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쿤둘렌은 석상에 대고 오빈식 예를 취했다. 예르게네는 석상의 앞에서 손으로 보비네의 발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러자 땅이 작게 울리더니 지하로 통하는 통로가 열렸다.
“와……. 꼭 보물 던전 같아.”
라일라가 미레아에게 속닥거렸다. 예르게네는 또 그곳으로 내려갔다. 파울로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얼음 호수의 밑에 있는 신전의 지하면 일이 잘못 풀렸을 때 꼼짝없이 생매장당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파울로는 선뜻 결정하지 못한 얼굴로 쿤둘렌을 바라보자 그가 답을 내놓기도 전에 미레아가 예르게네를 따라 쪼르르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라일라도 밑져야 본전이라며 미레아를 따르자 다른 둘도 어쩔 수 없이 뒤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좁은 계단이 아래로 한없이 이어졌다. 역시 그 안쪽은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마침내 가장 깊은 하층부에 다다르자 예르게네는 땅을 사뿐히 밟았다.
그곳은 커다란 빈터나 홀 같은 곳이었다. 다만 평범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여러 술식이 바닥과 벽을 타고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쿤둘렌이 다시 안경을 끼고 술식들을 살펴보다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고대의 술식들이군요.”
예르게네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 온화하게 웃었다.
〔들리느냐?〕
다른 이들은 그녀가 디딘 곳에 발을 내디뎠을 때 예르게네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발아래 땅이 고요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고래의 배 속에 앉아 심장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일행들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땅을 바라보았다. 땅이 크게 울리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박동이 전해져 왔다. 일행들이 먼저 물어보기 전에 예르게네가 먼저 말했다.
〔이것은 위대한 보비네의 심장이 뛰는 소리이다.〕
그 말에 쿤둘렌이 거의 천장까지 닿을 기세로 펄쩍 뛰었다.
“감히 제가 이렇게 밟고 서도……!”
황송하기 짝이 없다는 그 태도에 예르게네가 고요한 어조로 그를 진정시켰다.
〔괜찮다. 진정하거라.〕
하지만 파울로 역시 이렇게 밟고 있어도 되는 건가 싶어 물었다.
“보비네는 지금 가사 상태가 아니던가요? 가사 상태인 채 이곳에 계신 건가요?”
〔그렇다. 지금은 숨을 죽이고 계시는 것이지.〕
예르게네의 설명에도 사람들은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다름 아닌 신화와 전설로만 듣던 보비네의 심장 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진정될 리가.
“저…… 그럼 제가 도와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요?”
미레아의 말에 예르게네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큰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예르게네는 미레아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기다렸다.
〔서리 여신의 조각이 품고 있는 네 힘을 조금만 나눠다오. 그렇다면 보비네께서 깨어날 날이 더 가까워질 것이니.〕
미레아가 머뭇거리자 예르게네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어차피 서리 여신의 특이점은 그 역할을 다했다. 그렇다면 서리 여신의 파편, 그대가 그것을 갖고 있을 이유는 없지.〕
“저……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서리 여신의 특이점은 제 일부가 되어 버린 바람에 그걸 억지로 분리하게 되면 제가 잘못될 수 있다고…….”
미레아의 말에 다른 이들이 예르게네에게 다시 경계의 눈빛을 보냈으나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에게 약조하지. 특이점을 분리한다 해도 그대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을 것이다. 우리 신들은 특이점을 다루는데 그 누구보다 익숙한 자들이다. 서로 다른 특이점을 분리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다.〕
“어…… 그렇다면 상관은 없지만…….”
미레아가 긴장감 없는 태도로 머리를 긁적였다.
“잠깐.”
파울로가 팔을 들어 미레아를 막았다.
“괜찮겠어?”
“괜찮지 않을 건 또 뭐가 있겠어.”
미레아는 자신을 막아선 파울로를 옆으로 슬쩍 밀며 건너편의 예르게네를 보고 대답했다.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걸.”
미레아가 예르게네의 손을 잡자 파울로가 다급하게 예르게네의 손목을 잡아챘다.
“미레아를 데려가겠다는 말씀이라면 우리 모두 함께 가겠습니다.”
파울로의 무례에도 예르게네는 불쾌한 기색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는 그대들에게도 소중한 이일 터이니 허한다.〕
그때, 예르게네가 미레아의 손을 잡고 있던 접촉부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작은 빛으로 시작된 그것은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빛을 내었다. 그러더니 보이지 않는 힘이 파울로를 날려 버렸다.
미레아는 반사적으로 예르게네의 손을 놓았는데 알 수 없는 상대방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아챘다. 미레아는 빛 때문에 상대방을 볼 수는 없었지만 방금 맞잡고 있던 예르게네의 부드럽고 보송보송한 손이 아니라 마디가 굵고 거친 손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선수 치지 마시죠, 예르게네.”
건너편에서 비웃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미레아는 이미 익숙해진 그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백익!〕
지금까지 온순했던 예르게네의 목소리가 사납게 변하였다. 예르게네는 털을 한껏 세우고 그르렁거렸다. 빛은 사그라들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너무나도 자명했다.
“오, 저와 맞붙으실 생각입니까? 그러지 마세요. 당신의 원래 힘은 막대했으나 보비네가 가사 상태인 지금 저와 싸운다는 것은 서로에게 출혈이 너무나도 큰 일입니다. 그러니 서로 좋게 좋게 가지요. 저는 미레아 씨만 있으면 상관없습니다.”
태평한 라우노의 목소리에 미레아는 노성을 내질렀다.
“웃기지 마, 이 자식아!”
허리춤의 검집에서 세렌트가 저절로 튀어나와 라우노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날아갔다.
“아이쿠.”
그러더니 금속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미레아의 지시 없이 혼자 움직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세렌트는 바로 검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미레아는 아직도 빛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다.
“라우노, 이 손 못 놔?!”
미레아의 외침에 라우노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어떻게 이 공간에 나타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전부터 라우노에게 뒤를 밟힌 것이 분명했다. 미레아의 일행도 심지어 신인 예르게네까지 눈치 못 챌 정도로 감쪽같이 말이다.
보비네가 잠든 곳이 라우노에게 그대로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한껏 긴장해야 했다.
〔감히 이 공간에 침입한 이상 네 녀석을 방관할 순 없다!〕
“너무 그러지 마시죠, 예르게네. 지금은 미레아 씨에게 볼일이 있어요. 당신과 보비네를 상대하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무슨 수작질이야!”
파울로가 검을 뽑아 들며 달려들려 했고 쿤둘렌은 마법을 시전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라우노의 행동이 더 빨랐다. 미레아의 귓가에서 스파크가 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몸이 훅 빨리는 기분과 함께 속에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미레아는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반대 측에서 좌표를 잡아 주는 사람 없이 혼자 거칠게 열은 워프 게이트를 통과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었다. 그 느낌이 사라지자 라우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원하시던 대로 손을 놓았습니다.”
그 말에 미레아가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지나치게 밝은 빛에 노출되어 있었다 보니 시력이 한 번에 돌아오지 않았다. 검은 점 같은 것들이 눈앞에서 깜박이다가 천천히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미레아가 조금 전까지 있던 보비네의 신전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그렇다고 일전에 부식 지역 안에서 보았던 라우노의 저택도 아니었다. 미레아는 당황해서 뒤로 넘어가 주저앉을 뻔했다.
그곳은 광활한 방이었는데 라케드가 관리하던 용들의 성지에 있던 배아의 방과 비슷한 구조였다. 미레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라우노와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등 뒤에 무언가가 닿아서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사람 몇이 멀거니 서 있었는데 그들 중 하나와 부딪힌 것이었다.
미레아는 그들에게서 기시감을 느꼈다. 그들은 새하얀 머리카락에 창백한 회백색 피부를 가졌고 눈빛이 탁했다. 그리고 등에는 라우노처럼 하얀 날개가 돋아 있었다. 그들의 왼쪽 눈 안쪽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미레아는 그들의 정체를 깨닫고 침을 꼴깍 삼켰다.
“어서 오세요.”
라우노는 특유의 미소로 미레아를 맞이했다. 그의 모습은 이전과 별다른 바 없어 보였다. 여전히 성스러울 정도로 하얀 얼굴이었지만 그 이면을 알고 나니 저렇게 가증스러울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싱글거리는 표정인 라우노의 얼굴에 미레아는 주먹을 꽂아 버리고 싶었다.
“인형 군단인지 뭔지를 기어이 이 단계까지 완성 시켰군요. 우리가 했던 예상보다 빠른걸요.”
“뭐, 그렇지요. 제법 쓸 만하답니다. 제 말만 듣고 마법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고요. 이전 것들은 통제에 애를 먹었는데 말이에요. 아, 당신에게 희소식을 하나 전해 드리자면 제게는 안타깝게도 완성된 인형 군단은 다섯밖에 되지 않습니다. 만들기 까다로워서 이 이상은 시간에 맞출 수 없었어요.”
미레아는 긴장했다. 라우노에 다섯의 인형까지 전부 제압하고 이 자리를 뜰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황 파악이 급선무였다.
“이곳은 어디지요?”
“옛 인류가 사용하던 버려진 비공정입니다. 제가 좀 손을 봐서 쓰고 있습니다.”
미레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비공정의 일부였던 배아의 방처럼 이곳 역시 그와 같은 기능을 하던 곳 같았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친구분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친구……?”
라우노는 빙그레 웃으면서 미레아의 정면에서 몸을 비켰다. 그 덕분에 그 뒤에 있던 것들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배아의 방이었다면 동결시킨 배아가 있어야 하는 관 모양의 구조물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용의 배아가 아닌 몇 명의 성인 여성이었다.
미레아는 흠칫 몸을 떨다 조금 용기를 내어 그 관들 앞으로 다가갔다.
“이게 뭔데요? 이들은 대체…….”
미레아가 의문을 담아 라우노에게 말하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그 앞으로 달려갔다.
“글로리아 씨!”
타칭, 마녀들의 성의 주인이었던 글로리아가 그 안에 잠들어 있었다. 긴 흑발 머리카락을 늘어트리고 두 눈을 감고 잠든 듯 누워 있는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