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세피로스는 당시를 회상했다. 그때 서로 오갔던 대화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억나진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의 설의 모습은 정말로 지치고 힘들어 보여서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윤설의 말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었다. 지금 설이 그러한 말을 한 것은 전부 페이릭과 세피로스 때문이었다. 둘이 다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으니까. 자신 때문에 목숨을 바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까.
세피로스와 페이릭은 설이 자신들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에 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전선에서 싸웠다. 어디까지나 윤설을 위해서.
그게 잘못이었을까. 만약 그때 더 나은 선택지를 알고 있었더라면 이런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페이릭이 죽고 윤설까지 조율자가 되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텐데.
하지만 세피로스는 아직도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때 어딘가 망가지고 만 것은 자신이 아니라 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말이다.
* * *
“아리스…… 정말 여기가 맞을까요?”
율비네는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 비공정을 띄운 상태로 기판 위에 엎어졌다. 일곱 별의 바다에 들어온 지 벌써 6시간이 지나 있었다.
루아드의 수도인 델루카에서 여기까지 오는 사이 해가 지고 새벽 별이 떠오르는 것까지 전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리스와 율비네가 비공정으로 일곱 별의 바다를 헤매도 별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세피로스가 아무런 장치 없이 무작정 일곱 별의 바다로 오라는 말을 했겠냐며 자신만만하던 아리스는 보고 있던 지도로 얼굴을 덮은 상태로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몰라.”
“세피로스 님께서 속인 건 아니고요?”
“몰라…….”
“이대로라면 적어도 2시간 안에 회항해야 합니다. 연료가 없어요.”
“하…….”
아리스가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지도를 치웠다.
“다른 게 있을 거야.”
아리스는 아까부터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무언가 다른 게 있겠지! 모르는 무언가가 있겠지! 아무튼, 뭐가 있기는 있을 거다!
하지만 그 생각도 슬슬 철회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금 모르면 앞으로도 모르는 것일 것 같았다.
역시 세피로스한테 속았나…… 애초에 그 편지가 세피로스가 보낸 것이 맞기나 한 걸까.
아리스는 뻑뻑해진 눈가를 쓸며 이동식 포트로 커피를 우려내었다.
원두가 뜨거운 물에 잠긴 사이 짜증을 내며 헝클었던 머리를 정갈하게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한 잔은 자신의 몫으로 따라 놓고 남은 것은 율비네의 컵에 따라 주었다.
율비네는 커피를 홀짝이며 창밖 풍경을 보고는 영혼 없는 웃음을 지었다.
“와…… 해 뜬다…….”
그 말대로 수평선 너머부터 시작해 하늘이 밝아 오고 있었다. 짙은 쪽빛이었던 새벽하늘은 점점 붉고 푸르게 물들어 가다 이내 밝은 금빛으로 반짝였다.
하지만 피곤함에 찌들고 속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둘에게는 그 아름다운 광경에 별 감흥이 없었다.
아리스는 아무 생각 없이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보며 커피를 호로록 들이켜고 있었는데 갑자기 허리춤에 차고 있던 페니드란이 다급하게 말했다.
― 나, 나 기분이 이상해!
“페니드란?”
― 끌어당기고 있어!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고!
“페니드란, 잠깐. 갑자기 무슨 소리야?”
페니드란은 흥분한 듯 아리스가 알 수 없는 말을 두서없이 내뱉었다. 그러더니 마력이 갑자기 증폭되더니 소용돌이쳤다.
기판 위로 거센 힘이 휩쓸고 지나가는 통에 율비네는 비공정이 추락하지 않도록 조종간을 꽉 부여잡았다.
“아리스! 페니드란의 마력 좀 어떻게 해 보세요!”
“페니드란! 너!”
아리스가 페니드란의 힘을 제어하려 하자 마검은 허겁지겁 변명을 내뱉었다.
― 아니, 이 힘은 내가 원한 게 아니야! 내게 깃들어 있는 네 마력이 거대한 흐름에 끌려가려 그랬어! 그걸 붙잡으려 그랬던 것뿐이지, 내가 먼저 그런 게 아니야!
페니드란의 목소리는 퍽 억울해 보였다.
― 아리스, 이대로라면 내 유사 영소까지 한 번에 휩쓸릴 것 같아! 끌려가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끌어당기자고!
“그러니까 대체 무슨 소리냐니까?”
그렇게 말한 순간 아리스 역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흡사 거대한 급류에 휩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리스가 정신을 놓기 직전에 페니드란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나를 뽑으면 내가 알아서 해 볼게!
아리스는 그 말대로 페니드란을 잡아 검집에서 뽑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안에 담고 있던 마력이 둑이 터지기라도 한 듯 페니드란에게로 줄줄 새기 시작했다.
“야, 너 내 마력……! 마력 고갈이라도 일어나면 네가 책임져!”
― 조금만 있어 봐. 줄다리기 싸움에서는 내가 이길 거야!
페니드란은 자신과 아리스의 마력을 비공정에 둘렀다. 그때 비공정의 바로 아래에 있는 수면에서 거대한 물보라가 피어났다.
“이게 뭐야?”
율비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물보라 안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요동치던 마력이 뚝 멎었다. 잡기들이 바닥에 일제히 떨어지며 소음을 내었다. 아리스는 페니드란을 양손으로 잡고 다시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도록 마력을 거두어 갔다.
그때, 율비네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페니드란, 너 대체 무얼 불러낸 거야?!”
율비네의 말에 마력을 제어하느라고 정신없던 아리스가 페니드란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러니까 무얼 불러냈다고…….”
아리스가 황당한 기분으로 중얼거리며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어두워서 미처 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갑자기 생겨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지긋지긋한 바닷물 이외의 것이 바다 위에 솟아 있다는 것이었다.
바닷속에서부터 거대한 무언가가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그것은 볼록 솟은 화산섬 같기도 했고 보기에 따라서는 마치 탑 같기도 했다. 그것은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뭐야?”
아리스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말에 율비네가 입을 헤 벌리고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그러다 정체불명의 무언가와 부딪히기 일보 직전인 것을 깨닫고는 얼른 비공정의 위치를 이동시켰다. 조금 떨어져서 보니 그것의 전반적인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입을 쩍 벌리고 하늘 높이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한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 와…… 이런 거일 줄은 나도 몰랐어…… 저 건물 완전 영소로 똘똘 뭉쳐 있어. 주변 영소까지 다 빨아들이는 통에 나도 끌려갈 뻔했네.
당황한 것은 둘만이 아니었던 듯 페니드란이 중얼거렸다.
“어, 어떡할까요, 아리스?”
율비네가 말을 더듬거리면서 손가락으로 거대한 인공물을 가리켰다. 아리스는 당혹감에 입가를 손으로 틀어막고 중얼거렸다.
“설마 세피로스가 저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 아리스, 이 건물 같은 것에는 강력한 결계가 있어. 접근하려면 결계부터 해제해야 해.
페니드란의 말에 아리스는 긍정했다.
“그래…… 그래 보인다.”
그사이 어느 정도 제정신으로 돌아온 율비네가 제안했다.
“일단은 한번 들어가 보지요. 세피로스가 우리를 불러낸 곳에서 나타난 것이니 무언가가 있지 않겠습니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저 거대한 인공물이 나타난 것은 그저 우연이라 치기에는 걸리는 점이 너무 많았다. 어쨌든 밑져야 본전이라고, 여기서 이렇게 죽치고 있어 봤자 뭔가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 율비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아리스는 비공정의 해치를 열었다. 짭짤한 바다 냄새가 훅 끼친 것과 동시에 바람과 함께 고밀도의 영소가 아리스를 감싸듯 흘러 들어왔다.
― 으아아, 취한다…… 으어…….
페니드란이 해롱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페니드란, 정신 차려.”
아리스의 말에도 페니드란은 실제로 발성 구조가 있는 것도 아닌데 혀까지 꼬부라진 소리를 내며 신음했다.
― 영소그아아 너어무 고미을도야아…….
아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속 역시 메슥거리는 것 같았다. 마력으로 똘똘 뭉친 페니드란이나 데르카이드인 아리스는 고밀도의 영소에 노출되면 영소의 흐름이 너무 거세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힘들었다. 덕분에 페니드란이 이렇게 정신 줄을 놓기 일보 직전인 것이었다.
그건 아리스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그는 제 손으로 볼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평범한 인간인 율비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걱정스럽게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리스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엄지를 들어 올려 보이고는 비공정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는 낙하하는 속도와 힘을 이용해 인공물을 감싸고 있는 결계를 향해 페니드란을 꽂아 넣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결계는 단단했고 평범한 공격으로는 흠 하나 낼 수 없었다.
“아, 이런.”
아리스는 날개를 펼쳐서 인공물의 주변을 맴돌았다. 하지만 결계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아도 빈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난처하게 턱을 쓰다듬고 있는데 페니드란이 여전히 혀가 꼬인 목소리로 말했다.
― 내애가아 벨 수 이쒀어…….
“너 괜찮겠냐.”
― 내가! 누구인뒈에! 마검 페니드란 님 이시다 이 뫌이돠앗!
아리스는 주정뱅이가 자기 귀에서 시끄럽게 땍땍거리는 것을 듣고만 있자니 머리가 아팠다.
“그래, 그래. 그럼 한번 해 볼 테니까 정신이나 똑바로 차려 봐.”
― 나눈! 제뎡신이거등!
아리스는 크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마력을 페니드란에게 모았다. 거대한 기운이 마검에 응축되었다. 어느 정도 힘이 모이자 아리스는 페니드란을 결계에 꽂아 넣었다. 우레 같은 소리와 함께 엄청난 기세로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결계는 굳건했다.
“이 정도로는 안 되나.”
아리스는 혀를 쯧 차고 마력을 끌어다 쓸 수 있는 만큼 최대한으로 끌어왔다. 스파크는 한층 더 거세어져 눈을 뜨기 힘든 상황까지 되었다. 오랜만에 마력을 쏟아 내니 진땀이 다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