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그거라면 내가 충분히 협조하고 있으니…….”
“아니요. 당신은 최초의 용이지만 No. 52와 같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당장 실전에 나갈 수 있는 개체, 그리고 당신보다 더욱 강한 힘을 지닌 개체를 만들어 내는 기술이니까요. No. 52는 다른 개체들보다 그 조건에 상당히 부합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No. 52의 샘플입니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겉보기와는 달리 아직 10살도 되지 않았어요! 정신적으로도 미숙한 상태인데 이런 실험들 때문에 무리시킬 수 없단 말이에요.”
“윤설 교수.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새삼스럽군. 그러한 실험들로 No. 52를 만든 것이 자네면서…….”
그 말에 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
페이릭의 등 뒤에서 세피로스가 걸어 나오며 설의 손을 붙잡았다.
“나, 난 괜찮아. 다녀올게. 위험한 실험은 아니잖아. 그냥 샘플 채취야…….”
그렇게 말하는 세피로스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지난 실험에서 받은 트라우마가 절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건 정말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말이 샘플 채취이지 약에 절어 몸 일부가 썰리는 기분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용으로 태어난 이상 어린 시절부터 이런 일은 익숙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은 세피로스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기 전에 세피로스는 문 사이로 두 사람에게 희미하게 웃어 주었고 방 안에는 설과 페이릭만 남겨졌다. 설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럴 때마다 당신과 세피로스에게 어떻게 사죄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
“……마수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잖아.”
“그럼 저 애의 인권은?! 세피로스도 어엿한 사람이라고!”
“설.”
페이릭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허리를 숙였다.
“힘들면 그만두어도 괜찮아.”
“난 그러지도 못 해.”
설은 쓰게 웃으며 몸을 돌려 페이릭에게 등을 보이고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가녀린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면 정말로 당신과 세피로스를 내버려 두고 도망친 게 되잖아.”
“그렇지 않아.”
“마수와 싸우려면 어쩔 수 없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이건…… 내가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정말 아니었는데…… 과거의 나는 어쩜 그렇게 생각이 짧을 수 있었지?”
설은 이제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저 이 싸움에서 승리하고 싶었을 뿐인데!”
페이릭은 뒤에서 설을 끌어안았다.
“상관없어. 나는 당신과 인간들을 지킬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거야.”
그 말을 들은 설은 자신이 페이릭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더욱 알 수 없어졌다. 자신은 이런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페이릭과 세피로스에게 목숨을 담보로 한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지금도 마수와 싸우며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자신은 인류를 지키기 위해 용을 만들어 내야 했다. 그것이 설이 처음으로 주어 받은 사명이었다.
그렇지만 용들을 희생하는 것은 정말로 옳은 것인가? 인간을 살리고자 다른 생명체를 희생하는 연구자의 윤리 의식은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
사실 이 세계의 순리를 기준으로 삼자면 마수가 하는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마수는 그저 생존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영소를 먹고 개체 수를 불리는 것이 마수의 습성이다. 그것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고 태어나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먹이가 살아 있는 생명체에 깃든 영소인 것은 마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축을 길러 혹은 짐승을 사냥하여 잡아먹는 인간이 감히 마수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인가.
마수와의 긴 전쟁은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란처럼 이해관계와 정치 관계 혹은 이념의 차이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생존 본능으로, 먹느냐, 먹히느냐의 원초적인 이유의 싸움이었다. 사자와 토끼의 싸움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 전쟁에서 숭고함 따위를 찾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마수를 죽이지 않으면 인간은 살 수 없었고, 마수를 죽이기 위해서는 용들의 힘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밖에서 죽어 나가고 있는 용들을 특별 취급하자니 인간의 손에 사육되는 가축은 용들보다 무엇이 더 모자란다는 소리인가. 고작 지성의 차이이지 생명의 무게는 똑같은 것이 아니던가.
이 싸움은 설에게 있어서 끝없는 딜레마였다.
“용은 가축이 아니야.”
설이 주먹을 쥐며 중얼거렸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그렇게 다시 몇 년이 흘렀다. 용으로 마수를 상대하는 것에는 다시 한계에 부딪혔다. 그 사이 마수에게 수많은 용이 죽었고 그것을 대체할 용들의 성장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인류는 대안으로 다차원의 벽을 넘어 다른 세계로 가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계획은 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다차원의 벽을 넘어가면 마수와의 전쟁을 끝낼 수 있다. 페이릭과 세피로스가 더는 싸움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것마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정말로 많은 희생을 치른 뒤 인류는 다차원의 벽을 넘는 데 성공해 원주민들이 라슈온이라 부르는 행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다차원의 벽을 넘어간 몇 년간은 분명 평화로웠다. 이방인인 인류와 원주민인 오빈들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고 지금까지 투쟁의 역사밖에 모르던 이들에게 평화는 낯설기까지 했다.
그사이 만들어진 용들의 배아는 이제 쓸모가 없다 여겨져 동결된 상태로 잠들었다. 배아를 관리하는 소수의 용은 자신들의 기원을 새로운 세대에게는 비밀에 부치고 싶어 했다. 인간에게 가축처럼 이용당한 역사를 지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아가 인류와 동등한 위치에 서는 것이 그들의 작은 바람이었다. 세피로스는 작은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 설은 연구직에서 물러났고 페이릭 역시 전투의 최전방에 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짧은 꿈에 불과했다. 마수는 기어이 다차원의 벽을 넘어와 인류를 추적했다. 그리고 생명력이 충만한 라슈온을 발견한 것이다. 그만큼 마수에게 좋은 먹잇감이 어디 있을까.
다시 나타난 마수에 인류는 절망했다. 죽이고 또 죽여도 마수는 기어이 살아남아 인류를 잡아먹었다. 이번에는 인류뿐만이 아니었다. 오빈들도 있었다. 라슈온을 위협하는 마수에 대항하기 위해 은둔하고 있던 보비네가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세 쌍의 뿔은 꺾였고 삿된 것을 몰아내는 보비네의 두 번째 뿔이라 불리던 알툰마저 사라졌다.
이번에야말로 끝이었다.
설은 모든 것을 자포자기 하려 그랬다. 마수에게 영소를 빼앗겨 새로운 생명으로 흘러갈 수조차 없는 이 상황은 비극이었다.
“페이릭, 세피로스.”
페이릭과 세피로스는 막 전투를 마치고 돌아와 상처투성이였다. 설은 손수 그들에게 붕대를 감아 주고 약을 주었다. 그리고는 상황이 한차례 진정되자 용들의 배아가 잠들어 있는 지하 깊숙한 곳으로 불러들였다.
그녀는 냉동 시스템을 제어하는 콘솔 앞에서 둘에게 말했다.
“……그만하자, 이런 거.”
“이런 거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페이릭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설이 희미하게 웃었다.
“페이릭, 나는 너무 지쳤어. 이 모든 것을 그만하고 싶어졌어. 싸움도 싫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것도 싫어. 무엇보다 당신들이 다치는 모습을 볼 용기가 없어졌어.”
“이해해. 지칠 만도 하지. 나는 이백 년도 더 넘게 싸움을 계속해 왔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해 버리면…….”
“포기하지 않으면 이 상황이 더 나아져?!”
그 말에 페이릭은 무어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설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아 온 그 역시 라슈온에서의 짧은 평화를 제외한다면 200년 동안 전쟁밖에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설…….”
세피로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아서 비록 짧았지만 난 평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 그런 건 태어나서 처음 누려 본 사치였거든. 싸울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었고, 언제 죽을까 불안해하지도 않았지.”
세피로스의 말에 페이릭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한번 누려 본 이상 그 전으론 절대 못 돌아가. 나는 이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거야. 난 설이 웃는 것을 보고 싶어. 그러니까 내게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그런 슬픈 말은 하지 말아 줘. 나는 당신을 위해 싸우니까.”
“페이릭의 말이 맞아. 그건 나도 똑같은 마음이야.”
세피로스가 그의 말을 받아 동의했다. 하지만 설은 한껏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눈물을 흘렸다.
“나를 위한다는 말은 그만해! 제발! 내가 당신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잖아! 그런데 왜 그러는 거야!”
“우리가 어떡하길 바라는 거야?”
설은 콘솔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나는 죽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야. 정확하게는 마수에게 영소가 먹힌 후 죽음 이후의 것이 없어진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지. 우리의 존재가 이 세계에서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것이 제일 무서워! 그래서 페이릭과 세피로스가 이 싸움에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야.”
“그럼 어쩔 셈인지 말이나 들어 보자.”
페이릭의 말에 설은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곳까진 마수가 들어오기 힘들어.”
세피로스가 주변을 둘러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지만 설, 마수를 피해 봤자 여기서 평생 살 순 없는 노릇이야. 여기는 아무것도 없는걸.”
하지만 설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세피로스 네 말대로 여기서 마냥 살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이곳에서 동결 상태에 빠지면 최소한 마수가 없어질 때까지 버틸 수 있어.”
“그 말은…….”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여기서 잠들자.”
페이릭과 세피로스의 눈이 커졌다.
“우리 셋이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