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90화 (190/257)

190화.

“글로리아 씨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미레아가 쏘아보자 라우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그냥 동결되어 자는 거예요. 저는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해를 끼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미레아는 그 말을 쉬이 믿지 않았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라우노의 이어진 말은 미레아의 불길한 예감에 적중했다.

“같이 있던 분들은 좀 안타까웠지만요.”

“글로리아 씨의 식구들…… 힐데 씨와 다른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요?!”

“같은 데르카이드면서 제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더라고요. 여신의 조각이 행하는 영향력 때문인지…… 이래서 당신들의 존재는 번거롭다니까요. 분명 제가 만들려는 세상은 데르카이드들에게 더 편하고 안락한 세상일지언데 그놈의 인간들이 뭐라고 머릿속이 대책 없이 순진하게 변하는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들의 힘은 데르카이드를 감화시켜요. 서리 여신의 조각만 아니었으면 저 여자의 동료들도 제 편으로 포섭하기 쉬웠을 텐데.”

“그래서 어떻게 했냐니까!”

“그렇게까지 사납게 보지 마세요. 저는 동지를 함부로 해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차피 서리 여신의 조각만 있으면 상관없거든요.”

글로리아와 함께 생활하던 데르카이드들은 무사하다는 소리에 미레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라우노가 줄곧 중얼중얼 내뱉은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미레아는 글로리아를 들여다보다 그 양옆으로 그녀처럼 잠들어 있는 여자들을 차례대로 훑었다.

미레아의 눈에는 그들의 공통점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이 대는 다들 비슷비슷해 보였고 외모도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들이었다. 미레아는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라우노에게 묻는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 여자들은 뭐예요?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죠?”

“테나력 2989년 12월 3일.”

라우노의 입에서 나온 날짜에 미레아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날은 미레아가 태어난 날이었다. 라우노가 미레아의 생일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일전에 그와 마주쳤을 때 그의 입으로 직접 알려 준 사실이었다.

“이들은 모두 테나력 2989년 12월 3일에 태어난 자들입니다.”

라우노는 단지 그 사실만 알려 주었을 뿐이었지만 미레아는 단번에 라우노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일전에 글로리아가 아리스에게 자신의 생일을 말하면서 숫자가 재미있다고 한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에게서 서리 여신의 특이점을 뽑아낼 생각인 거지요? 나와 같은 날에 태어난 자들은 다들 서리 여신의 설계하에 만들어졌고 그녀의 특이점을 갖고 있으니까!”

이해가 빠른 영민한 머리에 라우노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네. 당신들의 특이점을 이용해 서리 여신을 불러낼 생각이랍니다.”

“뭐라고?”

“미레아 제인스터. 처음에는 단순히 당신을 죽여 버려 흑익의 마음에 동요를 만들 생각이었지만 마검을 손에 넣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에 제 계획도 조금 바뀌었어요. 당신은 제게서 흑익을 빼내면 안 됐어요. 원래라면 마검을 이용해 여신이 있는 곳까지 문을 열려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으니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잖아요? 사실 저도 마검을 만들어 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마검은 오직 루데키아스만이 만들 수 있지요. 페이릭의 영소에 차이가 있어서 그런 걸까요?”

라우노가 하는 짓이 좋게 풀리는 일이 아닐 것이란 것쯤은 미레아도 예상하였지만 이건 미레아의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자, 함께 종말을 맞이합시다.”

그 광기 어린 목소리에 미레아는 절로 욕설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미친놈.”

미레아는 세렌트의 손잡이 위에 손을 올렸다. 혼자서 이 여자들을 지키며 라우노를 상대할 수 있을까? 거기에 인형 군단까지 있었다. 심지어 이전과는 다르게 더 강해진 상태로……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미레아는 세렌트를 뽑아 들었다. 하얀 검신이 빛을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 미레아, 나 저 사람 싫어.

잠자코 있던 세렌트가 투덜거렸다.

“이런, 저와 싸우실 생각인가요?”

라우노도 허공에서 팔을 휘두르자 그의 사복 검이 튀어나와 손안에 감겨들었다.

“적어도 당신 멋대로 하게 두지는 않아요.”

“당신이 죽어도 특이점을 뽑아내는 방법은 다 있기 마련입니다. 다만, 특이점은 생명체들의 생명력을 기반으로 하는 힘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상태로 추출을 해야 더 효과적이라 살려 두는 것뿐이에요. 그리고 서리 여신의 조각 중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건 미레아 씨이니 될 수 있으면 살려 두고 싶은데요. 저의 최우선 순위는 당신이 지닌 특이점입니다. 다른 여자들은 보험에 지나지 않아요.”

“그럼 당분간은 저 여자들과 나를 죽이지는 않겠다는 소리군요. 그렇다면 해 볼 만하겠는데?”

조금 밝아진 미레아의 목소리에 라우노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미레아 씨는 제 상대가 될 수 없어요. 일전에 한 번 맞붙어 봤잖아요? 그때는 동료도 잔뜩 있었고, 흑익도 있었지만, 간신히 저를 자리에서 물리게 하는 게 전부였고요.”

“하하, 아픈 곳을 찌르시네.”

미레아가 영혼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래도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알지요.”

“저를 어쩔 건데요?”

그 얕잡아 보는 태도에 미레아가 예고도 없이 달려들며 외쳤다.

“당신과 결착 지을 방법은 몇 없어 보이네요. 그러니 목숨이라도 내놔!”

선수 필승. 미레아의 신조였다.

* * *

“자, 세피로스.”

세피로스의 머리를 가지런하게 만져 준 설이 거울을 들이밀었다. 세피로스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고는 이리저리 머리를 돌려 보았다.

거울 속 그의 모습은 10대 후반의 소년기에 해당하는 외형이었다. 그의 머리를 매만져 준 설이 동안인 덕분에 그 둘의 모습은 누나와 동생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실은 부모와 자식이라고 해도 될 만한 세월이 둘 사이에 있었다.

설이 땋아 준 긴 은발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따라 흔들거렸다. 그 느낌이 생경해서 세피로스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일부러 땋은 머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어때?”

“좋아!”

세피로스가 배시시 웃으며 자신의 땋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려 보았다. 세피로스는 설을 빤히 바라보다 자신의 땋은 머리끝을 보고는 무슨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나도 해 줄게.”

“내 머리도 땋아 주려고?”

“응!”

“할 수 있겠어?”

“노력해 볼게.”

“땋는 방법 모르잖아.”

“가르쳐 줘. 난 배우면 잘해.”

설은 길게 기른 자신의 흑갈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옆에서 양손에 턱을 받치고 그들을 구경하고 있던 페이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보다는 페이릭은 어때?”

“뭐, 나?”

페이릭의 붉은 머리는 짧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충분히 길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였다. 설은 요즘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같은 머리는 페이릭의 미모를 반감시키기 때문이었다.

“난 됐어.”

웃으며 사양하는 페이릭에게 설은 손을 고양이 발톱 모양으로 구부리더니 어흥 하는 소리와 함께 그를 덮쳤다. 하지만 페이릭은 보란 듯이 몸을 물려 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그러다 세피로스에게 붙잡혔는데 세피로스가 최근에 그에게 배운 결박기를 선보이자 그것마저 풀어서 도망갔다.

“자기가 가르쳐 준 기술에 당하는 바보가 어디 있겠냐?”

페이릭의 말에 설과 세피로스가 분한 듯 볼을 부풀렸다. 그게 정말로 모자 관계 같아 페이릭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세피로스는 장성한 몸과는 달리 태어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애였다. 그러다 보니 자라는 아이들이 어른들을 보고 그리하듯 최근 설의 행동과 표정을 따라 하려 그랬다. 페이릭이 깔깔거리면서 웃고 있는데 설이 빽 소리쳤다.

“하지만 페이릭, 당신 지금 엄청나게 못생겼단 말이야!”

그 말에 페이릭은 조금 충격받았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생명체이다 보니 얼굴도 못나지는 않게 태어났기 때문에 못생겼다는 소리는 생전 처음 들어 봤다.

“맞아! 못생겼어!”

세피로스의 호응에 페이릭의 얼굴이 뚱하게 토라진 표정으로 바뀌었다. 페이릭이 뭐라고 하려는 찰나 방문이 열리더니 사람 셋이 들어왔다. 그들 중 선두에 선 자가 설에게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어딜 갔나 했더니 또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었나, 윤설 교수?”

“노닥거리다니요. 제가 쉬는 시간에 무얼 하든 제 마음이지요.”

“그런가.”

그는 짧게 대답하고는 세피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No. 52, 샘플 채취 시간이다.”

“세피로스를 번호로 부르지 말아요. 그보다 이 시각에 샘플 채취라니요? 저는 들은 바가 없는데…….”

“이번부터 성장 촉진제에 관한 실험이 재개되는 건 자네도 알고 있잖나. No. 52는 개중에서 부작용 없이 살아남은 개체니까 급하게 그의 샘플이 필요하게 되었어.”

그의 말대로 세피로스와 함께 태어난 용 중 대부분은 성장 촉진제를 맞아 태어난 지 10년 사이에 10대 후반의 신체까지 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무사히 성장을 마친 개체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희귀했다. 다들 부작용으로 명을 달리한 것이었다.

그래서 세피로스의 자료는 더욱 특별했고 그와 페이릭을 본떠 다른 용들을 자라나게 해야 했으므로 세피로스에게 부담이 되는 연구 일정이 쌓이기 시작했다.

설은 퍽 난처한 눈치였다. 세피로스가 페이릭의 등 뒤로 몸을 숨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싫어…….”

페이릭의 옷자락을 꽉 쥔 손이 잘게 떨렸다. 떨리는 손을 느낀 페이릭은 그것을 힐끔 보고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꼭 지금 할 필요는 없잖아요. 세피로스는 이제 잘 시간…….”

“한시라도 더 빨리 연구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건 당신도 잘 알지 않습니까.”

페이릭의 말을 끊으며 강경하게 대하는 그의 눈빛엔 페이릭을 다소 낮잡아 보는 시선이 섞여 있었다. 당신은 인간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 시선. 페이릭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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