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율비네는 비공정 안에서 기겁했다. 몇 달 전, 아리스가 클라인을 정화할 때 이상으로 마력을 끌어다 쓰는 건 몇 년 만의 일이었다. 클라인을 정화할 때조차 이 이상의 마력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고작 저 인공물의 결계를 부수는 데 죽자 살자 덤비고 있는 모습을 보니 율비네는 아리스에게 마력 고갈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사투 아닌 사투를 벌이고 있자니 마침내 결계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아리스가 마지막으로 기합 소리와 함께 페니드란을 휘두르자 마침내 결계의 일부가 완전히 뚫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지긋지긋하게도 결계는 다시 저절로 복구되고 있었다. 아리스는 얼른 오라고 비공정을 향해 손짓했다. 율비네가 비공정을 몰고 부랴부랴 결계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따라 아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자 순식간에 결계가 복구되어 외부 환경과 단절되었다.
용의 입 부분에 속하는 구역에 비공정을 착륙시킬 만한 공간이 있어서 그들은 그곳에 내려앉았다. 가까운 곳에서 보니 그것은 금속 재질로 된 구조물이었으며 지반은 제법 탄탄해 보였다. 별다른 이상을 감지 못한 그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계를 놓지 않고 비공정에서 내렸다.
수평선에서 해가 완전히 떠올랐다. 그때 주변에 태양광이 아닌 다른 빛이 번쩍였다. 율비네와 아리스가 반사적으로 팔로 눈을 가렸다. 주변이 잠잠하고 눈을 뜰 수 있게 되자 그들은 팔을 내려 주변을 살피고는 기운 빠진 소리를 내었다.
“허어…….”
주변은 어느새 다시 밤이라도 된 것처럼 하늘에 별들이 떠 있는 공간 한복판이었다. 오색 빛깔로 물든 하늘에는 별과 은하수가 가로지르고 있었고 땅에는 눈 부신 빛의 강이 흐르는 곳 중앙엔 그들이 비공정을 내린 용으로 된 모양의 금속물이 둥둥 떠 있었다.
“여긴…….”
율비네가 당황하여 아리스의 옷깃을 꽉 붙들어 잡았다.
“보통 결계가 아니라 공간을 분리하는 결계라 그런지 완전히 다른 세계나 마찬가지네.”
아리스의 말에 율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맞게 찾아온 것 같군요.”
아리스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이것이 단순한 금속 구조물은 아닐 것이었다. 아리스는 본능적으로 발아래로 흐르고 있는 거대한 빛의 유속이 영소들로 이루어진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영소들이 거쳐 가는 거대한 생명의 강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런 흐름에 민감한 데르카이드인 덕분이었다.
― 아리스, 저거 봐! 정말 예쁘다.
페니드란이 어딘지 모르게 흥분한 어투로 말했다.
“영소의 강…….”
아리스가 중얼거리자 율비네가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홀린 듯이 그것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그 흐름에 혼이 끌려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계를 해체하느라고 거의 바닥이 난 마력이 영소로 이루어진 강의 영향으로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리스는 그것에 감탄할 정신이 없었다.
“아리스!”
율비네가 부르지 않았다면 아리스는 정말 뛰어들 뻔했다. 그는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지만, 여전히 심장이 요동쳤다. 세계의 의지가 그를 강력하게 끌어당기며 부르고 있었다. 아리스는 간신히 그곳에서 시선을 돌렸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영소의 강이라면…… 그렇다면 이 흐름을 관장하는 것은…….”
“그 존재는 사람들에게는 서리 여신으로 알려진 이 세계의 조율자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둘은 펄쩍 뛰어올라 반사적으로 무기를 겨누었다. 어둠 속에 있던 자가 걸어 나오자 빛무리가 그의 형상을 따라 생겨났다.
“오랜만이군.”
그렇게 말한 세피로스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짙은 피로감만이 그의 얼굴 위를 덮고 있었다.
― 까, 깜짝 놀랐네!
페니드란도 세피로스의 기척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었는지 놀란 어투였다.
“세피로스!”
아리스의 부름에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우리는 이 안으로 들어가야 해. 입구를 찾아보지.”
하지만 아리스는 세피로스에게 검을 빼 들어 겨누고는 사납게 말했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죠?!”
“은신하고 있다가 네가 이곳의 결계를 파괴했을 때 바로 들어왔다.”
아리스는 결계를 해체하는데 신경이 팔렸다 보니 세피로스가 근처에 있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는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리비엘로 람을 죽인 게 정말 당신인가요?”
“지금 급한 것은 그 이야기가 아니야.”
“대답해!”
아리스는 세피로스를 향해 보이던 최소한의 존중도 집어던졌다. 그의 얼굴을 보니 새파란 분노가 올라왔다. 율비네가 차마 말릴 수도 없는 기색이었다. 세피로스는 그 주제에 대해 정말로 무관심해 보였지만 아리스의 채근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퀭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맞다면?”
아리스는 못 믿겠단 듯이 재차 물었다.
“정말…… 정말 당신이었어? 그게 정말로 당신이냐고요!”
세피로스는 잠시 말이 없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아리스의 검이 세피로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세피로스는 마법으로 그것을 상쇄했다.
“아리스, 이런 곳에서 싸움은 피하는 게…….”
율비네가 끼어들려 그랬지만 아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제지했다. 둘은 연달아 몇 합을 주고받았고 먼저 물러난 쪽은 아리스였다. 아리스는 세피로스를 정말 죽여 버리고 싶은 기분보다는 그저 화풀이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세피로스 역시 그 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만 막아 낼 뿐 전력으로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사나운 얼굴로 세피로스를 향해 일갈했다.
“람을 대체 왜 죽인 거야!”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어. 리비엘로가 쥐고 있는 정보들을 타인이 알게 된다면 내 계획에 변수가 지나치게 많아져.”
“고작 그런 거로……!”
“네가 그렇게까지 리비엘로를 생각해 주고 있었는지는 처음 알았군.”
“어째서 배신한 거야! 나는 그렇다 쳐요! 하지만 미레아는 그 누구보다 당신을 믿고 있었는데!”
“배신한 것이 아니야. 애초에 목적은 이루었잖나? 클라인을 정화하고 페니드란을 되찾는 것. 그것이 우리의 거래 조건이었을 텐데. 라슈발렌에서 자네에게 협조한 결과 황제의 목을 칠 기회도 있었고, 라케드와 벨로아를 통해 금전적인 보상을 받기도 했지. 우리의 거래 조건은 이게 끝이었고 피차 손해 본 것은 없잖나.”
세피로스의 말에 아리스가 인상을 썼다. 그의 말대로 아리스와 세피로스 사이의 계약은 다 끝난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 기분은 어쩌란 말이던가. 아리스가 세피로스에게 보내는 분노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 잘못도 없던 리비엘로와 시오가 죽었고 미레아는 상처받았다. 그 과정에서 아리스는 이용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리스가 일전에 미레아에게 했던 말대로 세피로스에게 기대한 것이 없었다 해도 이용당한 이상 기분이 개 같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미레아가 상처받은 이상 아리스 혼자만의 일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그것을 생각하면 이대로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리의 계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은 미레아의 믿음을 저버렸잖아요.”
“미레아 제인스터…….”
세피로스가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자 어째서인지 그것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세피로스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오늘처럼 그가 이런 식으로 온기 없는 어투로 미레아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았다.
“그 녀석에게 상처를 주었다 해도 어쩔 수 없었어.”
아리스는 어이가 없었다.
“뭐? 당신의 속셈을 도무지 모르겠어요. 나를 이곳까지 불러낸 이유가 뭐지요? 이런 짓들을 벌여서 얻을 게 뭔가요?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이냔 말이야!”
아리스의 말에 세피로스는 어깨에 힘을 빼고 말했다.
“나 역시 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움직이는 거야. 그게 나쁘다고 할 수 있겠나?”
아리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네가 지금 화내는 이유도 소중한 사람들을 위했기 때문이잖나.”
“하지만 적어도 난 당신 같은 짓은 하지 않아요. 당신 때문에 몇 사람이 상처를 입었는데…….”
“뭐, 자네에게는 도의상 이것저것 알려 줄 의향은 있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이쯤 하고.”
세피로스는 아리스가 검을 겨누고 있어도 신경 쓰지 않고 그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아리스는 여전히 검을 손에서 놓지 않고 물었다.
“난 당신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들어야겠어요.”
“…….”
“도의상 알려 주겠다면서요?”
아리스의 윽박 어린 말에 세피로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서리 여신의 해방.”
그 말에 아리스와 율비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피로스는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기 위해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
“그게 무슨 뜻인지는 둘째 치고, 제가 당신을 도우리라 생각하나요?”
“자네를 바로 설득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어차피 내 의도대로 될 테니 지금은 그냥 따라와라.”
“내가 당신의 의도대로 놀아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지요.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은 일단 뒤로하고…… 왜 하필 라우노가 우리를 습격했을 때 모습을 감추었어요?”
“당시에 라우노와 얽히고 싶지 않았어. 내 예측보다 너무 빨리 나타났거든. 너희에게는 다음에 라우노를 보면 죽이겠다고 말했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서 그와 정면으로 맞붙을 만한 상태도 아니었고.”
― 으…… 분하지만 나도 그때는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으니까.
세피로스의 말에 페니드란이 뚱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일이 잘 풀려서 망정이지 제가 무슨 일이라도 당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넌 당분간 그의 손에는 안 죽어. 신탁이 있었으니까.”
“아니, 그래도…….”
“내가 라우노는 너보다 더한 놈이라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그의 경험과 성질이 그렇다는 소리였지 네가 그와 대적할 만한 인재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다만 준비 없이 덤비면 가망성이 없었을 뿐이지. 당시에는 네가 붙잡혀도 최소한 시간 벌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아리스는 헛웃음을 들이켰다. 세피로스는 무덤덤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미레아 그 녀석도 너와 마찬가지로 인질이 될지언정 라우노의 손에 죽을 일은 없었을 거야. 물론 언젠가는 죽일 계획이었겠지만 당시에 너희 둘은 라우노에게 이용 가치가 있었으니까. 그정도의 확신은 있었지. 라우노가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너희를 정말로 죽이고자 했다면 이미 시도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