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편지에 적힌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있던 율비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세피로스는 라슈발렌을 배신했다 그러지 않았나요?”
율비네는 혹시 자신이 놓친 다른 내용이 있지는 않은지 편지지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왜 나를 찾는 거지?”
아리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뱅뱅 돌며 세피로스의 저의를 알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무엇보다 아리스가 신탁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후 아리스는 고개를 율비네에게 돌렸다.
“그를 만나서 무슨 생각인지 이야기라도 들어 봐야겠어.”
“세피로스는 리비엘로 람을 죽인 사람입니다. 전하께 해를 끼칠 위험성은 충분한데 그를 정말 만날 생각이십니까? 게다가 지금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안답니까? 별에서 내린 자들 일곱이 잠든 곳은…….”
“정황상 일곱 별의 바다겠지.”
“그 바다가 얼마나 넓은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넓은 곳에서 세피로스를 어떻게 찾겠다는 건데요?”
“방법이 있을 거야. 자기가 직접 찾아오라고까지 했는데 내가 그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게 내버려 둘 일은 없지 않겠어?”
그렇다 해도 아리스는 세피로스가 배신자인 것을 안 이상 세피로스의 장단에 맞춰 줄 의사는 없었다. 그가 라우노와 반목하고 있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 내용은 달랐다.
“그것 말고도 일이 산더미입니다, 전하! 지금 하루가 멀다고 각국의 정상들과 회담도 하고 국내 정세에 대한 보고도 받으셔야…….”
“다녀와서 할게.”
“전하!”
“수상은 뒀다 뭐 해?”
“전하! 전하의 서명이 필요한 서류를 쌓으면 델루카의 끝과 끝을 연결할 수 있는 성벽을 만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율비네의 간청에 아리스는 버럭 성을 내었다.
“지금 내게는 해결되지 않은 일투성이야! 정치? 솔직히 말해서 알 게 뭐야! 나는 그저 결재 서류에 서명하고 도장만 찍고 있잖아! 원래 나는 이런 것 따윈 관심도 없었고 바라지도 않았다고. 아무리 클라인을 되찾고 원래 내 위치로 복권했다 해도 내게 내린 여신의 신탁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 이것으로 끝이 아니잖아? 대체 내게 이것보다 더 급한 일이 뭐가 있는데? 내가 원하는 건 여신이 내게 내린 신탁의 끝을, 결말을 보는 거야! 정말 이 세계의 종말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조용히 해. 말리지 마.”
아리스가 한번 저런 식으로 나오면 정말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율비네는 잘 알았다. 그리고 아리스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아리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고 그에게 내려진 신탁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그가 이 세계에 가져올 종말이란 것을 막는 것이었다.
아리스는 원하지 않았어도 서리 여신의 신탁이 내려진 이상 그것은 그의 숙명과도 같은 일이 되어 버렸다. 서리 여신의 신탁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아리스는 절대로 두 발 뻗고 편히 잘 수 없을 것이었다. 그것을 율비네도 알았다. 알았기에 더 이상 말릴 수도 없었다.
율비네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석 달 동안 답지 않게 얌전히 일을 열심히 하신다 싶었습니다. 그보다 미레아 씨에게는 알리지 않을 작정이십니까?”
그 말에 아리스가 멈칫했다. 사실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레아에게 알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빠르게 결정 내렸다.
“미레아 그 녀석이 알면…….”
그는 코끝을 찡그리고 앞머리를 헝클었다.
“또 무리할 게 뻔해. 게다가 세피로스는 미레아가 아니고 나를 불렀어. 그러니 내 선에서 처리할 거야.”
율비네는 다른 것은 다 양보한다 쳐도 아리스가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고 홀몸으로 세피로스가 말한 곳까지 가겠다는 말인가.
미레아라면 선뜻 그에게 도움을 줄 것 같았지만 아리스는 이번에도, 아니, 오히려 아까 전보다 더 강경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율비네는 어쩔 수 없단 태도로 한숨이나 푹푹 내쉬며 나섰다.
“그렇다면 저라도 동행하겠습니다.”
“부탁해.”
아리스는 굳이 율비네를 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리스의 부관이었고 아리스가 어딜 가든 따라올 작정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율비네는 아리스가 미레아는 안 된다고 엄포했으면서 자신은 된다고 허락을 내린 이 상황에 대해 기분이 좋아야 할지 나빠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아리스가 율비네를 믿고 있는 것이니 자랑스럽게 생각하려 했어도 주군의 편애는 눈물겨웠다.
“그렇게 되었으니 지금 맡은 일들을 인수인계만 하고 올 테니까 비공정 띄울 준비라도 해 놔.”
아리스는 그 와중에 은근히 착실하기까지 했다. 아리스는 바로 떠날 준비를 하러 집무실을 쌩 나가 버렸다. 율비네는 아리스가 남기고 간 세피로스의 편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놈의 신탁이 뭐라고…….”
클라인 지역을 정화하고, 황제를 밀어내고, 복권하고…… 이 모든 것을 다 했는데도 아직 그것에 매여 있어야 하는 이 상황이 율비네는 못마땅하기 짝이 없었다.
신탁의 끝은 과연 언제쯤일까. 정말로 아리스가 이 세상의 종말을 가져와야 신탁이 완성되는 것일까? 여러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주군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르는 수밖에.
* * *
미레아 일행은 아즈타니 지역까지 21시간 동안 비행한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비행만 한 것은 아니었다. 중간에 연료를 보급받기 위해 한번 착륙했다가 식사만 부리나케 하고 다시 비공정을 띄웠다.
아즈타니는 리프칸 대륙 남부에 있는 대초원을 일컫는 말이었다. 초가을로 접어든 로아메나 대륙과는 다르게 리프칸 대륙은 북반구에 있었기 때문에 계절이 거꾸로 가서 봄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시기상으로는 봄인데도 아즈타니 초원은 다른 곳보다 겨울이 길었고 혹독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미레아는 눈이 잔뜩 쌓인 초원에 자신이 지나 온 흔적을 길게 남기며 걸었다. 비공정으로는 땅 아래를 세세하게 살필 수 없다 보니 직접 걸어야 했다.
“추워 뒤지겠네!”
미레아가 자신의 팔뚝을 북북 쓸어내리며 소리쳤다.
“그렇게 말하면 추위가 가시기라도 해?”
앞서 걷던 파울로가 옷깃에 달라붙은 성에를 털어 내었다.
“쿤둘렌은 좋으시겠다. 털이 있어서.”
라일라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중얼거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쿤둘렌에게 향했다. 쿤둘렌은 풍성한 털 덕분에 그렇게 추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칼바람은 달갑지 않았다.
“저는 록산에 있었던 덕분에 아직 여름 털이 돋아 있습니다. 겨울 털갈이를 하기 전이란 말입니다. 저도 추워요.”
쿤둘렌은 손에 나침반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바늘이 향하는 곳을 따라 움직이며 추위와 싸워 가면서 그들이 찾는 것은 보비네의 성소에 있는 신전이었다.
그것은 테나력이 시작하기 훨씬 전에 있던 신전이었는데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보비네의 성소였지만, 풍화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신전의 모습 역시 흙과 바람에 쓸려 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쿤둘렌이 나침반 같은 기구를 이용해 보비네의 신성력을 탐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비록 오래도록 세월의 흐름을 피할 수 없었다고는 하나 성소에 있는 신전이라면 미미하게나마 보비네의 신성력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
“라케드 님은 대체 왜 이런 곳을 골라 주셨을까요? 신전이라 그랬으면서 신전이 없는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그들은 걸으면서 라케드의 의중을 고민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울로의 물음에 쿤둘렌이 대답했다.
“아즈타니 지역은 보비네가 잠든 곳으로 추정되는 성소 중 한 곳입니다.”
그의 입가에 입김이 거칠게 피어났다.
“지금까지 가사 상태에 빠진 보비네가 있는 곳은 추측만으로 소문이 무성했고 위치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요. 그런데 라케드 님께서 이곳을 집어서 이야기하신 것을 보니 여기가 맞는 듯싶습니다.”
“세피로스가 보비네에게 용무가 있다는 소리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보비네가 부활한다면 서리 여신은 직무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가 이곳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라케드가 이곳을 지목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추측이었지만 세피로스가 바라는 바를 거슬러 올라가면 나름대로 합당한 연유가 있었다. 세피로스는 한때 가사 상태에 빠진 보비네를 되살리는 방법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서리 여신이 지금의 지위에서 내려오려면 보비네의 도움이 불가피하게 필요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땅속에 숨은 보비네를 되살릴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방법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선뜻 행할 수도 없었고 세피로스에겐 그럴 만한 힘도 없었다. 그렇게 한번 좌절감을 겪었지만 세피로스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평원의 지평선까지 눈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신전이 있긴 한 거냐고요.”
라일라는 덜덜 떨면서 낙오되지 않도록 쿤둘렌의 옆에 바싹 붙어 걸었다.
“신전이 단순한 건물 형태가 아닐 수도 있지요.”
쿤둘렌은 바늘이 가리킨 곳을 향해 가다 갑자기 발을 쿵쿵 굴렸다.
“이곳…… 여기는 맨땅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눈을 헤치고 보자 그들은 어느새인가 꽝꽝 얼어붙은 호수 한가운데였다.
“위험하니 돌아갑시다.”
파울로가 그렇게 판단하자 다른 사람들 역시 그 의견에 찬성했다.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발아래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파울로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굳었다.
“이런…….”
쩡!
저 멀리서 얼음이 크게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고 금이 간 얼음들이 갈라지며 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호수 위의 얼음이 깨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얼음 사이에 갇혀 호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뛰어!”
파울로가 일행들의 등을 떠밀며 뛰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뛰던 라일라가 갑자기 작은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쑥 꺼졌다.
“라일라!”
미레아가 깜짝 놀라 달려가 갈라진 얼음 사이로 물에 빠진 라일라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둘 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어 연신 미끄러졌다.
앞서 달리던 파울로와 쿤둘렌이 돌아와 미레아와 함께 라일라를 호수에서 끄집어냈다. 라일라가 물을 토하며 엎어졌다. 하지만 발아래로 얼음이 연신 갈라지고 있어서 이 자리에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내 뜻을 들어라!”
쿤둘렌이 마석을 이용해 마법을 펼쳤다.