 이번에도 세피로스가 길을 제시하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한때 기력을 낼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권태롭게 지내던 그 시절은 과거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겨우 업보를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 같거든.”
“업보라고요?”
“그래, 업보.”
율비네는 그런 말을 하는 아리스가 못 미더웠고 불안했다. 율비네가 아는 아리스는 꼭 무슨 일을 치기 전에 무섭도록 가라앉은 얼굴을 했다. 침착해 보이기는 했으나 지금 그는 그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율비네는 아리스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세피로스와 아리스의 대화는 율비네가 이해하기에는 의문투성이였다.
아리스는 율비네에게 시선을 거두고 세피로스에게 말을 이었다.
“좋아요. 어차피 모든 일이 제게 달렸다면, 당신이 저를 이용하는 만큼 지금은 제가 당신을 이용하도록 하지요. 세피로스, 당신을 돕겠어요.”
“앞으로 내가 벌일 일들에 대해서는 동의하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피로스는 아리스의 대답이 그다지 간절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에겐 처음부터 아리스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리스는 세피로스의 의중을 알 것 같았다. 굳이 자신을 찾은 것도 아리스가 없으면 세피로스의 계획은 시작도 하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스는 앞장서서 세피로스의 일을 훼방 놓을 생각이 없었다. 세피로스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 것은 물론, 아리스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에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지금은 동의하는 수밖에.”
아리스는 태세 전환이 빨랐다. 누군가를 쓰고 버리는 것은 익숙했기 때문에 세피로스가 리비엘로를 죽이고 미레아를 배신했다 해도 목적만 맞는다면 그와 함께 행동할 의향은 있었다.
“좋다. 그렇다면 이미 알겠지만 나는 네 도움이 필요해.”
“구체적으로 제가 무얼 하면 되는 건가요?”
“때가 되면 다 알게 되어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그랬지?”
“얌전히 시키는 대로 움직이란 소리인가요? 마음에 들진 않지만, 방법이 없으니 일단 그러지요. 그럼 라우노는 어떡하실 건데요?”
“나는 너에게 라우노에게 필적할 만한 힘, 그 이상의 것을 주겠다.”
그 말에 아리스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했지만 역시나 그런 방법일 줄은…… 아무래도 세피로스 님이 하려는 일은 제 예상과 별로 다르지 않네요.”
아리스는 세피로스가 보일 태도를 어림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사실 지금까지 말했던 계획들은 차선책이란 게 있으면 뒤로 미루고 싶기는 한데…….”
말은 그렇게 했어도 아리스에게 차선책이란 것이 없었다. 지금 세피로스를 막는다고 해도 자신에게 남겨진 신탁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고 그것은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것이었다.
서리 여신의 신탁은 예지나 예언과 달라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를 리비엘로가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자신에게 내린 신탁을 없앨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예언인지 신탁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이 되었든 그들은 아리스를 불길한 것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었고 아리스는 그러한 상황에 염증이 생겼다.
그렇다면 죽지 못해서 살았던 짧은 인생, 다른 쪽으로 해답을 얻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세피로스의 계획이 모두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세상의 모든 이에게 질타를 받는 것보단 혼자가 되는 쪽이 훨씬 편했다.
이것은 속죄라면 속죄였다. 어찌 되었든 아리스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해 버린 과거가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세계는 미레아에게 있어서 소중한 곳이었다. 그것은 곧 아리스에게도 소중한 곳이 되었다는 소리였다. 그런 세상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던질 수 있었다.
미레아를 위해서. 미레아가 살아가야 하니까.
“아리스, 무슨 생각인 건데요? 제게도 말을 해 주세요.”
서로 속내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통에 대화를 따라가지 못한 율비네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아리스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무슨 생각인지 율비네에게 눈썹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싫어.”
“아리스!”
아리스는 율비네에게 웃어 보였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개운한 태도를 보였는데 그게 더 율비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그렇다 해도 지금 따져 물어 봤자 아리스가 제대로 대답해 줄 리 없었다.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들어 율비네는 당분간은 계속 아리스를 지켜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이 막을 수 있도록 말이다.
율비네보다 한발 앞서 아리스의 생각을 눈치챈 것은 페니드란이었다.
― 아리스, 잠깐.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페니드란이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고 물었지만, 아리스는 자신의 검을 살짝 무시하고 지나갔다.
― 네 생각은 내게 그대로 흘러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잊은 거야? 네가 지금 생각 중인 일을 벌일 계획이라면 난 반대야! 미쳤어?
“페니드란,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차선책이 없을 때 선택하는 최후의 방법이야. 그러니까…….”
― 최후의 방법이라 해도 그런 짓은 내가 용납 못 해, 아리스!
페니드란의 만류에도 아리스는 세피로스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쨌든, 이 일은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당신이 먼저 배신하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어차피 저는 할 수 있는 게 지금은 딱히 없으니…….”
“그건 걱정하지 마. 옛 비공정의 시스템은 내가 잘 알기 때문에 손보는 것쯤은 할 수 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그것도 여쭙고 싶네요. 일전에 제게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하셨잖아요. 그것도 거짓말이었어요?”
“아니, 그건 내 진심이야.”
세피로스는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무감각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평범하게 살아서, 평범하게 이 세계를 바라보고, 평범하게 자신이 속한 세계를 소중히 여겨 주었으면 했거든.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니 말이야.”
“아, 그런 의미였군요.”
아리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덕분에 라슈온을 조금은 좋아하게 되었어요.”
율비네가 옆에서 듣기로는 빈정거림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다 무슨 뜻인데요?”
“비밀.”
“아리스!”
약이 오른 율비네가 아리스를 노려보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세피로스는 근방을 휘적거리기 시작했다.
“가지. 이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아야 해. 나 혼자서는 찾을 수 없어.”
그러더니 아리스와 율비네를 내버려 두고 혼자 성큼성큼 걸어갔다. 세피로스가 입구를 찾자 멀뚱멀뚱 서 있어 봤자 득 되는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리스는 율비네를 데리고 세피로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흩어져서 출입문처럼 보이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쑤셔 보기는 했는데 어디를 봐도 출입구라고 할 만한 구조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세피로스는 용의 머리 부분으로 돌아와 용주가 조각된 곳 위에 손을 올렸다.
― 허락되지 않은 접근입니다.
아리스는 알아듣지 못한 언어로 음성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세피로스는 작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주먹을 쥐더니 용의 목 부분을 손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비공정 전체가 울렸다.
“세피로스, 잠깐! 그만해요!”
아리스가 당황해서 세피로스를 제지하려 했는데 그보다 먼저 다른 존재가 끼어들었다. 정확하게는 복수였다. 그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셋을 둘러쌌다. 콧김을 뿜으며 입을 쩍 벌려 송곳니를 보이는 그들은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아성체의 용들이었다.
“배아의 방에 남아 있던 개체인가.”
세피로스가 그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아리스는 율비네와 서로 등을 맞대고 용들을 견제했다. 아리스는 성체용 하나 정도라면 가뿐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저쪽은 다수라 해도 아직 아성체. 이 셋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상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