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88화 (188/257)

188화.

“내 뜻을 들어라!”

마석이 빛나더니 마력이 주변을 에워쌌다. 그렇지 않아도 기온이 낮은 주변의 온도가 점점 더 떨어지고 있었다.

“내 뜻을 들어라!”

쩌적, 하는 소리가 잦아들더니 쾅 하며 마력이 방출되고 깨진 얼음 사이사이가 다시 얼어붙어 이어졌다. 미레아와 라일라는 서로를 끌어안고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큰일 날 뻔했군요.”

그들이 얼음 호수를 벗어나자 쿤둘렌이 마법으로 따듯하게 불을 피워 내었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다는 자각이 들자 라일라가 코를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일행들이 그녀를 달래 주고 옷을 말리고 있는데 얼음이 다시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네 사람은 고개를 번쩍 들고 눈에 파묻힌 호수를 바라보았다. 쿤둘렌의 마법이 사라졌다 해도 주변 기온이 낮아 얼음이 녹거나 하는 일은 없어야 정상이었다. 작게 갈라진 얼음 사이에서 한 오빈족 여인이 걸어 나왔다.

〔누가 감히 신성한 성소에서 그분의 뜻에 반하는 의지를 발산하는가.〕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은 일전에 알툰이 그들에게 대화하던 방식과 같았다. 그들은 여인이 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인이 손을 들자 눈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쿤둘렌은 황급히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침착하십시오! 보아하니 저분은 신화 속에 나오는 예르게네라는 여신입니다! 제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쿤둘렌이 일행들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일행들은 예르게네 여신이라는 소리에 한층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자의 길잡이이자 바람의 신이신 예르게네이시여! 위대한 보비네의 어리석은 아들이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면서 허리를 깊숙하게 숙였다. 다른 일행들 역시 눈치껏 쿤둘렌을 따라 했다. 예르게네는 작은 갈색 뿔에 옅은 금빛 털로 뒤덮인 모습이었다. 비록 인간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거센 바람에 흰옷 자락이 나부끼고 털이 일렁이는 모습은 그 누가 봐도 성스러웠고 아름다웠다.

예르게네는 그들을 보고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신기하구나. 서리 여신의 조각을 보는 것은 3,000년 만에 처음이도다.〕

예르게네가 미레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레아가 눈치를 살피며 슬쩍 고개를 들자 예르게네는 바람을 거두었다. 평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악인들은 아닌 듯하구나. 너희의 용건은 무엇이냐.〕

예르게네의 말에 쿤둘렌이 나서서 이야기했다.

“저희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 근래에 이곳에 발을 들인 사람은 없다.〕

그 말에 일행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다. 하지만 미레아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올지도 몰라요.”

예르게네는 설명을 바라는 얼굴로 미레아를 응시했다. 그 기세에 미레아가 확신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그가 보비네에게 용무가 있다면요.”

〔보비네께서는 아무도 만나지 않으신다.〕

“저희가 직접 보비네를 만나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세피로스가 이곳으로 온다면 그를 만나고 싶을 뿐입니다.”

〔세피로스?〕

예르게네가 아는 기색을 보이자 파울로가 물었다.

“그를 아십니까?”

〔그는 3,000년 전, 별에서 내려온 자 아니던가. 보비네를 대신하여 전장에 선 이들 중 하나로 알고 있다.〕

“네, 세피로스를 아시는군요! 저희는 그를 찾고 있어요!”

〔그는 이곳에 오지 않았으니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구나.〕

여기서 마냥 기다리고만 있기에는 세피로스가 이곳에 나타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들은 난감함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럼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미레아가 다소 용감하게 감히 예르게네를 상대로 부탁을 하겠다며 나섰다. 나머지 셋이 경악한 눈으로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저희가 떠난 후 세피로스가 오게 된다면 알려 주세요. 바람의 신이시니 어디든 갈 수 있잖아요? 저희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으실 테고요.”

그 말을 들은 예르게네가 오묘한 시선으로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미레아는 다소 뻔뻔한 얼굴로 계속 아래로 떨어지려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무래도 아리스에게 옮은 모양이었다.

〔분명 내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말한 예르게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서리 여신의 조각. 그렇다면 나 역시 그대에게 부탁이 있다.〕

“부탁이요? 그것이 무엇인가요?”

부탁이라는 말에 미레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르게네는 신이었고 미레아는 비록 서리 여신의 특이점을 갖고 있다고는 하나 일개 인간이었다. 그런 예르게네의 부탁이라니, 평범한 부탁은 아닌 듯싶었다.

예르게네는 말없이 일행을 굽어보다 추위 때문에 입술이 파랗게 질려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꽝꽝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이 양 갈래로 갈라지면서 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었다.

얼음은 갈라지면서 호수 밑바닥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었다. 그 경이로운 광경에 일행들은 저절로 입이 쩍 벌어졌다. 예르게네는 그 길에 훌쩍 내려앉았다.

〔일단 들어오거라.〕

그녀의 말에 네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예르게네를 따라가도 될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어디로 데려가는 건지도 모르고 부탁이라고 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들이 주저하자 예르게네는 온화한 미소로 그들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나는 추위에 떠는 선량한 여행객들을 내치지 않는다.〕

그제야 넷은 예르게네를 따라갔다. 굳건한 성벽처럼 길 양옆을 보좌하는 얼음은 짙푸른 색이었다. 예르게네가 있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금방이라도 자신들을 덮칠 것 같은 그 위용에 네 사람은 조금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걸어 호수 중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 다다르자 반쯤은 무너진 검은 건물이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제 기능을 하며 남아 있었다. 쿤둘렌이 안경을 찾아 끼며 말했다.

“일전에 본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보비네의 신전입니다. 찾기 어렵다 싶더니만 이런 곳에 있었군요.”

전에 부식 지역에서 본 보비네의 성소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신전이 있었지만, 이곳은 대리석이 나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회색빛 건물의 모습이었다. 거기에 햇빛이 잘 닿지 않은 호수 밑에 있다 보니 한층 더 어두워 보였다.

예르게네가 신전의 입구에 서서 문 위에 손을 올리자 커다란 신전 문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예르게네는 입구 앞에서 일행들을 잠시 기다려 주다 신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며 예르게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걸었다. 분명 차가운 호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으니 한 치 앞도 못 볼 정도로 어두우리라 생각했던 신전 안쪽은 생각보다 밝았다.

심지어 공기는 훈훈하기까지 했다. 일행들은 답답한 장갑을 벗고 거의 코끝까지 덮고 있던 목 폴라와 두툼한 모자, 그리고 마스크를 내리며 가쁜 숨을 토해 냈다.

몸이 좀 편해지자 사방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벽과 기둥 사이 사이에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석등이 세워져 있었는데 전기도 아니고 마법도 아닌 힘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쿤둘렌이 그것에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슬금슬금 옆으로 빠지며 석등에 다가가자 파울로가 헛기침하여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저…….”

라일라가 어디로 가는 건지 물으려 하자 그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했는지 예르게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대들 인간에게는 우리에게 빚진 원죄가 있다. 알고 있는가?〕

세 명의 인간들은 원죄의 의미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 미레아가 대답했다.

“인간들을 따라 마수가 라슈온에 침입한 것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렇다.〕

그 말에 파울로와 라일라가 반박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얼굴을 보고는 쿤둘렌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위대하고 자비로우신 예르게네이시여. 그것을 원죄라 표현해도 되겠습니까? 인간이 아니라 해도 마수가 언제든 이 땅을 발견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이리 될 운명이었을 것입니다. 의도치 않은 일에 원죄란 단어는 맞지 않는다 감히 말씀드립니다.”

예르게네는 잠시 걸음을 늦추고 쿤둘렌을 돌아보았다.

〔그래. 인간들 역시 이리 되는 것을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 그러니 이 땅을 버리지 않고 남아서 끝까지 싸우지 않았던가. 하나 그것으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결국, 다른 이들의 희생에 기대어 이 세계를 유지하는 것이니.〕

“그건 보비네를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쿤둘렌의 말에 예르게네가 고개를 저었다.

〔보비네는 차라리 나으신 편이지. 하나 그대들을 위해 희생한 용과 여신은 그렇지 못하다.〕

“페이릭과 서리 여신 말이로군요.”

예르게네가 살짝 고개를 까닥거리자 그녀의 긴 털이 나풀거렸다.

〔그들의 희생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들의 선택이 더없이 숭고한 것이라 하겠다. 최초의 용은 그 영혼이 갈가리 찢겨 버렸고 서리 여신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으로 자신의 모든 욕망을 포기한 채 라슈온의 영소를 끊임없이 조율해야 하지.〕

예르게네는 눈을 깜박이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3,000년이란 시간 동안 이 세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까워.〕

예르게네와 일행들이 걷는 발소리가 신전에 울렸다. 호수 밑이라 그런지 공기가 울리는 소리도 무거웠다.

일행들은 예르게네가 어디로 인도하는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녀의 분위기가 섣부르게 말을 걸기 어려운 까닭에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쿤둘렌이 그녀를 믿으니 다른 인간들도 쿤둘렌을 믿고 예르게네의 안내를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예르게네는 어느 정도 걷다가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일종의 거래를 하자꾸나. 나는 서리 여신의 조각인 자가 힘을 빌려주었으면 한다. 내게 힘을 빌려준다면 세피로스가 이곳에 오면 그를 묶어 두고 너희를 부르도록 하겠다.〕

“하지만 저는 별다른 힘이 없는걸요. 평범한 인간이에요.”

미레아의 말에 예르게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다. 부디 힘을 빌려다오.〕

예르게네는 미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신의 조각이 지닌 힘만 있으면…….〕

그 말에 쿤둘렌과 파울로가 미레아를 자신들의 뒤로 숨기며 경계했다. 그러자 예르게네는 바로 손을 거두며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그대들에게 경계심만 심어 주었군. 강제할 생각은 없으니 그럴 필요는 없다. 그대들이 내게 부탁을 했듯 나 역시 부탁을 하는 것뿐이다. 괜찮다면 따라오거라. 상황을 설명하겠다.〕

그리 말한 예르게네는 또 앞서 걷기 시작했다. 넷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 예르게네를 따라 걸었다. 신전의 심층부라고 할 만한 곳에 다다르자 보비네의 석상이 웅장한 분위기를 풍기며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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