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나나 미레아가 죽지만 않는다면 상관없다는 소리인가요?”
“내게는 시간이 필요했고 너희 둘은 실제로 그 역할을 잘해 주었지.”
“참나, 그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 한번 더럽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요. 여긴 대체 어디예요?”
“영소 제어 모듈이 있는 곳. 쉽게 말해서 조율자가 있는 곳이다.”
그 말에 아리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 역시…….”
“예전에는 비공정으로 사용하던 설비다. 접근할 수 있는 조건이 워낙 까다로웠기 때문에 지금까지 찾을 수 없었지.”
“그게 뭔지는 둘째 치고,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지요?”
“이 세계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고 있다면 최초의 용 페이릭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지?”
세피로스의 질문에 아리스가 그 이야기가 왜 여기에서 나오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레아에게 전해 들었어요.”
“데르카이드가 무엇인지 그 실체까지도?”
“……네. 페이릭의 잔류 영소에 결합한 마수의 영소가 인간의 태를 빌어 태어난 존재라고…….”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너는 데르카이드인 데다 네 영소에는 페이릭의 영소가 함께 있으니까 이 장소를 불러낼 수 있었던 것이야. 데르카이드는 영소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 장소는 페이릭의 접근이 허가되어 있으니 네 눈앞에 나타난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페이릭의 영소를 버린 니콜라우스…… 라우노는 이곳으로 오는 길을 알 수 없어. 오직 페이릭의 영소를 품고 있는 데르카이드만 알 수 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페이릭은 이곳에서 태어났으니까. 그에게 접근 권한이 있는 곳 중 하나지.”
세피로스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덧붙였다.
“이 내용은 일전에 리비엘로 람이 알려 주었어.”
“그래서 내가 길을 열었다고요?”
“그렇다. 실제로 네게 나타났지 않은가. 이 바다에는 옛 인류들이 사용했던 비공정들이 많이 매몰되어 있거든. 물론 이 바다라 해도 설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찾기 쉽지 않았지.”
그렇게 말하는 세피로스는 조금 지쳐 보였다.
“이 비공정이 나타나는 조건 자체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실행할 수는 없었어. 다른 사람이 아닌 너이기 때문에 이곳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설이 있는 곳이 평범한 자들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이었다면 이미 발견되고도 남았겠지. 게다가 이 결계를 깰 만한 힘을 가진 자는 너와 네 마검이 유일하다고 보면 돼. 그래서 라우노가 마검을 노렸던 것이고.”
“하지만 제가 알기로 설은 세피로스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들었는데 당신은 왜 이곳에 접근하지 못했나요?”
“나는 이곳에 접근 권한이 없을뿐더러 설이 내게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세피로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난 끝까지 그녀를 말리고 싶었거든. 그것을 알고는 자신의 계획을 내게 숨겼어. 하지만…… 겨우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어.”
아리스는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렇지 않아도 세피로스의 얼굴은 인간미라는 것이 옅은 편이었는데 지금은 정말로 인간이나 오빈 이외의 존재라는 것이 피부에 와닿는 기분이었다.
“난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아요. 내가 이 세계의 종말을 가지고 올 것이란 신탁은…… 어째서 그 많고 많은 데르카이드 중에 하필이면 저에게 내려진 것일까요? 세피로스 당신이라면 알고 있지 않아요?”
“기대를 배반해서 미안하지만 그건 나도 정확하게는 몰라. 다만 네가 가진 페이릭의 영소는 다른 것보다 더 특별해.”
그 말에 아리스는 이전에 케이드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상기했다. 자신의 영소가 페이릭의 사랑으로 구성되어 있다나 뭐라나. 아무래도 세피로스가 말하는 것은 그것을 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페이릭의 영소를 가진 네가 이 세상에 이변을 가져올 것을 서리 여신이 알고 있었을 거다. 영소의 흐름을 주관하는 자는 리비엘로의 예지 능력과 비슷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 마련이지. 영소가 흐르고자 하는 방향을 알 수 있으니 말이야.”
“이변이고 나발이고 내가 이런 사건들에 휘말려 이렇게 된 것은 빌어먹을 신탁 때문 아닙니까. 저는 그런 것은 바라지 않았다고요.”
“뭐, 자네는 여러모로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자에 부합하는 일을 벌일 가능성이 가장 큰 개인이지. 일단 클라인을 그런 식으로 만든 것만 해도 알 수 있지 않아? 네가 라우노와 협력하여 세계의 종말을 가져왔을 역사 역시 네 미래의 가능성 중 하나였다. 만약에 시간 선이 여러 갈래이고 다원 우주가 정말로 있다면 그런 미래가 하나쯤은 있겠지.”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율비네는 미간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당신이 하는 말은 너무 어려워요.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너희들은 당장 이해할 필요는 없다.”
세피로스의 무심한 말에 아리스와 율비네는 어쩐지 울컥했다.
“설명을 하려면 제대로 하란 말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세계 멸망이라도 시킬 작전인 건 아닌 것 같고. 아리스에게 내려진 신탁의 끝을 보면 아리스는 신탁에 매이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율비네의 질문에 세피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신탁의 끝에 내가 원하는 것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하지만 아리스는 더욱더 아리송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그래서 내게 내려진 신탁과 이 일이 무슨 관계인데요? 저를 왜 여기까지 불렀지요? 서리 여신의 해방? 하지만 저는 그 방법을 모르는데 어떤 식으로…….”
세피로스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검은 날개를 가진 자가 이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다.”
아리스는 이제 세피로스가 곱씹고 있는 그 구절이 신물 났다.
“네게 남은 삶 동안 신탁은 네 뒤를 따라다닐 거다.”
“그딴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알 수 없잖아요. 나는 이 세계의 종말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고요. 람의 말에 따르면 여신의 신탁이나 예언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바뀔 수도 있다던데요. 신탁이 현실화될지 아닐지는 제가 하기 나름 아닐까요.”
“네가 생각하는 이 세계의 종말이란 어떤 것이지?”
그 말에 아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피로스가 한 질문에 관한 내용은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종말의 이미지는 참으로 단순하여 인간들과 오빈들이 모두 죽고 마수들로 들어차 결국에는 그마저도 남지 않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사라진 세계였다. 보통 종말이란 것은 그렇지 않던가.
아리스는 그 생각을 최대한 풀어서 세피로스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그의 말을 듣고는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뭐, 대부분은 그런 것이라 여기겠지.”
아리스는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반응에 세피로스가 설명했다.
“네가 말한 것은 ‘멸망’이지 ‘종말’이 아니야. 혼재되어 쓰이기는 하나둘은 엄연히 달라. 서리 여신은 네가 ‘종말’을 몰고 올 것이라 이야기했지, 그것이 멸망이라고는 하지 않았어.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그런 식의 종말은 종말이라 이야기할 수 없다. 거대한 우주의 흐름으로 보면 국지적인 재생과 소멸의 과정일 뿐이니까. 그리고 그런 식의 과정을 거치면 다시 새로운 탄생이 일어나지.”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요.”
“그러니까 세계의 범위를 먼저 정해야 한다는 거다. 신탁에서 말하는 이 세계란 것이 단순히 라슈온의 이야기일 수 있고 이 우주를 아우르는 이야기일 수 있지. 심지어는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우주와도 같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각자의 세계를 갖고 있다는 소리다. 신탁에서 나오는 이 세계라는 것은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작은 단위의 이야기야.”
“그럼 신탁에서 뜻하는 세계란 것은 무엇인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임의로 정의 내린 것이 있으나 서리 여신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군. 하지만 서리 여신은 라슈온의 영소를 다루는 역할이니 라슈온에 국한하여 생각할 수 있겠지. 거기에 세계의 종말이 끝은 아닐 거다. 아까 말했듯, 이 우주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종말 뒤에는 재생이 필수적으로 뒤따랐어.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지.”
“그럼…… 이 세계가 무엇을 뜻하든 종말 이후에는 그 뒤도 있을 것이란 소리군요.”
“그렇다.”
세피로스의 말을 곱씹어 본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의 비밀을 전해 들었어요. 뭐, 놀라긴 했는데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진 않네요. 다만 서리 여신이 조율자라는 만들어진 신이란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
“그런가.”
세피로스는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아리스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세계의 모습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이 세계의 종말을 일으킨 자신은 그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클라인 사태에 대한 책임은 지금이나마 그럭저럭 수습을 할 수 있었지만, 멸망이 되었든, 종말이 되었든 세계를 그런 꼴로 만들고 난 책임?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질지는 둘째 치고 알게 뭐란 말이냐. 지금까지 자신을 배척해 왔으면서 무슨 책임을 지란 소리인지. 양심이 있다면 자신에게 그런 식의 책임을 요구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리스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고작 7개월이었다. 고작 7개월. 계절이 겨우 두 번 바뀌는 기간이었다. 그 정원의 사진이 두 번 정도 온…….
그런 짧은 기간 동안 아리스는 이 세계를 어떻게 해서든 평화롭게 만들고 싶어졌다. 왜냐하면,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세계니까. 케이드가 말했듯, 젊은 세대인 그와 미레아가 살아가야 하는 땅이니까.
라슈온을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싶을 정도로 아리스는 이 세계가 마음에 들어 버렸다. 허탈할 법도 한데 오히려 간질간질한 충만감이 가슴속으로 꽉 차올랐다.
“한 가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아리스의 말에 세피로스가 말하라는 듯 그를 응시했다.
“조율자가 윤설이란 존재로 만들어진 신이라면…… 꼭 그녀가 아닌 다른 존재 역시 조율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인가요?”
“나는 네가 이해가 빨라서 좋아.”
그 말에 아리스는 쓴웃음도 초탈한 웃음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일은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